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정보 부재라는 말이 그토록 잘 들어맞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왜란 발발 전 대처방안이라는 것이 겨우 통신사를 1회 파견하여 일본 막부와 30분 정도 공식 대면만 하고 왔으니 그런 대면에서 어떻게 전쟁위기 따위를 파악할 수 있으랴. 일본 막부의 관상만 보고 돌아왔서 보고를 올렸으니 어떤 원시국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왜관도 있어서 일본인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와서 살았으며 그들은 모두 정보원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조정이나 관헌들의 동태도 수시로 파악하여 본국에 전하고 있었다.
우리 측에서는 일본 파견 관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마도라 다름없는 야만 소국으로 멸시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 두 명만 정보원이 있었더리면 일본이 내분을 끝내고 한 사람에 의해 천하통일이 되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대대적으로 자체생산된다는 것쯤은 넉넉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총은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성능 시험을 위해 발사를 해봐야 하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함선 주조도 바닷가에서 해야 하고 20만 군사를 집결시켜 훈련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절대로 비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더구나 전쟁이 나기 2년반 전에 대마도 도주 평의지는 새로 만든 조총 여러 자루를 몰래 우리나라에 선물로 바쳤다. 조정은 그것을 분해해보고 응용할 것을 연구한 대신 군기시에서 엄중히 보관하라고만 명령했다.
6.25 때도 북한군이 몇 달 전부터 전방에서 병력을 이동 배치시키고 민간인을 소개시켰으며 탱크가 들어오고 화포 증강, 밤낮으로 트럭이 군용품을 실어 날랐지만 우리 군 지휘부는 정보부서에서 보고되는 정보를 무시하고 무사태평이었다. 전형적인 임진왜란의 재판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조선은 중앙에 국가 위기 대처반인 비변사 회의가 있었고 국방을 담당하던 병조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전쟁을 걱정해본 사람이 없었다. 모두 입으로 형식적인 걱정만 하다가 말았다.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지금은 낭설로 밝혀졌다.
더구나 임진왜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1년 전부터 일본 사신이 와서 명을 칠 터이니 길을 열어 달라고 통보를 해왔다. 아마 일본은 조선이 명나라에 무수한 핍박을 받고 있으므로 함께 명을 치자면 조선이 응락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제안은 전쟁 6개월 전에도 또 전해졌지만 여전히 우리 조정은 야만족의 허풍으로만 받아들였다.
겨우 몇 달전에야 좀 위험하다는 생각에 남쪽의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등 방비를 시작했으나 이것도 요식행위였다. 전쟁에 대비하려 들었다면 경상도 전라도 수군을 부산 앞바다에 집결시켜 연합 방어 훈련도 실시하고 해안 감시체제 구축 및 원거리 초계 활동을 전개하거나 정보원을 대마도에 침투시켜 적의 동향을 면밀히 정찰하는 등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 앞바다에 적선이 새카맣게 몰려들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경상좌.우도 수군 박홍 등 수사들도 전혀 적정은 물론 훈련도 등 전투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고 적선이 부산 앞바다에 몰려들자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양곡과 무기를 불태우고 장수와 군졸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부산포 첨사 정발, 동래성 부사 송상현도 비록 순절하였지만 적이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할 때 일시에 몰아치는 전반적인 헙동작전 개념은 전무하였고 지역책임제로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작전개념으로 대비를 소홀히 하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부산포와 동래성이 수천 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왜군을 상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병력을 집결시켜 결전을 시도하자는 전략도 없었다. 적이 오는 길목은 부산포-동래-대구-상주-문경-충주-한양으로 뻔한데 가장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지역방어개념에 따라주변에서 모인 장수와 군사들도 핑계를 대고 대부분 성을 빠져 나가 도망쳤다. 대구감영에서는 군사들이 모였다가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오지 않아 며칠을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핵심이 되어야 할 병조판서는 몇 달이 멀다하고 교체되어 전쟁 전 4년간 7명이 들락거렸다.
봉수대도 막통이엇다. 봉수대가 원활하게 작동되었더라면 반나절 만에 조정에서 알 수 잇엇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나무가 무성하므로 시계 확보를 위해 항상 가지를 잘라줘야 하는데 그런 인력이 없었다.
성종 때의 기록을 보면 봉수대에는 통상 다섯 명이 근무하는데 낮에는 지키지도 못하여 말 한 필 없이 정상까지 짐을 옮기는 등 고단한 처지여서 지원자도 없고 도망자도 많았다고 나와 있다.
