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1) 양재역(良才驛)·도(道)
『고려사』 병지 참역조를 보면, 과주(果州) 소관의 역참은 오직 양재역(良才驛을 良梓 또는 良材로 표기) 뿐이다. 역도(驛道)는 주도(州道)에 속해 있었고 중심역은 덕풍(德豊, 현 河南市 덕풍동)이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역로와 역도 정비에서 좌도충청도정역찰방 소관의 역과 동화도(同化道)가 재편성되어 양재도(良才道)가 되면서, 과천현 소관으로서의 양재역은 그대로 양재도 12역의 으뜸역이 되었다.
양재도의 역과 역도로서의 비중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하삼도(下三道)로 뻗는 3대로(左路·中路·右路) 가운데 첫 역도이기도 하며, 우로(右路)의 첫 역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가령, 과천을 통과하는 우로의 노정을 소개해 보면, 한양(漢陽)-동재기나루(銅雀津)-승방뜰(僧房坪)-남태령(南泰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店)-사그내(肆覲坪또는 沙斤川)-지지대고개(遲遲臺)-수원(水原)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양재도의 관할범위는 한양-양재-용인-양지(陽智)-죽산-충주 방면으로의 역로와 한양-과천-수원-진위 등에 이어지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낙생(樂生: 廣州), 구흥(駒興: 龍仁)·금령(金嶺: 龍仁)·좌찬(佐贊: 竹山)·분행(分行: 竹山)·무극(無極: 陰竹)·강복(康福: 安城)·가천(加川: 陽城)·청호(菁好: 水原)·장족(長足: 水原)·동화(同化: 水原)·해문(海門: 南陽) 등 12개 역이다.
이와 같이 양재도는 과천현 소속이었으나 이후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는 바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진왜란을 경과하는 동안 광주부로 이속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하여 1757년 경에 작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양재역에는 말 27필, 노비 27명이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양재도라는 역도는 수원의 영화도(迎華道)로 그 명칭을 바꾸게 되고, 그 으뜸역도 양재에서 영화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 연대도 대체로 수원의 읍치(邑治)를 옮기게 되는 정조 13년(1789) 이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역 관할로 바뀌면서 새로이 과천역과 영화역이 설치되고, 청호·장족·동화의 3개역은 폐지되어 영화도는 11개 역을 관할하게 된다.
한편, 역로의 등급을 살펴보면, 양재도 가운데 양재·낙생·구흥역은 대로(漢陽-稷山까지가 대로이므로)에 속한다. 더욱이 양재는 우로의 최종 통과지로서 한강 남안(漢江南岸)의 동재기나루라든가 노량진에 이르게 되는 역이기도 하다. 그 외에 금령·좌찬·분행·무극·가천·청호역은 중로에 속하였으며, 강복·해문·장족·동화역은 소로에 속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 과천현 소관에는 행려자의 편의시설인 원(院)으로는 노량원(露梁院)·인덕원(仁德院)·미륵원(彌勒院)·오금원(吾金院)·요광원(要光院)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도 임진왜란과 호란을 경과하는 동안 소멸해 버리고 점막(店幕)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과천현 관문리에 있었던 내점과 새술막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점막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志)』(1699) 역원조(驛院條)
2) 양재역(良才驛)의 변천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던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양과 하삼도(下三道)를 연결하는 역으로 주목받게 된다. 한양의 돈화문으로부터 남쪽으로 25리 130보를 떨어져 위치하여 1식(息: 30리)이 안될 정도로 가까워 역으로부터 4리 230보를 더 내려가 장성곶천(長城串川)에 이르러 1식을 삼았던 곳으로(『태종실록』 권 30, 15년 12월 정축조), 한양과 가장 가까운 역 중의 하나였기에 조선초부터 이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삼도를 왕래하는 여행자가 많다 보니 그에 따라 역에 종사하는 역리나 역졸, 역노들의 노역(勞役)이 고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역리(驛吏)와 전운노(轉運奴)들이 그 역(役)을 감담하지 못하여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세종 30년에는 찰방(察訪)을 다시 복구하게 된다. 이것은 양재역이 중요한 교통로상의 역으로 폐지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당시 경기도의 좌도충청도정역(左道忠淸道程驛)에 속한 역은 양재를 비롯해 광주 관내의 낙생(낙생(樂生), 용인 관내의 구흥(駒興)·금령(金寧), 죽산관내의 좌찬(佐贊)과 분행(分行), 음죽 관내의 무극(無極) 등의 7개역이었고, 여기에는 모두 종6품관인 찰방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경기도내의 8개역도 중 우도정역(右道程驛)과 경기강원도정역(京畿江原道程驛) 그리고 좌도충청도정역을 제외한 5개 역도(中林道·同化道·平丘道·慶安道·桃源道)를 비롯한 전국 지방 각도의 역에는 각 역에 종9품관인 역승이 설치되어 그 중요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재역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세조 2년에 과천과 금천(衿川)이 작은 고을이라고 하여 두 현을 합해 금과현(衿果縣)을 두기로 결정하는데, 이 때 읍치(邑治)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오른 일이 있었다. 