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3.박지원의 <열하일기>, 허공의 메아리

구름위 2023. 4. 1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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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 허공의 메아리

 

"참으로 좋은 울음 터로다. 한바탕 크게 울만 하구나."

 

이 말은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박지원이 중국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당시 관직도 없는 백년서생이었지만 집안 형님이었던 박명원이 중국 사절단장으로 가게 되자 43세의 나이로 수행을 했다. 그때가 1780년 정조 4년이다.

 

일행이 국경을 넘어 열흘이 지나 요동벌판에 이르게 되자 산해관까지 천 2백 리 길 사방이 오직 망당한 지평선뿐이니 그걸 보면서 박지원은 그렇게 탄식했다. 울음이란 칠정 중에서 오직 슬퍼서만 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북받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사랑이 그리워도, 욕심이 지나쳐도, 불평하거나 억울할 때도 우는 법인데 생전처음 그렇게 광막한 곳을 바라보고 잇으니 감동이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조선의 작은 땅 덩어리, 어디를 둘러 봐도 탁 트인 곳 하나 없는 막힌 곳만을 보고 살다가 이런 대 평원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찬탄을 터뜨렸다.

 

그는 돌아와서 조선 기행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최고의 기행문 <열하일기>를 지어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기이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마치 한말 우리나라 사절단이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서 느꼈던 충격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수백 년 전부터 해마다 수없이 다닌 것인데 그럼 그때까지의 사절들은 대체 뭘 보고 왔기에 박지원 같은 경탄이나 보고서 같은 것이 없었단 말인가?

 

박지원은 의식주 모든 면에서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다. 중국은 이렇게 발전했는데 왜 조선은 이 모양인가. 중국이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옳다면서 기를 쓰고 따라 하던 나라인데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하찮은 물통 하나도 달랐다. 조선은 나무 물통의 바깥을 대나무로 묶어서 얼마 가지 않으면 대나무 매듭이 썩고 헐거워져 물통이 못쓰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물통은 겉은 쇠태로 묶어서 아무리 써도 변함이 없고 단단하다.

 

온통 좁고 구불거리는 조선의 거리와 달리 그곳 거리는 마치 먹줄로 튕겨놓은 것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크고 일직선으로 뻗었으며  집들은 넓고 화려했다.

 

본토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요동 인근에서 본 것이 그러했다. 이런 변두리가 그러할진대 연경에 가면 과연 얼마나 많은 다른 새로운 것을 볼 것인가?

 

박지원은 비로소 신랄하게 조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비판이 아니라 모든 생활 관습에 대한 비판이었다.

 

말과 노새 대여섯 마리씩 끄는 튼튼한 수레, 길 좌우측에 즐비하게 늘어선 화려한 상점들, 견고한 벽돌로 지은 거대한 주택들, 그는 특히 벽돌을 유심히 봤다. 길이는 한자요 너비는 다섯 치, 그것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어 올린 담장과 주택들, 벽돌을 쌓을 때 사용하는 회, 우리처럼 지붕 위에 흙을 잔뜩 올리지 않고 삿자리를 깐 후 곧장 잇는 기와, 회로 이어서 틈새가 전혀 없는 공법, 빈틈으로 온갖 벌레와 쥐, 뱀들이 들끓고 무게 때문에 기둥이 휘어져 내리는 한옥과는 전혀 다른 방식에서 박지원은 감탄했다.

 

중국 성벽도 돌로 쌓지 않고 벽돌로 올렸다. 일행인 정 진사에게 어떤 방법이 좋은가 묻자 정 진사 왈,

"아무래도 벽돌은 돌보다 못하지요."

 

박지원이 반박한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네. 벽돌은 기계로 찍어내기 때문에 만 개의 벽돌이 모두 같은데 돌처럼 깍고 다듬을 필요가 없고 현장에서 아궁이만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먼 곳에서 운반해야 하는 고생도 없는 거 아닌가. 돌은 산에서 쪼개고 운반하고 또 다듬고 쌓을 때도 몇 사람이 덤벼 겨우 하나를 들어 올릴 수 있네.

