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5.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구름위 2023. 4.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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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1783년 정조 7년에 역시 중국을 다녀온 대사헌 홍양호가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박지원의 비판과 비슷하다. 

 

"신이 그동안 외람되게도 사명을 띠고 연경과 계주 사이를 왕래해 보았건데 산천과 읍성은 모두 다름이 없지만 의관과 문물은 이미 옛날의 것이 아니었기에 자다가도 한탄스러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 두가지나마 연구한 것이 있기는 해도,  그 땅을 밟아 보니 놀라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삼가 국가의 계책에 도움이 되고 민생의 사용에 절실한 것들을 여섯 가지 조목으로 열거하였으니, 살펴보아주소서.

 

첯째는 수레 제도입니다.

 

옛적에 황제씨 시절부터 그 나라의 부를 묻게 되면 수레의 수효를 먼저 답변했다 합니다. 민생의 기구는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다닐 적에 승차가 있고 싸울 적에는 융차가 있으며 짐을 실을 때는 대차, 농가에는 역차, 밭에 물을 댈 적에는 수차가 있으며, 천백 가지로 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사행에서 본 것도 연경거리에는 수레가 거리에 넘쳐났는데, 비천한 노예나 가난한 어린아이들이 아니면 거개 모두 수레를 타고 다녔습니다. 연경에서 요동까지 1천여 리 사이에 수레 길이 서로 이어져 방울 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당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가는 가벼운 수레도 세 사람이 함께 타고 다니며, 바퀴가 하나인 작은 원은 한 사람이 뒤에서 밀고 다니면서 일을 하니, 힘이 절반밖에 들지 않습니다. 수레라는 것은 먹이지 않아도 되는 말이자 걸어다니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온 나라의 편리하게 쓰는 기구가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유독 우리나라에는 수레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대략 두 가지라 깄는데, 하나는 우리나라 도로가 험악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우마가 부족한다는 것입니다. 청컨데 신이 하나하나 설명드리겠습니다. 천하에 험악한 길이라 함은 촉의 산길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사마상여가 일찍이 마차로 통행하였고 제갈량 또한 항상 잔교로 통행하기도 했습니다. 신이 지나간 본바 청석령과 마천령의 험준한 길은 자못 우리나라 동선령보다도 더했지만, 수레가 꺼리낌 없이 다니고 있으니 이 하나만 들어도 여타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로가 험악하다는 것은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또 우리나라에 우마가 부족하다는 것은 번식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육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르는 사람이 허술하여 태만하기 때문인 것이니, 이유는 기르는 방법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축의 번성이 우리나라만 한 데가 없습니다. 서울과 외방에서 도살하는 것이 하루에도 몇천 마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데도 생산이 쉬지 않고 있으니, 이는 결국 풍토가 합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소나 말은 원래 등에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짐승이 아니라 말은 타고 다니기에 합당한 것이지 끄는 힘은 소와 같지 못하며 소는 끄는 힘은 좋지만 길을 내왕하는 힘은 말보다 떨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와 말이 모두 등에다 짐을 지게 되는데, 소는 그래도 가능하지만 말은 위태하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강가에서 쌀을 실어 나르는 말은 대부분 반년이면 한 번씩 바꾸어야 하고, 성안에서 땔감을 운반하는 말은 세 번 겨울이 지나고 나면 힘이 다되어 버려 죽지 않으면 앉은 뱅이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어찌 말의 죄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 괴로워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시행할 방법을 찿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자들은 하던 방식대로만 하려 들고 새롭고 특이한 일은 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금하지 않는데도 한 사람도 이를 실행하려 들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이 일찍이 여러 도에서 벼슬살이를 다닐 적에 또한 나라 안에도 수레를 사용하는 데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안동 , 의성, 장연, 신천, 함흥 등지에서 보건데  한두 마리의 우차를 사용하여 곡식과 뗄감을 실어 나르느라 수백 리 사이를 오가고 했는데, 제작이 거칠고 둔하여 멀리 가기는 불가능한 것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수레를 운행하려 한다면 그 방법을 중국에서 배워 와야 하니,  먼저 수레 만드는 기술자들을 연경에 보내어 제작을 모사해다가 각각 몇 대를 만들도록 하고 사용하면서 가다듬어 간다면 머지않아 각 고을이 본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벽돌 만드는 법입니다.

