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1.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구름위 2023. 4. 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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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조선의 관헌은 전과자?

'한국에서 절대 1등은 하면 안 된다. 2등도 위험하고 3등 정도가 그나마 낫다."

 

석학 한 분의 충고다.

"일본에서는 없는 1등도 만들어 내서 국민들이 그를 존중하고 지랑으로 삼는데 한국에서는 누가 좀 올라가면 잡고 흔들어 버린다. 국민들의 체질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 국가의 중심에는 한상 언제나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도 인물이 해답이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나 걸렸다.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은 18년, 대대 주임상사는 22년이 걸린다. 기갑사단장을 양성하는 데는 28년이 걸린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드는 데는 적어도 이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메세지가 담긴 것이다.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군인이나 전사자는 끝까지 찿는다는 것도 그들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60년이 지난 이제야 전사자를 발굴한다, 납북자를 송환하라고 하지만 북한은 전혀 미동이 없다. 탈북한 국군 포로가 사선을 넘어 할아버지가 다 되어 돌아왔다. 월남전 전사자 시신은 한구도 없다는 정부의 발표였지만 이름 모를  월남 땅에 묻혀 있는 국군 시신을 찿으려는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 빛바랜 보훈 정책이 앞으로 국난을 당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절대 1등은 하지 마라.' 게그일망정 아쉽다.

 

사람을 매장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민족이라고 자학하는 분들도 있는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 그런 풍조가 그렇게 왕성한 것일까?

 

조선의 청백리 3대 정승이라고 하면 황희, 맹사성, 이퇴계를 꼽는다. 그러나 이들의 생애를 보자.

 

맹사성은 한 벌의 옷으로 항상 차림새가 누추하여 지방에 가면 수령들이 조롱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세 번이나 귀양을 갔다. 전의감 승지로 근무할 당시 태종에게 올린 약이 잘못되어 왕이 구토를 하고 부작용이 생기자 미리 약을 시음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유배를 당했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모두 애매한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처형을 당하려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상소했다가 왕의 분노를 샀다.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러한 상소의 요청을 받아들여 맹사성을 죽이라고 태종이 명령하자 권신 이숙번이 눈물로 호소했다. 죽이자고 하는 남 판서, 박 참지에게 찿아가서,

"그대들은 도리를 아는 재상인데 어찌 왕께 아첨만 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하는가. 만약 맹사성을 죽인다면 나는 머리를 깍고 절로 떠나 버리겠소."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역적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요행히 목숨을 구하고 장 100대를 맞은 다음 귀양형에 처해졌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 역시 귀양을 간 적이 있다.

 

5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는데 이유는 태종이 세자이던 양영을 폐하고 동생 세종을 세자로 바꾸는 데 대한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황희는 한 나라의 예법과 또 세자를 바꿨을 때 일어날 혼란을 염두에 두고 그런 반대를 했지만 귀양형이 그 보답이었다.

 

이퇴계는 귀양을 간 적은 없다. 그러나 을사사화 당시 식탈관직을 당한 적이 있고 그가 관직에 결정적으로 흥미를 잃은 것은 형님 때문이었다. 형 이해는 동생 못지않게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이었는데 충청관찰사 시절 을사사회에 휩쓸려 참소를 당하고 함경도로 유배를 가던 중 도중에 병이 도져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이퇴계는 거듭된 관직을 번번이 사양하고 시골에 묻혀 살았다. 명종, 선조에  걸쳐 줄기찬 관직 제의가 있었지만 피치 못할 경우에 잠시 서울에 올라간 적은 있지만 병을 핑계로 곧 낙향, 노년기에 더 이상의 관재는 없었다.

 

그가 죽고 나서 보니 집안에는 양곡이 전혀 없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조금씩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조그마한 집 한 칸을 지어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도 비슷하다. 그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아 전란 중에 한때 죄인으로 몰려 봉변을 겪었다.

 

그는 이순신이 전쟁 중 삭탈관직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라도 의병대장이었던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형틀에서 맞아 죽은 것을 보았다. 세조 때 병조판서까지 올랐던 젊은 남이 장군이 능지처사를 당하여 죽었다.

 

좌의정 이항복은 조선이 낳은 뛰어난 대신이며 학자이기도 하다. 예조판서를 아홉 번이나 역임한 이정귀는 그를 가리켜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이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하게 처사를 했으며 그에게서 당쟁의 당색을 찿아볼 것이 없었다. 그의 문장도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 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런 이항복도 결국 북청으로 유배를 가 그 삭막한 땅에서 죽었다.

