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이런 아사자 못지 않게,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 전염병은 조선을 더욱 시체 왕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다. 20세기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1909년 순종 2년 대역이 발생했다는 정도로 실록은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그해 심각한 전염병은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죽은 숫자만 서울에서 1만 2천, 전국적으로는 10만 명이 넘는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어림잡아 8,9백만으로 추정하는 데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전염병이란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유행한다. 가난하여 위생관념이 없으니 전염병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부족하여 씻는 법이 없고 인분을 뿌려 기른 야채를 날로 먹었으며 거리며 집안이고 온통 불결하기 짝이 없으니 전염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오리려 이상할 정도였다. 위생관념이라는 용어는 일제 때나 생긴말이다.
1909년 순종 2년 9월 포고령을 내려 그때 처음으로 경성, 용산 등의 강물 사용과 불량 음식의 판매를 금지했다. 경시청에서 포고를 내린 것이다.
그러면 전염병에 대해 조선의 조정이 내린 대처방안은 무엇이었는가?
당시 가장 좋은 방법은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마을에서 도망쳐서 산속이나 섬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사람들이 또 먹을 것이 없어서 죽었다.
태종은 전염병의 기운을 막는다고 군기감을 동원하여 화포를 쐈고 세종 때에는 모든 군사동원이 중지되었다. 병이 나면 사대부들 집안부터 무당만 찿아가니 오히려 이런 내왕을 통하여 병이 더 퍼진다. 그러니 무당들을 성 밖에 따로 모아 살게 하고 내왕을 금하라. 이것이 세종의 명령이다.
단종 때는 단군 사당을 평양으로 옮긴 뒤 괴이한 검은 뭉치의 기운이 일더니 이때부터 병이 창궐했다 하여 다른 제단을 설치하고 감사가 지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성종 14년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이 많이 죽어 황해, 평안도에 사람이 별로 없으니 만약 금년에 풍년이 들면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성종은 전염병이 돌아 위험하니 종묘제사도 직접 참석할 수 없다면서 예조에서 대신 올리라고 했다가 논란이 벌어지자 이에 제사를 중지시켰다.
근세의 고종도 병이 돌면 별려제라는 것을 올렸다. 20세기였는데도 전염병을 제사로 막으려 한 것이다. 왕자가 천연두에 걸리자 무려 4만 달러를 들여 궁중에서 굿을 올렸다.
그러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인가? 인조 21년에는 전라도에서 1만 명이 죽었다. 효종 때는 아예 숫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숙종 때는 어물어물했지만 24년에는 서울에서 1, 582명, 전국에서 2만 1,546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숙종 25년에는 25만 명이 죽었고, 영조 때는 5, 6십만 명이 죽었다는 등의 자료까지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정조 23년에는 백성들뿐 아니라 고위 대신들도 죽었다. 좌의정 김종수, 영의정 체제공, 판서 서호수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정조는 아끼던 신하 체제공이 죽어 양평 마제로 시신이 운구될 때 한 사람도 조문객이 없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노했다. 정조는 "그러면서도 너희들이 선비란 말인가?"라며 지목하여 심환지를 상가에 보냈다. 정조는 이때부터 7개월 뒤에 죽었다. 종기로 죽었다는 간략한 설명이지만 그 역시 전염병으로 죽었을 확율이 크다.
1859년 철종 10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40만 명이 죽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재와 화재도 해마다 일어났다. 조선의 집들은 모두 목제와 짚으로 만들어져 있어 불이나면 사실 불쏘시개나 다름없다.
태조 2년, 강릉에서 큰 불로 관아와 민가가 다 타버렸고 군기감과 성균관을 위시하여 화재 기록은 헤아일 수가 없다. 철종 3년에 함경도 민가 600여 호 소실, 사망자 다수, 7년에는 여주읍 전소, 순조 4년에는 영해읍 네 고을 전소, 함경도 감영과 민가 2천 3백호 소실, 고종 31년의 남대문 대화재, 특이한 화재로 영조 33년 부산 왜관 300여 호 전소, 영조 8년의 장릉 화재(이는 도벌에 대한 처벌을 받고 암심응 품고 저지른 방화였다)다.
민가뿐 아니라 대궐 안에도 수시로 불이 났다. 영조 20년 승정원 화재로 승정원일기가 전부 타버린 것을 비롯해 순조 2년의 대궐 대청 40칸, 창고 10칸 소실 등 줄줄이 일어났다.
태종 8년에는 왕이 수재를 근심하여 눈물을 흘렸다.
경기도와 황해도 동북부 큰 물난리 때문이다. 이때 가옥을 잃고 익사한 사람에게는 쌀과 콩 각 3섬씩, 가옥을 절반쯤 잃고 익사한 사람에게는 쌀 3석, 콩 2석, 가옥을 잃은 사람에게는 쌀 2석씩 주기로 결정했으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쉴 사이 없이 찿아오는 화재와 수재, 기근과 전염병, 이런 것이 사실상 당시의 수준으로는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이기는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예방이나 사후관리를 위한 조정 대신들의 치열한 논의나 대책 마련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그냥 지방 수령에게 맡겨 버리고 가끔씩 암행어사나 파견하는 정도로 끝났다. 정치적인 사건이나 사대부들에 관련된 사건은 장황한 기록과 간쟁이 이어지지만 백성들의 삶에 직결된 사건은 기록조차도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세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인구는 왕조별로 구구 각각이다. 인구 학자들도 크게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시대의 인구 통계라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그 통계에 의하면 임란 후 전국 인구가 150만이라고 기록된 때도 있었으나 그 나머지는 유랑민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굶주림과 전염병, 각종 재해로 살 길이 막막한 백성들이 살 길을 찿아 산천을 떠돌던 시대, 그 눈에 맺힌 백성들의 피눈물에서 그런 가사가 나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 병나네.' 라는 가사는 유랑민들이 굶주림으로 떠돌다가 병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그대로 둔 채 떠나버리고 나면 버림받고 남은 이들의 입에서 나온 한탄은 아니었을까?
