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원정은 승리한 전쟁이다?
조선에서 외국과 전쟁을 해본 것은 딱 5차례다. 일본과 3차례, 청국과 2차례 모두 패전했다.
임진왜란을 승리한 전쟁이라 일컫는 주장도 있지만 결코 승리가 아니다. 왕이 국경선까지 도망가고 대궐이 불타고 국토의 태반이 점령당했으며 백성 수만 명과 왕자 2명까지 포로로 끌려간 전쟁이 어떻게 승리한 전쟁인가.
일본과의 세 번의 전쟁 중 가장 소규모는 대마도 정벌전쟁이다. 우리나라가 그때 모처럼 외국을 정벌하러 갔다. 고려 때도 중국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 정벌에 나선 적이 있지만 그때는 폭풍이 불어 함대가 궤멸되는 바람에 싸움도 제대로 못해 보고 돌아왔다.
세종 시대 대마도 원정을 마치 승전처럼 생각하여 조선의 치적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를 혼내 주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고려 시대부터 무려 500여 회 이상 대마도 해적들은 우리 영토를 들락거리면서 노략질을 거듭해왔다. 그것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정벌이라는 것이 이 정벌의 큰 명분이었다.
1419년 세종 1년. 우리 함대는 227척의 배, 1만 7천여 명의 군사, 65일분의 군량을 가지고 출병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겨우 50킬로미터, 일본에서는 13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에 들어간 조선 군사들을 보고 대마도 주민들은 떡과 술을 가지고 나와서 환영을 하다가 전쟁하러 온 것을 알고서는 모두 도망쳤다.
조선군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크고 작은 배를 모두 불사르고 마을을 불태우고 200여 명을 죽였다고 첯 보고를 올렸다. 전과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허풍이 많은 것이라 죽은 사람들이 주민들이었는지 대마도 해적들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창피하게도 논밭에 자라고 있던 작물까지도 모두 베어 버렸다.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전과도 올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산으로 도망친 대마도 해적들은 야습과 매복 작전으로 우리 군사 200여 명을 죽였다. 그것이 우리 기록이고 대마도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2천을 없앴다고 나온다.
전후 과정을 유추해보면 이때 그들은 조선군을 협박과 회유로 달랬다. '우리는 조선군과 싸울 의사가 없다. 그리고 당신들이 대마도의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와 봐야 승산이 없다. 게다가 곧 태풍이 다가오는데 한번 바람이 불면 배를 띄울 수도 없다 오래 머물수록 당신들 피해가 늘어날 뿐이며 자칫하다가는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사실 대마도의 산맥은 험준하다. 추격해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계속해서 야습과 매복에 걸린다면 배겨 날 방도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이종무 사령관은 불과 열흘 만에 대마도에서 퇴각해 버렸다.
그는 부산으로 가지도 못하고 거제도에 머물렀다.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당장 이종무를 끌어다가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세종(당시 태종이 상왕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이 말렸다. 여름 태풍철이 지나면 다시 때를 잡아서 공격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틀림없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종무도 군사들을 조련하고 무기를 새로 준비하여 기필코 완전 정벌을 하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준비를 했지만 가을 추수 때가 됐다.
강제로 징집한 군졸들은 모두 가을걷이를 해야 하는 농촌의 농부들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간청이 빗발치자 왕은 추수도 하고 밤도 주워야 하니 일시 귀향시켰다가 다시 동원할 것을 승락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결국 겨울이 되고 정벌계획은 슬그머니 없던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것이 대마도 정벌의 실상이다.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로 정벌에 나섰던 결과의 창피한 모습이다.
그들은 출병에 앞서 부산 왜관의 일본인들을 모두 감금시켰다. 사전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잊었다. 대마도의 지형지물과 군사력의 실상, 싸움이 벌어지면 틀림없이 섬이나 산으로 도망칠 것인데 그러면 그다음 작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전혀 없었다. 적정에 대한 사전 정보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술작전계획도 없었고 치밀한 사전 준비와 훈련도 없었던 것이다.
대마도는 서울처럼 대규모 성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속과 섬, 바닷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거주 형태에 대한 연구도 없었다. 대마도 도주를 먼저 체포하기 위한 계책도 없이 제주도 만한 지역 크기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수십여 개 섬을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힉도 없이 1만 명이 넘는 군사로 들어가 본들 무슨 큰 승산이 있겠는가. 한마디로 무모한 정벌 작전이었다.
패전이 확실한 것은 다음 기록 때문이다. "대마도에서 구조해 온 중국인들이 우리 군의 패전 상황을 분명히 봐서 잘 알고 있는데 만약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죄다 실상을 보고해 버릴 것이고 그걿게 되면 중국이 우리를 얼마나 얕잡아 볼 것인가. 차라리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좌의정 박은이 세종에게 말하고 있다. 또 통사 최운이 돌아와서 "이번 전쟁에서 죽은 것이 왜인 20명에 우리 군이 100명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적 사살 200명이 10분지 1로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 조금씩 건네주는 양곡이 아니면 살아 갈 수가 없는 대마도에서 화의를 청해 와서 이 전쟁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은 세종의 지시에서 실시된 것이 아니라 당시 물러나서 상왕으로 군림하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지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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