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4.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2)

구름위 2023. 4. 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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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나가고......

 

이런 처참한 사태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태평성대로 일고만 있는 세종 시대의 기록을 보자. 세종 6년의 지시는 이색적이다. 언제 흉년이 닥칠지 모르니 온 백성들이 도토리를 비축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큰 집은 60석, 보통 집은 40석, 작은 집은 10석을 모아야 했다.

 

1443년 세종 25년 9월 22일. 힘길도 관찰사로부터 보고가 하나 올아왔다.

 

"함길도는 지난해의 흉년으로 인하여 민간에 먹을 것이 없어 집짐승을 다 잡아 먹었으며 5, 6월 사이에는 기근이 더욱 심하여 떠돌며 빌어먹다가 산이나 골짜기와 시내에서 굶어 죽은 자가 소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4백에 이르며 살아 있는 사람들도 무력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각 수령들이 긴급히 죽이나 콩가루로 진휼하지만 관아까지 와서 수령 앞에서 죽는 자도 많으며 관가 역시 양곡이 없어 더 이상 진휼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으로 죽었다 칭하는 자들도 대부분 굶어 죽은 자들입니다." (세종실록 24년 9월 22일)

 

왕은 즉시 도체찰사 황보인에게 현장으로 나가라 명하면서 보이지 않는 구덩이나 언덕에 딩구는 시신을 모두 수습하여 묻어주라고 지시했다.

 

이 해에 함경도에서 1,700여 명이 죽었다.

 

1481년 성종 12년 12월의 상소는 관서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그중에서 황해도가 가장 심하였는데 백성들이 소, 말 등 가축을 전부 잡아먹어 가축이 남아 있지를 않으며 들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부모가 버린 자식들이 여기저기에서 울고 있다는 참사을 보고하고 있다.

 

1532년 중종 27년 5월 22일. 왕은 팔도 관찰사에게 하유했다.

 

"요즈음 연달아 흉년을 만나서 굶어 죽은 시체가 도랑과 골짜기를 매우고 있는데 올여름도 몹시 가물고 황충이 들판에 가득하여 냇물이 말라붙고 농사를 망치고 있으니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밤낮으로 황망하기 짝이 없다. 가뭄 때문에 들판의 흙이 갈라지고 추수할 고장이 전혀 없다. 시체가 잇달아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고 있으니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부덕한 사람으로 즉위한 지 20여 년이 지났어도 국가 융성은 커녕 재변만 날마다 깊어지니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응징이 따른단 말인가." (중종실록 27년 5월 22일)

 

중종 재위 때만 이런 불순한 기후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왕들의 재위기간 중에도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은 거의 찿기 힘들다.

 

1624년 인조 2년 4월의 기록. "큰 가뭄 끝에 홍수가 잇따라 팔도에 기근이 들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라는 건 그 한 예에 불과하다.

 

명종 때에는 텅 빈 국고를 지탱하기 위하여 관헌들의 구조 조정까지 실시했다.

 

1546년 명종 1년 3월 27일. 석강에서 시독관 이수경 등이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에 대해서 보고했다. 

"신이 원접사 홍섬의 종사관으로 서쪽을 왕래하였는데 어디를 가나 백성들은 지친 모습이었고 굶주려 쓰러진 자가 울부짖으며 호소하기를 '두 해동안 중국 사신이 여덟 차례 지나갔는데 작년 겨울부터 금년 늦은 봄까지 부역에 동원되어 하루도 집에 있을 때가 없었으며 집에는 곡식 한 톨이 없어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다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 곳을 잃고 말았다. 상감께 아뢰어 우선 세금을 가을까지 연기하게 해 달라' 하였습니다."

 

다시 신거관이 이뢰었다. 

"근래 백성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연속해서 중국 사신을 맞았고, 두 번씩이나 국상을 치르면서 재력이 모두 궁핍하기는 팔도가 똑같지만 그중에도 평안.황해.경기가 더욱 심합니다. 깊이 유념하소서.

 

다만 조세를 감면하게 되면 국고가 빌 것이고 감하지않으면 민생들이 불쌍합니다. 신이 임인년 경기감사로 있을 때 경기 백성들 모두 관창의 양곡을 먹었는데 관창이 바닥나자 구휼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여유있는 집에서 잠시 빌려 쓰기도 했지만 그마저 동이 나서, 비록 상께서 구휼의 하교를 누차 내렸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금년은 더욱 심하여 밀 보리가 익기 전에 굶어 죽은 백성들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곤궁한 형상은 반드시 눈으로 직접 본 뒤에야 그 참상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중종 대왕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깊은 궁중에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의 질고를 잘 안다'고 하셨지만, 지금 성상께서는 깊은 궁중에 계시니 어떻게 자세히 아시겠습니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해집니다.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면 단지 민생들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참찬관 송세형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는 쓸데없이 허위로 기록된 인원들이 많습니다. 비록 잡직에 있더라도 세력만 있으면 호군이나 사직으로 녹봉을 받는 자가 많습니다. 홍문관의 박사나 저작의 녹봉이 도리어 그들 밑에 있으니 그러고서야 국가의 재정이 어떻게 허갈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수문장.군직.학관의 무리들을 모두 6품 이하로 내려서 한 푼이라도 절약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국가의 창고가 텅 비어 버릴 것입니다." (명종실록 1년 3월 27일)

