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33.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구름위 2023. 4. 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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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경신 대기근 때 최소 수십만이 굶어 죽어

 

불쌍하고 불쌍한 조선 백성들이여.

도대체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나라가 또 있었을까?

 

세계적인 통계를 알 수 없으니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라는 땅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몰론 사막이나 산악 등지로 된 나라  등 이러한 다른 열악한 나라에 비해서는 그래도 사계절이 있어 그에 비하면 살기는 좋은 편이지만.

 

그런데 당시 참상을 상상하노라면 몰골이 송연해진다. 이 땅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삼천리 죽음강산이었다. 그런 땅에서 모진 목숨을 연명했던 가엾은 백성들.

 

조선은 걸핏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게 널린 땅이었다. 한 해는 굶어 죽고 한 해는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이 산야에 널렸다.

 

조선 최대의 기근은 1670년 현종 11년과 그 다음 해에 걸쳐 일어난 경신 대기근이다.

 

이 사건은 연구자도 별로 없고 기록도 신통치 않다. 죽은 사람이 십만이라는 설에서 백만이라는 설까지 차이가 많다. 대강 정황을 살펴봐도 최소한 수십만 명은 이때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굶주림, 그리고 그와 함께 찿아온 전염병이 온 나라를 파도처럼 덮쳤다. 이 시기가 지난 후 피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적인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7,8백 만은 되어야 정상인 시기인데 조선 인구는 고작 470만 명으로 나타났다. 백만 사망설의 근거이기도 하다.

 

1670년 현종 11년. 새해 첯날부터 불길한 기운이 보였다.

 

서울 하늘에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가 관측됐다. 사흘 뒤엔 달무리가. 이후 한 달간은 햇무리와 달무리가 관측됐고 저녁에 보이던 금성이 대낮에 보였다. 현종은 큰일이 닥칠 것이라 했고 신하들은 위망과 쇠란의 징조라고 했다.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부르는 연구도 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성우가 나타났고 운석이 떨어졌으며 태양은 빛을 잃고서 낮에도 하늘은 어둠침침했다. 봄이 되었지만 우박과 눈비 서리가 내렸다. 천둥.번개가 쳐서 맞아 죽은 이들과 가축이 속출했고 고목과 건물이 부서지고 불탔다.

1671년 현종 12년 1월. 전라감사 오시수가 치계했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위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 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열고 죽은 자의 염의를 훔치기도 합니다. 떠돌며 빌어먹은 무리들은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김영에서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숫자가 무려 190명이나 되고 갓난 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수감된 죄인은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았는데 한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가 없고, 돌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현종실록 12년 1월 11일)

 

두 달 뒤 3월에 올라온 충청감사 이홍연의 치계다.

 

"연산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가 깊은 꼴짜기 속에 살면서 그의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으로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는 중에 삶아 먹었으나 일부러 죽인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칙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귀신같은 꼴이 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현종실록 12년 3월 21일)

왕은 이런 참상 앞에 하교하였다.

 

"국가가 있은 이래로 기근과 흉년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겠는가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이 잇었는가. 내가 덕이 박하고 재주가 둔한 자질로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좋아하지 않아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수재.한재.풍제 등 천지의 변괴로 길거리에 죽어 넘어져 쌓인 시체가 서로 겹치고 성시와 촌락이 거의 비어 버렸다. 백성의 부모 된 자로서 이 참혹한 재앙을 당하니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으나, 단지 스스로 슬퍼 울먹이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사경에 놓인 만백성의 생명을 이 몸으로 대신하여 주길 바랄뿐이다.(중략)

 

진휼 정사가 한창 급한데도 비축 곡식이 매우 적으니, 장차 어떻게 구제하여 실려낸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한 심정이다.

 

봄을 만나 만물이 모두 살아나는데, 오직 우리 백성들만 유독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망극한 재난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애통한 마음이 급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널리 직언을 구해 방도를 찿도록 하라."

 

현종은 불운한 왕이었다. 그의 시대에만 3, 9, 10, 11, 12, 13년 계속하여 적게는 몇천 명 많게는 몇만 명 이상이 죽어 나갔다.

 

현종의 이 시기는 죽은 왕(효종)을 위해 상복을 1년간 입을지 3년간 입을지를 문제 삼은 예송논쟁으로 재위 15년 내내 조정이 소란스러웠던 때였다. 백성들은 재난으로 굶어죽고 있는데 지도층인 조정과 사대부들은 백성들 구제는 제쳐둔체 예송논쟁으로 아까운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유교는 형식과 예법을 찿다가 500년 세월을 다 보냈고 그들의 눈에는 재난으로 굶어죽은 백성들이 보일리가 없었던 것이다. 죽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 차남이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선은 중국에 대한 신하국으로 왕을 자신들과 같은 신하로 생각하고 왕을 은근히 능멸하며 경연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대로 길들이기에 안간힘을 쏟던 양반과 사대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