 

하나라 임금 발발이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고 했으니 흙을 쪘다는 것은 벽돌 구운 것을 말한 것입니다. 진나라 만리장성도 이번 사행길에 목도하건데 산 정상에 주밀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모두 벽돌이었습니다. 무산과 여산의 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도 반드시 벽돌을 사용하였음은 진실로 벽돌이 돌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벽돌의 사용처가 성벽만 있겠습니까? 궁실에 있어서도 창고는 물론이고 담장과 계단, 민가의 집도 지을 수가 있는데, 꽃벽돌과 무늬벽돌로 뒤섞어 온갓 형상으로 기교까지 부릴 수가 있습니다.

 

목재도 기둥과 서까래나 창틀에만 쓰게 되니 나무의 낭비가 없고 집이 튼튼하여 도둑맞게 될 염려가 없고 화재가 나도 번질 우려가 없습니다. 관사도 민가도 모두 지을 수가 있으니 그 이익이 넓음은 수레와 동등할 것입니다.

 

셋째는 당나귀와 양을 많이 길러야 하는 일입니다.

 

대저 땅 위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으로 소와 말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번식은 한계가 있는데 민생들의 수용은 한이 없게 되니, 무엇으로 그 부족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당나귀와 양이 곧 그것입니다. 마소와 함께 당나귀와 양을 길러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구리그릇 사용을 중지해야 합니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구리그릇을 사용하지 않으며 자기와 목기가 일반적인데 우리나라는 사치가 퍼져 심지어 금, 은그릇도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 구리그릇을 안 쓴 것은 구리로 돈을 만들기 때문인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법도가 없이 닥치는 대로 그릇을 만들고 있으며 단지 술과 음식 및 국과 반찬을 담는 것으로만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크게는 사발 및 화로와 세숫대야와 소변 그릇으로 마구 사용하기를 아낌없이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나라에 동광이 있어 끊임없이 생산하게 된다 하더라도, 물자를 아끼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이 부유한 것은 대다수의 수레가 사방에 넘쳐 있지만 물자의 사용을 검소하게 하고 재물의 운용을 절도 있게 한 때문입니다.

 

왜인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의 나라는 동의 생산이 천하에 으뜸인데도 일찍이 그릇 만드는 데에는 사용하지 않고 오직 사기와 목기를 사용할 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온 나라 안의 유.동으로 된 물건들은 제기와 악기 이외의 것은 일체 금단하고 기한을 정하여 관에 수납토록 하고 그 대가를 계산하여 준다면, 민생들의 폐해가 적고 국가에는 영구한 이로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중국의 법제를 보면 구리뿐만 아니라 철에 있어서도 함부로 사용치 아니하여 농기구 이외에는 비록 궁실을 짓는 데에 있어서도 주로 흙과 목재를 사용하고 철을 사용하는 수가 지극히 적으니, 대개 철이 곧 병기의 재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난간과 대청의 벽은 모두 기와와 벽돌을 수용하고, 소반과 합, 궤짝과 상자는 대부분 가죽이나 종이를 사용하여 목재를 쓰는 수가 적으니, 이는 대개 목재는 곧 배와 수레의 재료이기 때문이고, 붓대와 담뱃대는 또한 갈대와 등나무를 사용하고 대나무를 쓰지 않음은 대개 대나무가 곧 화살과 활의 재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모두 중국의 재물을 운용하는 법도이니 이런 것들이 쌓여 부유하고 강한 국가의 기반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섯째는 털모자를 혁파해야 합니다.

 

지금 왜인들의 은 거래가 끊어졌기에 나라 안의 은화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은을 절약하고 비축해야 하는데 그런 귀한 은을 가져다가 중국에서 은을 주고 아무쓸모없는 물건을 사들여 오고 있으니 이게 무슨 참담한 일이겠습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털모자는 가장 쓸데없는 허비품이며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는 으뜸이라 할 만하니 시급히 그 구멍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자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관 위에다가 관을 더 쓰는 격이고 부녀들에게 있어서는 비녀도 아니고 건도 아니어서 단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오직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찌 달리 할 것이 없어서 하필이면 귀한 은을 팔아 나라에서 구해야 한단 말입니까? 중국에서는 쓸 데가 없는 것이기에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팔아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이득을 거두고 있으니, 어찌 중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해의 모자 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허비하게 됩니다. 부족한 돈을 가지고 쓸데 없는 물건을 들여다가 겨우 가을과 겨울을 지내고 나면 헤어져 땅에 버리게 되는데, 올해에도 그러하고 내년에도 그러하게 됩니다. 재물은 한계가 있는 법인데 장차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시급히 털모자 무역을 혁파하고 꼭 필요한 물건인 마, 포, 견 같은 것들을 들여오도록 하소서.