 

1793년 정조 17년 11월 사헌부 장령 강봉서가 상소했다.

"제가 장령으로 임명되어 고향의 부친을 문안하려 갔다가 목격한 참혹한 정황을 아룁니다. 제주도는 여러 차례 흉년이 들어 겨울부터 여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올해 8월에 또 큰 바람이 연일 불어서 정의현과 대정현은 황무지나 다름없고 제주 좌면과 우면도 혹심한 재해를 입어 내년 봄이면 틀림없이 배가 굶어 죽는 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이철운은 밤낮없이 술에 취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곡을 마구 받아들이면서 매 섬마다 반드시 두서너 말의 여유 곡식을 더 받고 나누어줄 때는 곡식 1말이 7, 8되에 불과한데도 그 남은 곡식은 끝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세 고을의 굶주린 백성을 뽑아 조건 없이 곡식을 나누어준 백성의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한데도 4천 명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왕이 답하기를,

"제주도는 먼 곳인데다가 큰 바다가 가로막혀 백성의 고통도 위에까지 알려지기 어려우므로, 만일 목사가 적임자가 아닐 경우네는 어떻게 그곳의 실상을 알 수 있겠는가. 작년에 굶어 죽은 백성의 수를 말햇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섬 안에서 굶어 죽은 자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하니 처음 들어본 숫자이며 설령 소문으로 전하는 말이라고 해도 어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왕은 처음에 의심했다. 수천 명이 굶어 죽었다니? 굶주린 인구가 2천 명인데 굶어 죽어서 골짜기를 메운 시체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하니 그 말이 서로 모순 아닌가?"

 

비변사 강봉서를 불러 확인한 바 놀라운 답변이 나왔다.

"굶어 죽은 섬사람들의 전체 숫자를 신이 하나하나 명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별도리 한 곳으로만 말하더라도 주민이 불과 1백여 호인데 굶어 죽은 사람이 80여 명이나 됩니다. 한 마을이 이 지경이니 온 섬을 미루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정조실록 17년 11월 11일)

 

인조, 숙종, 영조, 정조 등 왕을 가리는 법 없이 많은 백성이 죽었다. 때로는 숫자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왕도 있었다. 아사자가 많고 대역이 발생했다고 하는 데 그치는가 하면 처음에는 숫자를 집계했다가 많이 죽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숫자를 파악하고 보고한다는 것도 참혹한 일일 것이다.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별로 신뢰성이 없으나 모든 왕 재위 시에 평균 2만 명씩은 굶어 죽었다고 판단된다. 1628년 인조 6년에 함경도에서 5만, 전라도에서 1만 등등 숫자를 집계할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인구 5, 6백만 명 시대에 몇 만이 굶어 죽었다면 전 인구의 몇 퍼센트인가?

 

1678년 숙종 4년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제사를 올려주었다.

 

1696년 숙종 22년의 보고서에는 평안도 철산 등 여섯 고을에서 7월과 8월에만 1촌 5백여 명이 굶어 죽었다.

 

그 당시(해서 암행일기)라는 기록에는 동년 암행어사가 출발하여 첯째날 벽제의 한 주막에서 밥을 먹을 때 걸식무리가 떼를 지어 와 주위를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먹다 남은 밥이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울부짖으며 구걸하는 모습이 너무나 참담하였다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버린 뼈가 담장 높이와 같았다는 기록도 있다.

 

비교적 근세에 가까운 1831년 순조 13년에는 왕의 지시로 관서지방에 아사자가 즐비한데 해당 수령들이 잘 묻어주도록 당부하고 있다. 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1876년 고종 13년에도 처절한 기록이 보인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땅에 풀 한 포기 없고 의복은 남루하여 버썩 말라서 죽은 시체가 곳곳에 있지만 관리들은 상관히지 않고 세금 독촉만 하고 있으며 금광 개발은 나라에서 금한 것인데 몰래 개발하는가 하면 세금장을 들이대며 백성들을 마구 매질하고 학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종 시대의 식량 사정은 처절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도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조선 백성들과 똑 같이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하여 그것이 큰 괴로움이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