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9.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구름위 2023. 4. 1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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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일본은 수많은 조선 포로를 끌고 갔다. 그 숫자가 일본 측 연구자에 의하면 약 7만 명에 달한다.

 

남녀는 물론이고 전문 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도공, 의원, 화공, 악공, 목공 등 각 부문별로 골라서 데려갔다.

 

그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간 사람도 상당수 많았는데, 전쟁 중 일본군이 포로로 잡은 조선군이나 일반 백성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참여한 조선인을 포함하여 전쟁 후반기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면서 왜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이때 축성작업에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이 약 10만에 가까웠다. 그들이 전쟁이 끝나면 처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왜군을 따라가는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주로 규슈 지역의 농노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쪽의 추정이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들의 주요 임무는 이들 포로들을 데려오는 송환 임무가 주였다.

 

1607년, 1617, 1624, 1643년 등 4차에 걸쳐 파견된 조선 사절은 '조선 통신사'라고 불리는데 특히 첯 세 차례 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 포로 송환을 위해 직함 자체도 끌려간 사람들을 되돌려오는 사신이란 뜻으로 '쇄환사'라했다.

 

일본인 학자 요네타니 히토시에 따르면 1599년부터 1643년 사이에 조선 포로들의 귀환 사례는 63건이고 전체 숫자는 6,323명이다. 전체 포로 숫자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일부나마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의 전쟁관습인 '히토가에시'가 일정부분 역활을 했다. '히토가에시'란 전쟁에서 포로를 잡은 자는 전쟁이 끝난 후 옛 주인이 돌려달라고 요구할 경우,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주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절이 쇄환을 요구하자, 일본의 막부 다이묘들은 이런 관행에 따라 포로를 소극적이나마 돌려주기 시작했다. 일부 다이묘들의 경우 자발적으로 잡혀온 조선인 포로를 모아서 조선 사절에게 보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은 조선인 송환에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보나 더 큰 변수로 작용한 것은 놀랍게도 잡혀간 조선인 포로 중 송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 상당수가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고 이러한 이유로 송환자는 줄어들었다. 돌아가봐야 처벌 받기 쉽상이고 그동안 삶이 너무나 척박하였고 각종 무지막지한 세금과 관리들의 수탈, 어치피 벗어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에 대한 수많은 천대와 억압, 그리고 박해, 그리고 매년 재해와 전염병으로 평생 가난하게 살거나 유리걸식할 바에는 일본에 그대로 남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자료는 우리 쪽에 많이 남아 있다.

 

1617년 광해군 7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부상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놀라움을 표현했다. 돌아가자고 하면 얼런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미적거리며 따라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열다섯 살 이후에 포로가 된 자는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듯했지만 그들 역시 지금 조선의 살림살이가 어떤가 물으면서 양다리를 걸치려 했고 그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이미 일본에 동화되어 돌아갈 뜻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날품팔이꾼으로 고생하는 자들이고 살기가 좀 괜찮으며 대접받고 있던 도공, 악공 등 기술자들인 사람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히 호남사람들이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조선 조정의 호남 사람 차별정책을 포함, 임진왜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이 발생하여 호남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당한 가운데 조선 조정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심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일본인 주인이 만약 돌아가면 죽거나 유배되거나 평생 노비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회유 탓도 클 것이다.

 

이런 기록은 그때로부터 7년 후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갔던 강홍중이 남긴 <동사록>이란 책에도 나온다.

"봍잡혀온 사람들이 맨손으로 온 후, 수 년 동안 재산이 늘고 생활이 편해져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는 기록이다.

 

당시 일본에선 노역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노임이 지급되었고 노임도 충분해 사람들이 흔쾌히 일을 하러 나선다는 것.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노비 천대 같은 것 적었고 기슬자와 농민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재산을 불려가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오히려 조선보다 백성들에 대한 억압이 적었던 사회였다.

반면 고국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1600년부터 몇 년 사이 자력으로 일본을 탈출한 39명에게 조정에서 일시적으로 부역과 잡역을 면제조치 해줬지만 그때뿐이었다. 오히려 1605년 승려 유정과 동행하여 부산에 도착한 귀환 포로들은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

 

귀국한 유정은 이경준이라는 관원에게 포로들을 맡기면서 "형편대로 고향에 나누어 보내라"고 부탁했고 이경준은 다시 부산지역 조선 수군에게 이들을 보냈다. 이들을 받은 조선 수군들은 이들을 포박해 노비로 삼고, 젊은 여성들은 자기 것으로 삼았다. 당시의 증언이다.