 

여섯째는 중국말을 익혀야 하는 일입니다.

 

원래 조정의 사대부들은 중국어를 통달하여 역관의 혀를 빌리지 않고도 그들과 메아리치듯 뜻을 주고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임진년과 계사년 무렵 국가의 큰일들에 있어서 그 힘을 입게 된 바가 많았습니다.

 

지금 사신들은 그들과 상대할 때 간단한 말을 할 적에도 역서를 뒤적거려야 하는데, 소위 역서들도 또한 겨우 길거리나 항간의 예삿말만 있을 뿐이니, 장차 중대한 논의가 벌어질 시 어떻게 심정과 의지를 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행히도 두 나라가 교호하므로 그럴 일이 없지만 혹시라도 주청하고 진변해야 할 일이  있게 된다면 누가 책임지고 그 뜻을 전달 할 수조차 없을 터인데 이 또한 소소한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몽골에 대한 연구도 중요합니다. 뭉골과 우리나라가 지금은 비록 함께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만 국경 지역이 매우 가까운데 그들의 병마가 가장 거세므로 앞날의 일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소홀히 여기어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사역원을 감독하고 모든 어학의 과정을 엄격하게 하여 상벌제도를 두어 기어코 통달토록 제도를 바꾸소서." (<정조실록>, 정조 7년 7월 18일)

 

이때가 1783년이다. 영국으로부터 미국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보다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모차르트가 그의 대표작들을 왕성하게 발표하고 아일랜드 같은 나라에서는 의회가 독립했던 해이기도 하다.

 

흔히 역사는 정치적 개혁론자들의 이름은 쉽게 기억하지만 이러 민생개혁론자들의 이름은 망각해 버린다. 이런 중대한 상소가 울라간 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비변사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 수레와 벽돌은 다음 사절 편에 기술자를 보내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구리그릇 사용금지는 혼란이 예상되어 반대, 모자 수입 금지도 세금  축소 문제가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볼 것, 당나귀와 양의 목장 설치는 우선 몇 마리 들여다가 길러보고 결정할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어느 것 한 가지도 즉시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니 요즘 말로 하면 위원화 같은 것을 만들어 즉시 검토해 나갈 것, 그런 조치가 필요하지만 그런 조치는 결코 없었다.

 

조선이 끝나도록 벽돌 보급은 아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성벽과 건물은 여전히 돌로 쌓고 목재로 지었다. 정조 때 수원화성을 올리면서 문루를 비롯하여 부분적으로 도입된 정도다.

 

수레는 왕실용으로 일부 보급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지게로 모든 짐을 날랐다. 이보다 훨씬 뒤인 1900년대에도 부산에 도착한 외국 선교사들은 가마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갔다.

 

구리그릇도 계속 사용하다가 일제 때 전쟁용품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출돠었고 노새, 양 목장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털모자도 해방 후까지 그대로 사용하였다. 중국어 교육도 몇십 명 역관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되놈 말이라면서 오히려 익히는 것을 껴려했다. 세계 오만 군대의 언어를 가르치는 대학에서도 겨우 30여 년 전에야 비로소 중국어학과가 만들어졌다.

 

일본에도 임진왜란 이후 19세기까지 총 12회의 통신사가 다녀왔다. 국역 <해행총재> 속에만 10여 종의 일본 견문록이 남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종의 견문록이 있지만 한결 같이 일본의 화려함과 번영을 소개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 나라의 문무를 배우자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그때부터라도 일본의 동태를 잘 살펴 개혁하고 대비하였더라면 일제의 조선 침탈도 막아낼 수 있었을 터인데 언제나 똑 같은 방심만 있을 뿐이었다.

 

조선 말기에 쇄국정책이 있었던 것만이 아니다.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조선 사대부들의 머리는 원초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돌머리로 굳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