이런 봉수대마저도 주로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연산군 당시 각 봉수대 군사들에게 덧옷을 지급했는데 평안도에 350벌, 영안도에 500벌, 남도에는 겨우 62벌이었다. 남쪽에는 그만큼 봉수대가 적었다는 것이니 결국 남쪽을 얼마나 등한시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이 나자 신립 장군은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니 작전을 달리 세우라고 주변에서 귀띔을 해주었지만, "조총이란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라며 비웃었다. 신립은 조선식 조총만을 생각한 것인데, 조선식 조총은 가만히 들고 서서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이고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립은 일국의 사령관이었으나 성격이 급하여 부하들 목을 치는 것이 다반사였고 기술발전에 그만큼 무지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왜군이 대기마 장애물을 설치하고 줄줄이 도열하여 복선으로 연속사격하는 조총부대에 탄금대 진흙탕 벌판에서 정면 돌격을 감행하다가 7,000 조선 기마대 군사들과 허무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무지한 장수 밑에서 애꿋은 목숨만 잃은 조선군들이 불쌍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국방부 장관과 총참모장은 '그깟 북한군들, 내려 오면 궤멸시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지만 한국군은 초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찌 그리 닮을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 봉기하여 전국에서 연신 승전보를 올렸다. 그러면 관군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있었으나 장부상 뿐, 숫자도 적었고 싸우면 싸우는 대로 연전연패했다. 각 지역 수령들은 모두 도망가 버려 심지어 의주까지 도망갔던 선조도 경호군이 다 도망가고 제대로 없어서 함경도에서 간신히 경호대원 400명을 뽑았다.
그뿐 관군의 활약상은 거의 없다. 관군이 그 모양이 되자 죽기로 싸우려고 일어선 사람들은 죄다 의병들이었다. 의병들과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일본과 합병되었을 것이다.
만약 선조가 도망가지 않고 서울에서 내가 죽으리라 하며 앞장을 섰다면 당시 상황을 보더리도 10만 왜군으로서는 절대로 서울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햇을 것이다. 서울 성곽은 튼튼했고 12만 인구가 살고 있었다. 행주산성 싸움처럼 결사적으로 항전을 했더라면 성을 빼앗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싸울 각오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왕과 권신들은 백성들보다도 더 먼저 도망하기 급급했다. 비가 내리는 날 저녁 황급히 북으로 도망가는 어가를 향해 백성들은 욕을 하며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설사 불행한 처지에 이른다 해도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나라 땅 안에서 다 함께 죽어야 한다." -이 충무공-
참고로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를 간략히 살펴본다.
부산진성 전투
“적선이 바다를 덮고 몰려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인들로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으로 기어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싸우는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길을 나눠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 부(府)를 함락했는데 경상병사 이각은 병력을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태평한 세월이 200년 동안 이어져 백성들은 전쟁을 몰랐고 군현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1592년(선조 25) 4월의 <선조실록> 내용이다. 임진왜란 초전의 양상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일본 쪽 기록을 보면 부산까지 침략군을 수송했던 병선은 700여척에 이르는 대선단이었다. 그럼에도 부산첨사 정발은 처음에는 침략군을 조공 선단으로 오인했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임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기는 어려웠고, 부산진을 비롯하여 서울로 이르는 길목의 주요 고을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전쟁은 이렇게 일본군의 승승장구로 시작되었다.
2만명 대 1000명…부산진성의 함락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1번대 18,700명은 병선 700여척에 분승하여 쓰시마를 출발하여 그날 오후 부산포 절영 앞바다 에 도착했다.
당시 포구 주변에 조선군 배는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첨병으로 하여금 포구 일대를 수색토록 하고 일부 병력은 부산진성 주변으로 정찰을 올려 보냈다. 조선군의 매복을 염려하여 고니시 장군은 어둠이 짙어지자 숨을 죽인체 부산포구를 유심하 살폈다. 불빛도 없고 인적도 없다. 아니? 조선군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밤새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거듭한 고시니는 뜬 눈으로 날을 새고 새벽 6시를 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안전한 곳으로 판단된 우암동 방면으로 상륙부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상륙 후 전열을 갖춘 부대는 부산진성을 향하여 첨병을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하는 고요하였다. 병사들은 지나가는 길 도로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였으나 민간인들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민간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선 수군은? 고니시 장군은 전진하면서도 너무나 조용한 부산진 일대의 모습에 의아해 하면서도 조선군의 매복 작전을 두려워 하며 주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반면 부산진의 조선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6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정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분전했지만 성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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