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2.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구름위 2023. 4. 1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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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앉은 채로 당할 형세는 아니었는데......

이 바보같은 전쟁도 아닌 전쟁은 임진왜란이나 똑같이 사전에 충분한 경고가 있었다. 1년 전에 청나라에서 황제가 직접 조선을 치겠다고 통고를 해왔다.

 

심지어 명군 부총 백등용이 인조를 직접 만나 지금처럼 강경책만 고집하지 말고 청나라의 동태를 잘 실피라고 충고를 해줬다. 군 지휘관이었으니 청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을 터라 넌지시 조선의 갈 길을 귀뜸해 준 것이다. 왜 주제 파악도 못하고 큰 소리만 치고 있느냐는 그런 충고였을 것이다.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황손무도 그동안 명나라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쓴 소리를 내놨다.

 

"간첩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것. 또 조선은 지독한 문민통제에 빠져 군비를 소홀히 해왔으며 군과 농민의 구분이 없어서 전투력이 너무 조잡하다." 고 조언했다.

 

한마디로 조선은 청나라와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예고한 것이다. 명나라도 이미 청나라에 몰려 패망 직전인데 조선만 그걸 모른체해 왔던 셈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보고도 수차례 있었다. 접반사 이필영은 이미 한 달반 전에 적은 겨울에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동지경연 이성구는 중국에 다녀온 역관 한 사람의 보고를 인용, 적군이 이미 동원되어 있으니 긴급히 국경수비를 강화하라고 간청했다.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조정에서는 팔짱만 끼고 있으니 비통하다고 아뢰었지만 인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런 역관이 뭘 알겠느냐......" 하면서.

 

그다음 날도 국경에서 "적들은 지금 얼음이 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니 우리 군대도 비상령을 내리고 긴급히 탐색 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장계가 올아왔지만 역시 인조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무시해 버렸다.

 

그나마 한 가지 조치한 것은 화약 4천 근을 강화도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화약은 결국 한 방도 써보지 못했다. 청의 도르곤이 지휘하는 청군이 명나라 군에서 빼앗거나 귀순한 배를 동원하여 갑곳을 지나 강화도에 상륙하자 아군이 폭발시켜 자폭하는 정도로 써 버리고 말았다.

 

당시 군사력을 보면 앉은 채로 당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총의 위력을 절감한 선조는 은밀히 조총을 구입하기 시작, 상당 규모의 조총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종 총통도 보유하고 있는 등 지휘관이 군사들을 조련만 잘 했다면 대적할 만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초반부터 조총에 무너졌던 것이다. 조선군의 육상 전투 방식은 중국처럼 기마전법이었다. 말을 타고 돌격해 적진을 붕괴시키는 북방식 전법이었지만 이런 전법은 기본적으로 땅이 넓은 중국에서 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말이 그리 풍족하게 보유하지도 못했고 산지가 많고 평지는 좁은 곳에서 쓸 만한 방식이 못 되었다. 그래서 조선군은 그런 전법을 구사하다가 일방적으로 패전하였다.

 

기본적으로 청군은 기마부대 위주로 구성된 군대였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7,000여 기마대가 당했던 것처럼 일본군의 전술을 원용하지도 못했다. 일본군은 적 기마병이 돌격해 들어가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전방에서 대기마장애물을 설치하고 정확하게 조준하여 연속사격으로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의 전법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발전되어온 새로운 전법이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부대는 기마대의 돌격전을 특기로 하는 다케타 군을 전멸시켰다. 조총 전투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한 것이었다. 조총과 대기마 장애물의 효과적인 조합과 연속사격이라는 전술로 적을 괴멸 시킨 것이었다.

 

그러면에서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는데, 일본 수군이 갖지 못한 각종 총통 등 화포로 적의 조총 사거리 밖에서 원거리 포격으로 적진을 강타한 다음 접근전으로 적을 격멸시키는 전법, 그리고 지형과 수로, 물때를 이용한 매복, 기습전을 전개하여 23전 23승을 일군 것이다.

