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7.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구름위 2023. 4. 1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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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천국, 우물안 개구리 조선

 

"조선의 양반들은 아주 비열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한 후 3일 동안 부인과 산다. 그런 후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자기 첩들을 두고 그녀들과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엾은 본부인에게는 정절을 강요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가거나 정절을 버리면 관리에게  데려간다. 관리는 그녀를 매질한 후 자기 종에게 줘버린다.

 

양반집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들이 혼자서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며 우리가 집을 찿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 아팬젤러>

 

아팬젤러는 1885년 입국 직후 미국 선교본부로 보내는 연례 보고서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잇다.

 

" 서울 거리는 좁고 불결하기 때문에 늘 오물이 널려 있습니다. 빈민들의 집은 윈시적으로 흙으로 지어져 있으며 작고 낮으며 음침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습니다." 

 

함께 입국했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 보낸 15년 생활 회고록을 보면,

 

"조선인들의 집은 진흙 위에 돗자리가 덮여 있는데 먼지와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해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방과 돗자리에서 생활함으로써 설사병, 천연두, 콜레라, 발진티푸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훈증이나 소독이라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 조선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전염병이 들어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모든 도랑들을 보면 바로 해답이 거기 있다. 좁은 도랑은 오물로 뒤덮여 도로로 흘러넘치고 있으며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가 모든 정원과 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우물은 더러운 옷을 세탁한 배수로 오염되어 있으며 썩은 야채들이 도로와 집의 창문 아래 수북이 쌓여 있다. 비위생적이라거나 불결하다는 상상 가능한 모든 곳들이 어디서나 늘려 있는 것이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씻기지도 않고 날 것의 푸른 오이, 산딸기, 뜨겁거나 차가운 밥에 소화가 잘 안 되는 김치를 먹인다. 배추는 겨우 도랑물에 씻는 정도인데 그러면서도 탈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된다.

 

떠나기 직전에 나는 온몸에 천연두 종기가 나있는 거의 벌거벗은 아이들 봤다. 현재 이 마을에 이런 병에 걸린 아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더니 '어느 집에나 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가 묵었던 집안에 한 사람도 없는데요? '라고 묻자, '당신들에게 방을 내주기 위해 데리고 나갔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오염된 그 작은 방에서 먹고 잤으며 담요를 펼쳐 놓았고 트렁크까지 열어 두었던 셈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들의 부엌용구와 밥그릇, 숟가락까지 사용했다.

 

아들이 걱정스러워 평양으로 전보를 보내 예방 약품을 보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언드우드 자료집>

 

반박론자들은 '서울만 그런 것이 아니디. 북경이나 동경도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니 괜찮다는 것인가?

 

이 당시의 풍정들은 참으로 저릿하다. 조선은 너무나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 외국이라고는 청국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밖에 모르는 대표적인 국가였다. 그러했음에도 여러 군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일본과  각기 수교조약을 체결했다. 당연히 그 나라에서 영사나 공사를 프견하였지만 조선에서는 그들 나라에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았다.

 

푸트 미국 공사가 고종에게 조선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설득작업을 벌였다.

 

"과연 서양의 문물이 어떠한지 배울 점이 무엇인지 직접 대표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눈으로 보고 듣게 해주십시요."

 

조선에서 최초로 사절단이 미국으로 떠난다. 특별 정권대사 민영익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인, 미국인 한 사람을 더해 모두 11명의 대표단이었다. 이름은 견미 사절단. 미국을 제대로 보고 오라는 방문단이었다.

 

그들은 제물포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일본 배를 타고 다시 요코하마로 이동, 그곳에서 미국행 기선을 옮겨 타고 7월에 출발하여 9월이 되어서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들이 본 것은 경악 그 자체였다.

 

'아니 저게 뭐지?"

"자동차라는 것입니다."

'저 번쩍이는 환한 불빛들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발전소에서 전기를 보내주면 전등에 불아 들어오는 것이지요."

"나는 마귀가 보내오는 빛인 줄 알았소이다."