 

이런 상황은 그 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아 강홍중이 부사로 참여한 조선 사절이 일본에서 146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지만 이들 역시 모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방치되어 버렸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 현지에서 이문창이라는 조선인이 "조선의 법은 일본보다 못하고, 생활하기 어려우며, 본국에 돌아가도 조금도 좋은 일이 없다."라는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그 소문을 들은 조선인 포로들이 귀국을 포기하게에 이르렀고 그래서 귀국하는 포로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귀국해도 왜군에게 잡혀갔다가 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의 도덕율은 왜놈에게 잡혀가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다. 또 전쟁 중에 양반에 대한 불만과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왜군에게 협조했던 부역자들은 처벌을 두려워했다. 이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기 위해 부역했을 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귀국 후의 처벌이 두려워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네타시 히토시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조선 포로 송환에 집착했던 것은 국가의 체면 때문이지 포로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반면 조선조정은 일본에서 돌아온 백성들에 대한 공식기록에서 "그들의 죄를 사해 주고, 부역을 가진 자는 명해 주고, 공사의 천민이면 천민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고, 원조를 완벽하게 해 줘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쇄환된 자는 모두 친족들과 만나 다시 낙토의 백성이 됐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아마 그런 기록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1630년대까지 돌아온 조선 포로는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부산대 인일문화연구소가 발간한 자료를 보면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 왜성을 쌓을 때 동원한 인원은 약 10만 명이다. 이 인원은 주로 조선군 포로와 지역 민간인들이다.

 

이때 부역했던 하천배들은 임진왜란 말기에 부역민이란 이유로 모진 고초를 당했다. 양반계급을 중심으로 지배층들로부터 갖은 수모와 굴욕을 당했고 심지어 묵숨까지 빼앗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다시 들어오자 또 부역해야만 했던 이 민초들은 1598년 8월 왜군이 철수할 때 아예 조국을 등지는 쪽을 선택했다. 전에 겪었던 고초를 너무 잘 알기에 고국 대신 목숨을 선택한 것이다. 기록에 보면 당시 수천 명이 왜군을 따라 나선 것으로 돼 있다. 이 울산 사람들은 규슈의 구마모토에 가서도 고향을 잊지는 않았다. 이들은 고향 서생포를 생각하며 자신들의 쌓은 성의 이름을 "서생'으로 지었다.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로 청군에 끌려갔다가 소현세자빈 강씨의 노력으로 돌아온 동포들은 치욕적인 대접을 받고 죽거나 쫓겨나 유랑민이 되었다. 돌아온 양반가의 여인들은 정절을 더럽힌 여자에게 조상 제사를 모시게 할 수 없다면서 이혼을 강요당했고 많은 여인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고국에서 천대가 적국에서 받았던 천대보다 더 혹독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부역자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떠올리면 마찬가지였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의 태반이 남한에서 징발된 사람들이었으며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에서 수많은 남한 출신 인민군이 죽었고 이승만의 포로 해방시 남한 출신들 중 일부는 제3국으로 고국을 떠났다. 학대받을 일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4.3폭동에 관련되어 부모형제가 처형되거나 곤욕을 치룬 가족들인 많은 제주 사람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제일조총련계로 전향하여 남한 정부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등을 돌리고 북한편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교는 관용과 포용이 부족한 사상이다. 오로지 허례허식과 가식, 허울과 체면치례가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전쟁에 실패한 장수를 목을 친 나라는 대부분 일찍 멸망했다. 지도층이 앞장섰고 관용과 포용력을 발휘하여 정복지 백성들을 같은 백성으로 간주하고 똑같은 정책을 적용했으며 차별정책을 추구하지 않앗다.

 

고대 역사를 보면 로마는 전쟁이 진 장수를 용서하고 다시 명예를 해복하도록 다시 전쟁터에 내보냈다. 그러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하여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여 적과 싸워 승리하던가 아니면 실패하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 지중해 패권을 로마와 다투던 카르타고는 전쟁에 진 장수는 당장 목을 베었다. 그러나 로마는 포로를 구출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시 군대에 재편성하여 명예를 회복하도록 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유교 사상의 멍에 속에 사대부등의 가식과 체면치례, 그리고 지배층 시대부 그들만의 나라로 백성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노예일 뿐이라는 사고를 가진 나라였다. 이런 조선이 500여 년을 버틴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