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24.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2)

구름위 2023. 4. 1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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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호미,괭이 등을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서류상으로 조선 군대는 항상 근무가 가능한 병력이 기병 2만 3천, 보병 1만 6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잔왜란 2년 후에 조사해보니 합해서 8천 명도 안 되었다. 한양의 방위사령부나 다름없는 수원의 군사 정원이 1만 7천 명인데 1596년 당시 병력은 1천 미만이며 평안도 역시 정원이 1만 명인데 1사 500명 밖에 안 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란 다음 해에 왕이 피란에서 돌아왔는데도 한양을 지킨 것은 군사 300명뿐이었다. 이들은 그나마 조정에서 밥을 먹여주니 그걸 먹으려고 자원한 숫자였다.

 

한양에 상주군 1만 명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몇십 년 후 광해군 때에도 상비군은 훈련도감 300명뿐이었다. 그래서 인조반정은 쉽게 성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에 의해 조선군이 해산되었을 때도 그 병력은 고작 4천 명뿐이었다.

 

당시 조선의 성곽은 방어에도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사격을 해야 할 성벽 위의 여장이 너무 낮아서 엄폐가 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공격군을 몰아서 잡을 수 있는 옹성은 물론 측방 사격을 할 수 있는 돌출부 성곽도 찿기 어렵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성곽만 쌓았다. 이런 이유로 임진왜란 중 최대 전투의 하나인 울산성전투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5만이 왜군 1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우선 무기가 엉망이었다. 명군과 조선군의 칼과 창은 일본군의 것보다 길이가 아주 짧았다. 우리 칼의 길이는 조선 후기 들어 길어져서 지금으로 환산하자면 90센티미터 가량되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아주 짧아서 70센티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창 역시 왜군의 3분지 2수준, 왜군은 왜소한 체구를 그런 장창과 긴 칼로 보강했던 것이다. 또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전투기술이 향상되었고 창과 칼을 사용하는 검법도 우리보다 월등하여 백병전이 붙으면 조선군이 절대 불리하였다.

 

더구나 우리 칼과 창은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예리하지 못하며 만드는 방법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대나무를 잘라서 끝에 날을 붙인 우리 창과는달리 왜군은 대나무 가지를 여러조각으로 이어 묶은 다음 역청을 발라 단단하며 오래 가고 가벼웠으며 그 날의 예리함은 우리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일본도의 우수함이 이미 증명되었지만 일본도에 조선칼이 부딪히면 통상 부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호미를 녹여 만든 짧고 둔탁한 칼과 일본도의 대결이 임진왜란이었던 셈이었다. 그런 강도 등 품질도 떨어지고 예리하지도 않은 둔탁한 그런 칼도 변변히 없었으니 몽둥이를 들고 조선의 군사들이 전쟁에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휘괸 몇 명을 빼놓고는 갑옷이라는 것도 없었고 물론 방패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0년이 다 지나 1786년 정조 9년 상소문을 보면 "지금 훈련도감을 비롯해 전국에 2만 7천여 자루의 환도가 보관되어 있지만 칼집도 업고 자루도 없으며 녹이 슬어 사용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있다. 여전히 조선의 국방력은 밑바닥이었던 셈이었다.

 

울산성 전투에 참가한 명군 4만, 조선군 1만의 연합군 중 조선군은 권율이 지휘했다. 조선군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전사 300여 명을 포함하여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런데 도망병은 5천이나 되었다. 추운 겨울에 손발은 얼어 터지고 식량도 업고 무기도 없는데 애국심 하나만으로 버티는 백성이 없었다.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낼래고 용감하게 싸우는 조선군을 보고 명나라군은 놀랐다고 했다.

 

그해 가을 다시 벌어진 2차 울산성전투도 마찬가지로 같은 병력으로 싸웠지만 조.명 연합군은 1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하고 말았다.

 

전투능력도 최하급이었는데, 일본군의 질사라는 연속사격술을 익혀왔는데, 왜군이 대오를 정비하여 겹겹이 걸치게 하여 연속사격으로 전진해오자, 조.명 연합군은 한꺼번에 몽땅 다쏘아버리고 그다음에 적이 다가오면 도망치는 형태로 전투를 했으니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비극은 군량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명군 1만 명이 내려왔을 때 아무리 긁어모아도 이들을 먹일 양곡은 5일분 밖에 안 되었고 조선군들은 물에 젖어 썩은 쌀 약간과 좁쌀 몇 줌이 고작이었고 말 먹이는 이미 고갈되어 도처에 굶어 죽은 말의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말도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없어서 이미 군마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군졸들은 지나가다 감나무에 덜익은 감을 보면 서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따 먹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입니다." -유성룡-

 

임진왜란은 그 빈구석으 조금만 들춰보면 어이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이지만  너무나도 이해 할 수 없는 구석이 대부분이다.

 

첯째,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이 그해 4월13일 저녁이었다. 새카맣게 바다를 뒤덮은 수천 척의 함선에 15만 병력이 들어왔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 전갈을 받은 것이 4월 17일 아침이다. 사흘 반나절이나 걸렸다.

 

거리가 천리이고 지금처럼 길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하루에 300리, 그래서 서흘 걸리는 것이 보통 아니겠느냐고 하면 이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면 조선 시대 역의 구조를 들어다보기로 하자.

