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쌍령전투'의 치욕
방어의 강점은 공격군보다 오히려 더 야습이나 기습에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변변한 반격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몇십명 단위의 기습전을 벌여 십여 명을 살상하는 몇 차례 공격을 했을 뿐이다. 그 외에는 그냥 추위에 벌벌 떨며 성안에 갇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양식이 떨어지니 손들고 나와 버렸다.
이 사이에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에서 관군이 도착했다.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몇만 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과연 그들이 군사였는지도 의문이 간다. 그 이유는 '쌍령전투'의 치욕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쌍령전투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관군 동원령에 따라 경상도에서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올라왔다. 지휘관은 경상 좌병사 허완과 경상 우병사 민영이었다. 이들은 1637년 1월 3일,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청나라군과 마주쳤다.
청나라군은 불과 기병 300여 기였다. 조총부대를 포함한 4만 명의 군사와 300여 기의 청나라 기병과 맞붙은 것이다. 누가 봐도 승패는 뻔한 것 같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대패했다.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제대로 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강제로 끌려 나온 농민과 노비들로 구성돤 조선군은 조총이 있었지만 쏘서 맞추는 능력은 최하급이었다.
애초에 싸울 의지라는 것도 없었고 선두에서 되는 대로 조총 몇 발을 쏘다가 맞지도 않고 청군 기병대가 돌격 해오자 삽시간에 대오가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군은 경사진 곳에서 서로 도망치려 몰리는 바람에 태반이 깔려 죽거나 다치고 말았다.
4만 군사 중 절반이 넘는 숫자가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는데 <병자남한일기>에 보면 "도망가다 계속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압사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경상 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고 말았다.
남급이 쓴 <병자일기>에선 더 나아가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이고 목책을 겨우 넘은 병사들은 험준한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있던 경상 우병군 역시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경상 우병사 민영도 전사하고 말았다.
조선군의 패인은 전술.전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훈련되지 않은 군대에다가 부하들을 통제할 능력도 없었던 지휘관 때문이었다. 그들응 전투가 무엇인지도 개념도 없었다.
허완이나 민영은 그동안 특별한 능력이 없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이른바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는데 <연려실기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출병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이 지경이니 강원.황해도 등 또 다른 지역에서 몇 천 명 되는 의병들이 올라오기는 했으나 남쪽 조선군이 청군에 전멸하는 등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적이 지키고 있는 남한산성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강 건너 먼 곳에서 맴 돌면서 한두 번 접전하는 척하다가 도망쳐 버렸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총동원령을 받았으니 나중에 책임 추궁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냥 하는 수 없이 눈도장이나 찍으려고 올라온 군사들이었다.
또 통탄할 일은 이보다 45년 전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인 지역에서 판박이처럼 일본군에게 남도에서 올라온 5만 조선 지원군이 똑 같은 패전을 당한 적이 있었다.
흔히 '용인전투'라고 불리는 그 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592년 6월 5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전라도순찰사 이광, 충청도순찰사 윤석각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겨우 1,600여 명의 일본군에게 대패한 전투이다. 사료들은 서로 다르지만 대강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일본측은 물리적 측면 뿐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이미 조선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선의 방어 거점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선조까지 함경도로 도망한 뒤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연합군 5만 명이 올라왔다. 과연 그런 숫자인지는 확인힐 수 없지만 당시 5만 명이면 어머어마한 대군이다. 무기와 군량을 가지고 올라온 그 관군은 사실상 군대가 아니라 긴급 소집된 노비들과 농민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에 놀라 왜군은 도망을 친 뒤 1,600명의 정예병을 보내 기습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용인 수지구 풍덕천 일대에서 조선 선봉군을 무찌른 뒤 다음 날인 6월 6일에는 수원 광교산의 본진을 기병대로 급습, 조선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지휘관들이 앞서서 도망치고 몇 만 명의 군사들이 다투어 도망치다가 서로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선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고 기록하고 잇다. 결국 조선군 5만 명(일본측 기록은 10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궤멸되고 말았다. 질서를 유지한 권율만이 부대를 보존하여 약 한 달 후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훗날 '행주대첩'을 일궈냈다.
이 전투의 패인 중 가장 큰 것은 지휘관들의 무능이다. 작전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전도 모르는 지휘관들이 훈련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노비와 농민들을 끌고 머리수만 채워 전투에 나섰으니 애당초 성공하리하는 기대는 잘못 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궤멸을 당했을 망정 수만 명의 농민군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는 의병의 자취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국가를 위해 싸워봐야 아무 보람이 없다는 결론이 그들 가슴에 새겨진 것일까?
유생들의 궐기도, 승병도, 농민군도 거의 없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1만이 넘는 군사도 대부분 노비와 농민들이었다. 그만큼 인조 정권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이 이반된 상태였던 것이다.
호조판서 김국신이 대책을 내놨다. 성안 군사 1만 명 중 결사대 4천 명이 나가서 공격을 해보자고 건의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날마다 화전파와 항전파가 싸우면서 대책이 오락가락하니 장수들도 나가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동짓날이 되니 그 판국에도 명 황제를 향하여 망궐례를 올렸다.
한 가닥 믿었던 강화도에서도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조선군이 귀멸되어 버렸다. 검찰사이며 강화도 방어를 책임지고 떠났던 김경징은 도성을 출발할 때부터 철저히 자신의 가족만을 챙겼다. 그는 자신도 모친과 처를 옥교에 태우고 집안의 재물을 50개의 귀짝이 담아 나르기 위해 경기도 내의 마부를 끌어 모았다.
김경징은 말을 타고 가던 자기 집안의 여자 하인 한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자 노상에서 마부에게 매타작을 퍼부었다. 강화도로 들어가는 배에도 당연히 자신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자신과 친한 사람들을 만저 태우고 왕세자빈 조차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나루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그런 인물이 청군이 막상 갑곷을 건너 쳐들어 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강화섬이 함락되자 일부 부녀자들과 관리들이 자결하거나 순절하였다. 나머지 왕족을 비롯하여 대부분은 청군에게 이끌려 남한산성 청군 진영으로 끌려갔다.
김경징(金慶徵)
1589(선조 22)∼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선응(善應). 아버지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해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이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위시하여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하였는데, 그는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하여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한편,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배로 실어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의 계책을 세웠으나 군사가 부족하여 해변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방어책임을 맡은 그는 나룻배로 도망하여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는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려 하였으나 대간의 탄핵이 완강하여 결국 사사(賜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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