금천에 두자는 입장은 고을의 읍치가 그 영역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과천에 두자는 것은 양재역에는 빈번하게 왜국(倭國)의 사행(使行)이 통행하는데 읍치가 멀면 접대하는데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금천에 두자는 주장이 우세하여 읍치를 금천에 두게 된다. 그러나 양재역을 지나가는 대소 사행에 대한 접대의 불편함에 따라 읍치 이전의 주장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세조 6년에는 과천이 다시 현으로 복구되기에 이른다(『세조실록』 권20, 6년 5월 무인조). 이는 한 고을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로 양재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들의 시설이나 역마 등이 피폐해지게 되면 중앙 정부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같은 세조 6년의 기록에 의하면 양재로부터 단월(丹月:충청도 괴산의 연월도 관내)역 사이의 역들이 조잔(凋殘)해 졌으므로 매 역마다 부호(富戶) 20호씩을 정해 주어 이들로 하여금 해당 역의 역마를 돌보게 하고 역(驛)을 꾸려 나가는 비용을 돕게하라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세조실록』건19, 6년 정월 신축조).이것은 양재 등 역의 조선조에 있어서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해 조선의 법제가 정비되었을 때, 양재역은 경기도내의 6개 역도 중 하나인 양재도의 중심역으로 이에 속한 12개 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같은 체제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수원의 읍치가 현재의 수원성내로 옮겨 오게 되는 정조 13년 경에 영화도로 명칭이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회변동이 심해지자 역의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역노비의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는 신공(身貢) 이 무거워 역노비가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영조대에 역노비의 신공을 감하자는 주장이 나와 영조 32년에 내시노비(內寺奴婢:중앙관청)의 신고제 개혁과 함께 더불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역노비의 신공은 전(錢) 2량으로 감해지게 되었는데, 경기도 각 역의 경우 노비신공이 감액됨에 따라 역운영에 커다란 차질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경기도내 6개 역도의 역노비의 원래 신공이 7,600여 량이었는데, 이것이 줄어들어 경비가 부족하여 역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방의 각 역에는 거둔 노비신공을 경기 지역의 6개 역에 지급되게 된다(『비변사등록』129책, 영조 31년 8월 7일).이 같은 지방소재역의 경기소재 역에 대한 노비신공 입거(入居)는 경기의 역이 조잔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삼남 및 영동지방 각 역의 입마로 하여금 경기의 각 역에 입번(入番)하도록 했던 것인데, 경역(京驛)의 침학이 심해지자 입번을 폐지하고 대신 입거 목(木)을 상납하게 하여 경기의 6개 역도에 분급한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같은 조치로 양재도 관내의 역도 균역청(均役廳)으로부터 입거목을 급대받게 된다.
당시 양재역도 소관역의 경비총액은 목(木:무명)이 1동(同) 19필(疋)이었으며, 전(錢)은 1,654량이었다. 이 중에서 목 46필과 전 1,102량 6전 9푼은 자체의 역노비 신공으로 충당하였고, 목 23필과 전 551량 3전 1푼은 급대를 받아 충당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천 위치한 양재역 등 각 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외에도 경기 각 역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과중한 역을 담당하는 역졸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도망자가 속출하였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영조대에는 각 군현에 역졸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비용을 분정(分定)하게 된다. 즉 영조대부터 경역 보포(保布)의 징수를 위해 각 군현에 독립된 보인(保人)을 두게 하고 여기에서 거두어진 보포로 역졸의 생계 및 역마유지비로 사용하게 하였던 것이다.(『良驛實摠』영조24)
이에 의해 경기도 내의 각 군현에는 경역보(京驛保)가 모두 1,179명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1인당 2량씩 모두 2,266량의 보포전(保布錢)을 납부해야 했으며, 인접한 곳으로 금천은 38명에 76량을 납부하고 있다. (『賦役實摠』, 경기도) 이같이 타 군읍에 부담을 지워서라도 역을 운영하려 하였던 이유는 역로와 참제도가 당시 조선사회의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양재역을 비롯한 경기지역내의 역들은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국가로부터 특별히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집필자】 方東仁
[출처] 驛站制度|작성자 만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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