 

그는 공평무사했지만 당시 집권 세력이던 정인홍 측에서는 이항복을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가 왔다.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정인홍 일파 속에서 혼자 반대하다가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그래서 이헝복이 결국 삭탈관직과 유배형을 받은 것이다.

 

이항복의 인물됨을 존경해마지 않았던 이정귀 역시 관직 생활 동안 10여 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를 삭탈관직시키고 내치라는 상소와 광해군 10년에는 유생 김창이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렸다.

 

곽재우는 조선 조정의 권력의 생태를 꿰뚫어 본 사람이다. 전란 때 모든 가산을 다털어 의병을 일으켰지만 전란 후 관직을 마다하고 아들과 함께 깊은 산기슭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를 잘 아는 광해군이 수차례 올라오라고 명령하고 때로는 관복과 말까지 보냈지만 그는 결코 올라오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조선 조정의 권력 생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관직에 욕심내어 올라갔다면 아마 인조 반정시 정인홍처럼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같은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은 정권의 실세가 되어 천하를 주름잡고 있었지만 그는 왕의 편지에 답장을 쓸 변변한 종이조차 없어서 한 조각 작은 종이에 편지를 잘 받았다는 확인서밖에 못 써주는 빈한한 처지였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조선은 위대한 두 인물을 낳았다. 이순신과 유성룡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어 보면 그렇게 나라를 꿰뚫고 있었던 그의 혜안에 가슴이 떨릴 정도다. 비록 충무공이 혁혁한 전승을 거두었지만 유성룡이 없었더라면 나라는 반쪽이 되거나 그때부터 왜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순신이 전사한 날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뒤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 그는 울부짖었다.

"하늘은 어쩌라고 그에게 그 뛰어난 재주와 능력, 인격은 주었으면서 수명은 더 많이 주지 않았던가. 오호라 비통하고 비통하구나."

 

탄핵으로 서울을 떠난 노년을 그는 고향인 안동 하회에서 살았다. 2년 후 의인왕후 국상이 있자 서울로 올라와 성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동대문 밖에서 홀로 곡을 올리고 그날 바로 돌아갔다. 그 뒤로 왕의 수많은 부름이 있었고 심지어는 충훈부에서 초상화를 그리길 요청했지만 그마저 거절하고 죽기 3년 전 조선이 내세울 수 있는 진정한 기록인 <징비록>의 저술을 끝냈다.

 

아마 이러한 예를 다 거론하려면 <조선진상조사위원회>라도 만들어 마치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조사가 될 것이다.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왕실 적자로서 가장 똑똑한 인물은 이하전이었다. 당연히 이하전을 왕으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집권 세력이던 안동 김씨 측에서 그러한 이하전을 외면하고 그들이 다루기 만만한 시골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강화도령 철종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철종이 등극하자 이하전은 역모에 걸렸다.  조선에서 가장 흔한 함정이다. 이재두라는 하급 관졸이 몇 사람과 작당하여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밀고를 기화로 즉시 국문을 당했다. 오랫동안 그를 감시해온 안동 김씨 쪽의 모함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형을 받았고 계속해서 유배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쏟아진 끝에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죄는 젊은 이씨 왕족 중에서 가장 똑똑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유배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당시는 죄인을 오래 가둬놓는 감옥이 없었다. 지금의 구치소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장기간 처벌할 자는 모두 멀리 변두리로 유배를 보냈다. 지금 이름 있는 사람치고 이 덫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말하자면 조선의 관헌은 대부분 전과자였던 셈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해서 주로 탄핵이 올라오면 주변의 대신들이 일제히 동조하여 왕을 독촉하며 끈질기게 상소를 올리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될 때까지 벌떼처럼 왕을 괴롭힌다.  그래서 결국 왕은 승락하고야 만다. 이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유배를 갔느냐 안 갔느냐는 의미가 없고 몇 번 갔느냐가 차라리 알기 편하다. 조금만 집권세력과 다른 의견을 나타나거나 똑똑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타나는 필연적인 것이 탄핵이라는 것이다.

 

탄핵에 한번 걸리고나면 빠져 나가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왕이 허락할 때까지 끈질기게 고하고 또 고하기 때문에 왕은 지처서 종내에는 '경들이 알아서 하라'라고 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이하전의 경우도 그런 경우다. 마음 착한 왕 철종은 제주도 유배형으로 그치려고 했으나 권신들이 1년 내내 유배형으로만으로는 안 된다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은 유학에서 이상적으로 제시한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의 당으로 전락하여 서로 모함과 탄핵의 수렁과 탐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