 

역은 역졸과  역마가 배치되어 있는 비상 대기소인데 역과 역 사이는 통상 30리였다. 30리 길은 보통 걸음걸이로 대략 3시간 정도 걸린다. 마라토너에게는 40분 거리다. 그럼 역졸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말은 지금처럼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큰 말이 아니고 당시는 대부분 조랑말이지만 그래도 제법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사람보다는 훨씬 더 속도감이 있었을 것이다. 도중에 시내도 있고 강도 있고 산길도 있겠지만 어떻던 역마라면 그런 비상시기에 달리고 또 달린다면 넉넉잡아도 30시간이면 충분히 전쟁발발의 도첩을 한양 궁궐에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흘 반이나 걸렸다.

 

봉수대 연락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에서는 사흘 후에야 들연 왜적 침입을 통보받은 것이다. 이런 비상사태 속에서 이틀간의 공백은 아주 중요하다. 대체 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때 세종은 눈병이 나서 온천에 다녀야 했는데 청주에서 신묘한 물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물은 즉시 각 역을 거쳐 운반되었는데 성분이 탄산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왕께 전달되어야 하므로 비상 송달책이 하달되었다. 이 온천수가 있는 곳에서 한양까지는 대략 250리, 그 길로 온천수를 하룻밤에 운반했다. 저물녘에 출발하여 왕이 이른 새벽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밤샘을 해서 달려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도 부산에서 한양까지는 이틀이면 족하다. 온천수보다 몇 배가 더 중한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사흘 반이나 걸려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당시 역참으로 불리는 역이나 참은 문서나 관수물자 운반이 주목적이었다. 이곳의 이용자들은 주로 역졸과 관헌들, 역참 외에도 외국 사신들이 이용하는 관, 민간이 이용하는 원과 점이라는 곳도 있었다. 가장 서민적인 보통 주막보다는 모두 고급시설인 셈이다.

 

암행어사들이 단골로 역참에 들어 마패에 새겨진 숫자대로 말을 빌려갔다. 임진왜란 이후 개선된 수치지만 병조 직속인 노원과 청파역에 각각 역졸 144명에 역마 80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만기요람>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수치만을 봤을 때이다.

 

두 역은 매일 15필의 역마를 교대로 근무시켰는데 말은 금호문 밖의 마군영에서 보급하였다. 말은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 등 3등금이 있었다. 아마 상등마는 화살처럼 빠르게 잘 달린 말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역은 종사자가 적은 곳은 10명 안팎, 많은 곳은 2~3백 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역의 종사자들은 나라에서 녹봉을 받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돈으로 역을 운영했다. 조선의 군사들이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가서 군역을 마치고 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대규모 사절들이 오는 경우에는 말이 모자라 관군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말을 세내어 가지고 왔다는 기록도 있다. 게다가 설치 장소는 대부분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용이었다. 의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원 수백 명과 역마 수백 필이 배치되어 있는 대규모 역은 전부 중국과의 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남쪽에는 늙고 힘없는 역마와 소수의 역졸들이 한가하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도 걸핏하면 농사지으러 가 버리고 누가 아프다고 하면 가 버리고, 밤이 되면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그런 광경을 상상해보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서류상으로는 상등마가 있고 중등마가 있지만 현장의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말 목장의 경우 서울 근처에는 지금의 성동구 지역인 살곶이에서 왕실 목장이 있었고 그다음엔 강화도에 있었다. 이 말이란 짐승은 번식이 매우 더디다. 몇 해에 한 마리밖에 출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에서 수시로 수백 마리씩 공납을 받아갔다.

 

굶주린 백성들이 훔쳐다 잡아먹고 목장 관헌들이 몰래 내다 팔고, 폐사하고, 좀 좋은 말은 고관들이 빼돌리거나 바꿔가고, 그러는 판에 전국 목장의 말은 항상 장부수보다 부족한 실정이었다.

 

왕은 수시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린다. 상품은 으레 말 한마리가 가장 많았다. 그걸 첩지로 써서 목장에 내리면 목장에서는 내줄 말이 없어서 첩지가 한 길이나 쌓였다. 사헌부에서 조사를 나갔지만 뽀족한 수가 없었다.

 

말의 대부분도 과하마라고 불리는 조랑말이다. 과실나무 가지 밑으로 지나간다 하여 과하마라 불렀다. 대신들은 그런 작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볼썽사납다고 하여 안장을 매우 높게 만들어 키를 부풀리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과하마들은 빨리 달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짐을 가득 싣고 천천히 갇는 것이 주 임무이니만큼 그들이 국가 위기상황 같은 것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관원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니 왜적의 부산 침범 소식이 사흘 반나절이나 걸려 한양에 전해졌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좋은 말들은 죄다 북쪽에, 왕이나 고관들이 행차하는 노선에, 그리고 그 나머지가 일반 노선에 배치되었다.

 

호남이나 영남은 진쟁 위기도 없고 변방이니만큼 가끔씩 가는 어사, 관보를 전달하는 일반 업무뿐인지라 역 관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호남과 대등하게 경상도 역시 조선에서는 상당한 지역 차별을 받았다. 조선의 영토는 요지가 한양과 평양, 의주 근처였고 나머지는 전부 변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