'저 높은 건물들은 도대체 어떤 기술로 세운 것들인가요?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있는데 저기 모두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질문, 그것이 지급부터 100여 년 전의 조선 최고 관료이며 사절단원이었던 유길준과 미국 신문기자의 대화 내용이다. 그때까지 그는 조선의 왕궁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인 줄 알았을 것이다.

 

축음기를 보고 놀라기도 마찬가지, 소리를 안에 가두어 놓았다고 해서 축음기라는 명칭도 그때 생겻다.

 

1883년, 사절단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 전화, 자동차, 빌딩, 병원, 그리고 비행기 개발이 한창인 미국에서 돌아와 인천에서 당시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비로소 고종은 조선왕조가 서양에 비하여, 아니 서양과 견줄 것도 없이 일본에 비해서 적어도 100년은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 뿐이다. 일본은 발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청나라와 조선은 빗장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조총이 서양에서 들오온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순간 서양을 연구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인재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개혁군주 정조 때 등용된 일부 실학자들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개선의 의지를 보이면서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정조가 죽자 그들은 도리어 사대부들에 의해 탄압을 받고 사라지거나 축출되고 말았고 실권자들인 노론 세력들에 의해 조선은 정조 이전의 시대로 다시 되돌아 갔다.

 

일본과 미국에 가서 그런 문명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온 다음에도 개화파와 수구파의 수십 년 이어온 논쟁은 또 피어올랐다. 새로운 정책이 나오는 대신 조정에서 말다툼만 더욱 거세진 것이다.

 

그 시절에 이미 일본에서는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전화가 있었고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대양을 항해하는 증기선, 그리고 발전소도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호롱불 아래 살며 마소와 가마, 돛단배가 교통수단의 전부였던 그 당시의 코이라. 당시 지배층은 백성들의 가난 해소와  나라의 발전을 걱정하기는 커녕 탐욕과 권력, 처첩을 여럿 두고 호의호식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구운몽의 꿈 속에서 첩들과 밤마다 방사를 하며 해매고 있었다.

 

이 당시 외국 선교사들은 조선을 종교 혼합주의 국가로 불렀다. 조선 사람은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 세 가지를 한꺼번에 믿고 있는 국가란 의미였다.

 

이 독특한 종교관,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에서는 불교이며 곤경에 처할 때는 무당을 찿아 굿판을 서슴치 않고 벌이는 샤머니즘 신앙인이 되니 이것이 오늘날에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여기에 기독교가 가미된 정도이다.

 

지금도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 어김없이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절하고 굿판을 벌이는 것이 일상생활 관습이다. 조선의 왕궁의 지체높은 대신들도 부적이라는 것을 써 옷 속에 품고 다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대궐에도 부적을 걸어 놓았다. 해마다 부적을 만들어 대신들에게 돌리는 것이 관상감의 업무의 하나였다.

 

무덤 자리가 좋으면 영화가 온다는 풍수지리 사상은 왕실에서도 가장 적극적이니 사대부들치고 따라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엇고 일반 백성들도 당연히 따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선이나 대기업 회장 들이 조상 묘를 옮기거나 거대하게 조성하고 점집을 찿아가고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는 지경이니 아직도 우리 사회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이한 풍속들과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면 각지에서 일어나는 기근과 전염병, 폭동과 재난의 기록들도 외국 선교사들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 더 심각한 것은 백성들이 살 길을 찿아 수없이 떼를 지어 나라를 떠났다는 것이다.

 

초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평안도, 함경도 북쪽 깊숙히 들어갔는데 그들이 기록한 내용이 우리 기록에는 없다.

 

1891년 5월에는 평안도에서 1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만주와 중국 등지로 도망치는 영풍이 불었다. 그 이전부터 흉년, 좁은 농토, 괸리들의 수탈, 조정의 차별 정책 등으로 더 낳은 삶터를 찿아 중국의 간도지방으로 떠나는 인구가 많았지만, 1891년 그해에는 1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조국을 등졌다. 그들은 일제치하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일제가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순수하게 조선이라는 국가에 절망하고 떠난 인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