 

게다가 돌은 원래 모가 많이 나서 조약돌로 그 틈새를 메워야 하는 데 장마를 한 번만 거쳐도 사이가 벌어지고 조금만 지나면 저절로 허물어지기 십상이지, 단단하기로 말하더라도 벽돌 한 장은 돌보다는 못하겠지만 그것을 연이어 붙여 놓으면 돌이 결코 벽돌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네."

 

중국은 가는 곳마다 몇 집 건너 벽돌 굽는 아궁이가 있었다.

 

"그 가마의 형태도 우리 것고 다르다. 우리 것은 뉘어놓은 아궁이인데 이는 처음부터 가마를 만드는데 필요한 벽돌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나무를 세워놓고 흙으로 바른다음 큰 소나무를 때서 말려야 한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아궁이는 길기만 했지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타지 못하고 기운이 세지 못하고 힘이 없어 항상 불을 지피고 있어야 한다. 불길을 세게 하면 고르지 못하고 가까이 놓인 기와는 이지러지는 것이 보통이며 먼 곳에 있는 것은 잘 구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굽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방식이니 허비가 너무 많고 게다가 소나무는 한 번 베면 세순이 잘 나오지 않는 나무이므로 옹기장이 한번 잘못 만나면 사방의 산이 벌거숭이가 되어 버린다. 백년을 두고 기른 것을 하루아침에 다 베어버리고 얼마 지나면 옹기장이들이 다시 새처럼 흩어져 가버리면 주변은 황폐한 벌거숭이 산들만 남았다. 이는 오로지 굽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벽돌 가마를 보니 벽돌을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에 말리는 비용이 들지 않으며 또 마음대로 높고 크게 할 수 있고 벽돌 쌓는 방법도 가마 천장까지 쌓아도 사방으로 불길이 잘 통하게 되어 있어서 불을 많이 때지 않아도 금방 구워지고 만다."

 

박지원의 그런 탄식은 방구들 놓는 것으로 이어진다.

" 중국의 구들 역시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꿀뚝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온돌이 불을 때도 방이 골고루 덥지 않는 것은 그 잘못이 모두 굴뚝을 만든 방식 때문이다.

 

우리나라 온들 놓는 방법은 여섯 가지 단점이 있다. 진흙을 이겨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 조약돌로 높이를 고르긴 하지만 불을 때서 흙이 마르면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그 첯째이며 돌이 울퉁불퉁하여 움푹한 데는 흙을 더 메워서 평평하게 하기 때문에 불을 때도 골고루 덥지 앟는 것이 둘째이고 불 고래가 불쑥 높아서 불길이 서호 호응하지 못하는 것이 셋째다.

 

그것뿐만 아니다. 중국에서 예로부터 조선의 백추지(백지를 다듬질한 것)를 높이 쳤다 하나 이는 외국의 진기한 것이라 그런 것이지 실제로 쓰고 그러기에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종이도 먹을 잘 받고 붓 길이 순순히 잘 풀려야 귀한 것이지 반드시 단단하고 질긴 것만이 덕이 아니다. 그래서 고려 종이는 그림에는 맞지 않고 다만 돈짝처럼 두껍기만 하다는 평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 붓도 최상등이라 하나 붓은 부드럽고 날씬하여 고르게 순하여 팔과 함께 잘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 것은 강하고 뻣뻣하여 날카롭기까지 하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호주지방의 양털로 된 것이다. 양털은 다른 털에 비해 부드럽고 부서지지 않으며 종이에 닿으면 먹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이 마치 효자가 어버이가 말하기 전에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방이 우리와 달리 넓기 때문에 보편화 되어 있는 침대 생활, 의자와 탁자, 흔한 이층, 삼층집, 백성들의 다채로운 복장 등등.

 

<열하일기>는 그들의 풍속,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 습성, 건설, 인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백성들의 이용후생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썼다.

 

책이 나오자 그야말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정조도 당연히 그 책을 읽었다. 내용은 대부분 우리도 그런 쪽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받아들여진 것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때까지도 멸당당한 명나라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아 있는 데다 청나라 역시 오랑캐라는 경멸 의식이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개혁에 대한 의지도 살아 있을 동안 잠깐 숨을 몰아 쉬었을 뿐, 정조가 죽자 조선은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들에 의해 다시 과거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은 변화와 개혁을 극히 싫어하던 사대부들이 지배하며 안주하던 동방의 정체된 고요한 나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