 

그래서 만약 당시에도 유능한 장수가 평소 강인한 군사훈련을 통해 이러한 전술을 연마하였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는 점이다. 만약 육상에서 청군과 접전이 붙을 경우 먼저 각종 화포로 원거리 사격을 실시하여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측 후방 및 전방에 다중의 대기마 장애물을 설치하고 좌우에는 기마부대로 편성하여 측.후방 기습을 막으면서 적의 측.후방을 강타하는 전술과 전방에는 대기마장애물을 설치하고 조총부대를 수개열로 편성하여 연속사격을 가했다면 아무리 강한 청군 기마대라는 팔기군도 여지없이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조총으로 무장했다는 것은 명나라도 알고 잇었다. 1614년 명나라는 후금군과 전투에서 조선의 조총부대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 인조에 반기를 든 이괄의 난 당시에도 이괄은 당시 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조총부대인 항왜(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왜군)군 1백여 명을 선봉에 세웠다. 조선은 1607년 일본 사행 당시부터 상당한 조총을 구입해 주로 북쪽 주둔군에게 보냈다.

 

인조 시대가 되면서 조선의 군대는 사분오열 상태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공로 때문에 반정공신이 된 자들이 군대를 제각기 장악해 사병화했다. 이귀는 여영청, 김류는 훈련도감, 그리고 개성부나 좌우포도청 등은 또 다른 공신이, 그리고 자택에도 친위사병을 수백 명씩 거느린 공신들이 여러 명이었다. 그 목적은 한 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또 다른 역 쿠테타가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친위병들은 각기 호화군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민폐를 일삼았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그런 군사 몇 십 명만 보내달라고 요청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청군이 쳐내려오기 몇 달 전까지는 최명길도 결코 화친파가 아니었고 결전파였다. 그는 전쟁을 치르려면 이대로는 안 되니 평안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청나라가 한 번은 쳐내려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달 전에도 윤황은 강화도에 배치한 병력을 모두 평안도로 보내고 강화도에 지어놓은 행궁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보여 달라고 인조에게 청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리지 않았다.

 

정온은 윤황보다 더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인조에게 결전을 벌이자고 촉구했다. 그는 도원수를 의주로 보내 압록강을 방어하고, 의주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는 용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실시하여 결사대를 뽑고, 인조도 개성에 위치하여 군대를 진두지휘하라고 촉구했다.

 

정온은 결전을 위해 구체적인 작전 게획까지 제시했다. 그는 조선군의 사수와 화포병을 천하무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을 활용하면 청군 기병의 돌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먼저 진을 칠 장소를 정합니다. 포수 4천 명을 4대로 나누어 2천 명은 앞에 진을 치고 2천 명은 지형을 살펴 좌우에 진을 칩니다. 포수 뒤에는 사수를 , 그 뒤에는 살수는, 그 뒤에는 편곤군과 기사병을 각각 배치합니다.

 

적이 학익진 형태로 공격해오면 아군의 전위대 1천 명이 먼저 조총을 쏘고, 쏜 뒤에는 안장서 화약을 장전하고 후대 1천 명이 다시 쏩니다. 적이 만약 장사진으로 공격해 오면, 좌군이 전대가 했던 것처럼 먼저 쏘고, 적이 40~50보 안에 들어오면 사수들이 포수가 쏘던 방식대로 화살을 발사합니다. 그러면 포성이 그치지 않고 화살은 비옷듯 쏟아질 것이니 비록 저들의 견갑철마라 할지라돟 어찌 궤명되지 않겠습니까?"

 

이 계책은 병자호란 당시 제기된 결전론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다. 조총병이 4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것도 결국 조정 대신들이 들어먹지 않는 바람에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침범이 임박하여 내침 20일 전에도 조정 대신들은 모여 앉아 하잘 것 없는 청 오랑캐 무리가 이제는 오만하게 황제국가를 참칭한다면서 이런 오랑캐들과는 단호히 상관을 끓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얼마 뒤면 왕이 청 황제에게 무릎을 끊고 국궁 3배를 올린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오랑캐 타령만 주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왕과 조정 대신들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백성 50~60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 갔다. 물론 소현, 봉림대군과 비빈들, 그리고 3학사를 포함한 사람들이 볼모로 끌려간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 노예로 팔려가거나 여성들은 청나라 관리들 성노리개로 전락하여 노예처럼 지내다가 소현 세자빈의 노력으로 돈을 지불하고 몸을 버린채 겨우 풀려나 돌아오니 조선에서는 난리가 났다. 모두가 더렵혀진 버림받은 몸이라 하여 집에서 쫓겨나거나 이혼 당하였다. 그래서 목메 자살하거나 이혼당하고 거지가 되어 이름모를 산하를 헤매다가 병들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왕과 권력자들을 잘 못 만나 불쌍한 백성들만 그런 고초를 겪은 것이다. 국가 지도층들이 목숨이 아까워 죽기 살기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싸울 의지도 자신도 없었던 그런 왕과 조정이 이 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도층이 국난에 앞장서고 나선다면 백성들이 누가 나서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