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0.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1)

구름위 2023. 4. 1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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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청군은 어떻게 바람처럼 서울에 당도했을까?

"이제 국운이 다했으니 올바르게 죽고 싶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부르짖은 한마디였다.

 

조선을 통틀어 외적과 대치하면서 왕이 내뱉은 말로서는 가장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었다. 결사항전도 아니고 화친도 아니고 우물쭈물하다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는 결국 조선에서 가장 비겁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636년 인조 14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9년 전에 발생했던 졍묘호란의 2차전이다. 조선은 그때 항복하고 형제지간의 맹약을 맺었지만 그걸 무시했다. 힘도 없느느주제에 약속도 지키지 않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경고하던 후금(청)이 결국 군대를 물고 쳐내려 왔다.

 

조정에 청나라 대군의 침범 사실을 처음 전한 사람은 국경에 나가 있던 대원수 김자점이다. 12월 13일 그는 적이 안주에 도달하였다는 장계를 보냈는데 이곳은 평안남도 북쪽 청천강 근방이며 서울까지 대강 천리쯤 된다.

 

조정이 아연 놀라 모뱡 대책, 강화도 피란 대책 등을 논의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날 개성유수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적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내용이다. 대체 청군이 하루 사이에 천리를 날아왔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다. 김자점이 보고를 늦게 올린 것이다. 청나라와 첯 번째 전투를 치른 지 겨우 10년도 안 된 참인데 그 지경이었다. 김자점은 나중에 그 죄를 물어 진도로 귀양을 갔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궁중잔혹사' 드라마를 보면 인조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실록에 준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듯하여 재미있게 보고 있다. 특히 인조역으로 나오는 배우 이덕화씨의 연기가 재미있다. 청군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인조는 김자점을 잡아들여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 후 진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는 그곳에서 절망하지 않고 견디어 내다가 다시 등용되어 조정에 돌아온다. 김자의 양녀로 인조의 후궁이 된 조귀인과 짜고 탐욕을 부리는 장면이 요즘 나오고 있다.

 

<병자록>이라는 문서에 김자점이 보고를 늦게 올린 그 까닭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그는 황해도 북쪽 사리원 근방에 있는 정방산성에 있었다. 성을 수축하는 일을 하면서도 이번 겨울에 반드시 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면 몹시 화를 냈다. 결코 그걸 이유가 없다는 쪽이었다.

 

의주에는 부윤 임경업이 지키고 있었는데 김자점은 그곳 용골산성에서 자신의 정방산성까지 봉수대를 설치했지만 정작 서울까지는 연결 해놓지 않았다. 서울에는 자신이 판단하여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절대로 청군은 오지 않는데 잘못해서 봉화가 전해지면 안된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봉화가 올라왔다. 적정이 수상하다는 신호였다. 겁먹은 놈들이 마구 봉화를 피운다고 화를 냈지만 두 번째 올라오자 그는 부하 한 명을 의주로 급히 사실 확인차 보냈다. 그때가 12월 9일이다. 현지를 다녀온 부하는 입록강변에 청나라 군대가 새까많게 모여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곧 쳐들어올 기세'라는 말에 그는 화가 나서 부하의 목을 쳐버릴 뻔했다. 그런 대군이 건너오려면 강에 얼음이 얼어야 하는데 그런 얼음이 얼려면 아직 멀었고 그 무리들은 훈련을 벌이는 것이라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청군은 그날 배를 타고 남하했다. 청군이 정방선성으로 몰려오자 놀란 김자점은 그때서야 비로소 서울로 긴급 장계를 올렸지만 이미 정방산성 일대를 포위하고 있던 청군에게 전달병이 체포되고 말았다.

 

청군은 잠시 머물다가 전투를 벌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적군 내침 보고를 전달해야 할 전령이 결국 적군의 뒤를 따라오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임경업이나 김자점이나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했는데, 적군이 싸우지 않고 지나가 버렸고 그래서 할일이 없고, 후속부대가 공격해올지 모르니 현지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적을 막는데 아무런 역활도 하지 못했다.

 

만약 이때 군사를 풀어 청군의 뒤를 추격했더라면 청군은 당연히 진격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주나 정방산성, 평양에서도 적군을 뒤쫓는 추격전을 벌이지 않았고 개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의주와 한양까지 조선군은 성안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군은 바람처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이 황급히 강화도로 피란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미 늦었다. 청군이 미리 알고 강화도 가는 길을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청군은 수도인 심양을 출발한 지 겨우 열흘 걸려 압록강변에 도달하고 다시 닷새 만에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당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 정세에 눈이 멀고 귀까지 닫혀 있었다. 정묘호란 이루 한 해 수십 차례 각종 사신들이 가고 사람들이 내왕하면서서도 중국과 후금의 정세 변화에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차라리 더 정확할 것이다.

 

광해군은 그나마 중국에서 신흥 청나라가 일어나고 명나라가 시들어가는 것을 알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면서 전쟁을 모면했지만 인조 시대에는 그런 분별력을 가진 대신이 없었다. 끝까지 망해가는 명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개념만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대신들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청나라는 한낱 무도한 오랑캐일 뿐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 또한 광해군이 모친인 인목대비를 연금하는 등 '폐모론'으로 폐륜군주를 제거한다는 것과 대명사대를 위한 복고반정이었다. 그러나 사실 인조반정은 대북파들에게 숙청당한 반대파들의 복수심에서 일어난 반정에 불과했다.

 

조선이 과연 청나라에 대적할 힘이 있는가, 지금 힘의 균형이 어느 쪽에 있는가 등의 정세도 파악도 못한 채 망해가는 명나라에 다시 원군을 요청한 것은 시대적인 코미디라고 할 만하다.

 

사실상 청은 그동안 많이 참았다. 조선은 9년 전 정묘호란 당시 약속했던 조공도 바치지 않았고 그러면서 명나라에게는 물래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여전히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청 황제 즉위일에 사절을 보내기는 했지만 사절들은 청 황제에게 절도 하지 않았다. 그걸 오히려 용감한 척 자랑하고 있었다.

 

봄과 가을에 사신을 보내 일정량의 조공을 바치기로 약정을 맺었으면서도 나중에는 이유도 없이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명나라에는 꼬박꼬박 보내면서 말이다.

 

최명길은 상소에서 그것을 비판했다.

"근래에 오랑캐는 본디 별다른 뜻이 없는데 우리나라가 먼저 스스로 도리를 잃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신의가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러고도 청은 계속 참고만 있겠는가?

다급해진 인조는 1만 3천의 장정을 끌어 모아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군사가 아니라 태반이 노비들이었다.

 

지금 남한산성을 보면 알지만 이곳도 함준한 요새라 부를 만하다. 청군은 12만이었지만 성의 남쪽과 북쪽, 서쪽은 접근이 어려운 곳이고 동쪽은 약간 용이하다. 결사 항전의 기백만 가진다면 한번 버텨볼 만한 장소였다.

 

청군은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불안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조선 관군와 의병이 보기하면 그야말로 그들도 포위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하여 군대의 절반은 평지인 남쪽의 탄천 근처에 배치했다.

 

인조의 남한산성 버티기는 소설기 김훈씨의 '남한산성'에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