1671년 현종 12년, 전라감사 오시수의 치계로 마무리 하자.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들이 버리는 갓난아이를 이루 손꼽아 셀 수 없으며 심지어 옷자락을 당기며 따라가는 예니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끓어져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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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를 제외한 농촌 지역은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이었다.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도 않았고 초가지붕이 대부분으로 가을이면 짚으로 이영을 엮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돌아가며 지붕을 새로 덮었다. 마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었고 빨래는 개울가에 나가서 빨래를 했다.
어린 아이들이 일년 내내 목욕하기도 힘들었고 코를 줄줄 흘리며 손이 트고 종기와 부스럼이 온 몸에 나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유일한 처방이 고약을 바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처방이 없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밥을 지었고 겨울이면 군불을 떼다보니 온 산이 민둥산이 다 되었다. 봄이면 먹을 것이 없어 부자집에 양식을 빌리고 가을이면 이자를 쳐서 되갚았다. 농토가 없이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거지들이 매일 끼니때마다 동냥하러 집집마다 찿아왔다. 그들은 다리밑이나 움막을 짓고 살았다.
매끼니 식사는 보리밥이 대부분이며 된장국과 김치가 주종을 이루었고 배가 고파 밭에 나가면 감자, 무우, 오이, 도마토, 홍당무 등을 생으로 먹었다. 덜익은 감이 떨어지면 주워다가 보리나 쌀 독에 넣어두면 며칠이 지나 삭혀서 먹었고 빵이나 과자는 엄두도 못냈다. 당시는 현금이 없으니 현물 거래로 외상을 쌀이나 보리쌀로 갚았다. 아이스케키 장사나 엿장수가 지나가면 놋그릇, 고철, 신발 등을 내다가 바꾸어 먹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이부제 수업을 했고 당시 미국의 원조물자로 들어온 우유가루나 옥수수가루로 떡을 쪄서 학교에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저녁이면 가까운 교회나 성당에서 오라고 하여 가면 개몽영화를 상영해주고 우유나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해 주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가정에서는 호롱불이나 촟불이 유일한 불을 밝히는 수단이었고 전화나 텔레비젼은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저녁이면 마을 어떤 집에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에 나오는 연속극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한여름 밤에는 냇로 나가서 목욕을 하고 모포를 펴고 친구들과 모여 잠을 잤고 수박, 참외 서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농촌에는 병원이 없고 약국도 없어서 병이나면 민간 처방으로 견디거나 아니면 죽음이 뒤따랐다. 일자리도 없고 농토도 없으니 굶고 지내는 가정이 대부분이었고 떠돌이 가정도 많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군대가는 것이 유일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장터에 달걀, 강아지, 나무, 씨암닭, 산나물, 콩나물, 두부, 약초, 채소 등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식량을 구입하여 오기도 했다. 그것으로 가족들이 죽을 끓이거나 쌀밥을 하여 멀건 고기국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고 얼마 후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고속도로 현장에 나가 노동을 하게 되고 일당을 받아 돌아왔다. 현금이 돌자 마을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어떤 젊은이는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편지로 전해오는 매일 월남 뉴스가 마을의 화재거리였다. 그 형이 돌아오자 거액을 가져왔는데 봉급을 모아온 것이며 물품도 몇 박스 가져왓다. 그래서 그 집은 그 돈으로 농지를 사고 어엿한 지주가 되었다. 집도 스레트 지붕으로 고치고 평수도 넓히고 현대식으로 집 구조를 바꿨다.
그래서 농촌에 안주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용기 있는 현실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하나 둘 마을 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업했다. 수년을 모은 돈으로 명절날 고향으로 금의환향 하였고 마을이 난리가 났다. 옷이며 신발, 화장품, 가방, 선물을 풀어놓고 친구들에게 밤이 새도록 도시 이야기로 꽃으 피웠다. 그들의 탈농촌 신화 이야기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갈등하게 되엇고 부모들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탈농촌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명절이 지나면 마을 청년과 처녀들이 그 젊은이를 따라 여럿이 몰래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도시로 따라가서 공장에 취업하였고 몇 년 후 그들도 고향으로 금의환향했다. 그래서 농촌의 초가집을 고치고 농지를 구입하고 삶의 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후 우리나라는 농촌에 젊은이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더낳은 삶을 찿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집중하게 되었고 명절이면 고향을 찿아가는 타인지향적인 삶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이 우리 사회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명절 귀향 전쟁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시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부억 아궁이가 개량되었다. 전기가 들어오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공사비를 거두었다. 정부 재정이 부족하여 사용자인 국민들에게 돈을 거둔 것이니 오늘날 한전의 전신주와 고압선로는 정부나 한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촌에 전기가 들어오자 환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사라지고 환한 밤은 사람들의 활동을 밤까지 연장하기 시작했다. 부자집에는 텔레비젼이 들어오고 냉장고가 들어오는 등 각종 가전제품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당시 전방부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실이나 내무반에는 호롱불이 대부분이었고 병사들의 식사는 보리밥에 된장국, 깍두기가 유일한 식사였다. 전방 철책선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동부전선이 1978~1979년 사이었다. 철책선에 그때 처음 투광등이 불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삶의 모습이 불과 30~40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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