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위의 사건들은 대부분 왕조에 대한 원한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은 개인끼리 무고였다. 지방 수령을 하급 관헌이 무고한 사건도 줄을 이었고 그와 같은 혐의로 평안도 서북면 도순무사 최윤지를 모해한 전 낭장 김영수가 목이 잘렸다.
"윤지 부자가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 라고 모함했기 때문이다. 일벌백계로 김영수의 사지를 찢어서 각도에 돌렸지만 그 뒤로도 이런 무명장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노비와 여자 문제로 들어오는 무명장도 많았다.
1398년 태조 7년 전 관원 김귀생이 익명서를 만들어 전 현령 이적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지를 찟어서 조리돌렸다. 그 사건의 발단은 김귀생이 이적과 노비를 가지고 심히 다툰 일 때문이었다.
범인을 잡으려고 이적을 불러 "너한테 원한을 가진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필시 김귀생입니다."하였으므로, 김귀생의 집을 수색해보니 과연 익명서의 초본이 나왔다. (태조실록 7년 4월 8일)
1679년 숙종 5년 4월 다음 사건으로 조선 무명장의 실체를 파악하는 전형이 될 듯하다.
대궐과 가까운 대로에 방이 하나 걸렸다.누구누구 등 9명이 나라에 원한을 갖고 날짜를 정하여 난을 일으킨다는 말과 함께 상세한 것은 북촌에 살고 있는 노비 거창을 잡아 신문하면 전모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론된 9명은 모두 문무관 등 모두 관직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냥 방치할 수 없으므로 북촌을 뒤져 우선 신성로의 종 거창이란 자를 잡아와 문초에 들어갔다. 성안이 뒤숭숭했다. 성문을 걸어잠그고 9명 모두 잡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곳곳마다 복병이 나가 검문검색을 했다.
노비에게서 이외의 단서가 나왔다. 투고자는 아무래도 이환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 자가 자신의 주인 신성로와 종 문제로 소송까지 했으며 그때 자신이 주인을 대신하여 송사했는데 결국 그 자가 패하고 많은 굴욕을 당했으므로 틀림없이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집 종 이름을 누가 알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이환을 잡아다가 국문을 하니 전모를 실토했다. 이태서가 짓고 이태서의 아들 이경명이 썼다고 자백한 것이다.
"병 문안을 위하여 그 집에 갔을 때 방 안에서 삼부자가 모여 뭔가 하고 있으면서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체하여 창문을 열고 들여다본즉 이태서의 아들 이경명이 한창 글을 쓰다가 얼런 숨기려 했는데 이태서가 '저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남인이므로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이경명은 계속해서 쓰기를 마쳤습니다. 끝낸 다음 다시 읽어 내린 뒤에 나도 함께 의논에 참여했습니다.
적힌 9명은 무인들이 대부분인데 그중 선전관 이씨는 나하고 친한 자이므로 왜 이 사람을 집어 낳았는가 물으니, 이태서의 둘째 아들 이경의가 말하기를, '이 자식은 새로 선전관이 된 자인데 나와 친구 사이인데도 내가 사랑하던 창기를 몰래 꾀어 간통을 한 의리가 없는 놈이므로 욕을 당해 마땅하다'라고 했습니다. 또 황 부장이란 자는 일찍이 자신의 아비가 병조판서의 집에 갔을 때, 대문 곁에 서 있다가 소근 거리는 말로 '변변찮은 것들이 뭐하러 이곳에 왕래하는가?'라고 했기 때문에 그 원한을 갚을 길이 없어 명단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또 '윤희중이란 자는 사람이 너무 용렬하여 매사에 오만무례하여 내가 옳은 이야기를 하면 혀를 끌끌 차면서 타박하던 자로 오만한 놈이다'라고 했습니다." (숙종실록 6년 5월 13일)
그 투서의 주된 목적은 서인 관원들을 모함하려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원한을 뒤섞어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함성 투서는 조선을 관통하여 헤아릴 수가 없으니 비록 태조가 본보기로 능지처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없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 갔다.
확실한 정황이 있는데도 투서가 유야무야 된 경우도 있었다.
1478년 성종 14년. 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성 위에서 내던져진 것으로 보였고 혈흔이 있어 타살이 분명했다. 관원들이 시신이 발견된 곳을 수색하다가 현장과 동산으로 연결되어 있는 창원군 이성의 집으로 연결되었다. 관원들이 그 집으로 들어 갔다가 창원군에게 혼쭐이 나고 쫓겨났다.
창원군은 세조의 2남이고 당시 23세였는데 모친은 다르지만 성종의 형이었다. 수색도 할 수 없지만 그 집이 수상하다고 보고가 올라갔다.
성종은 다소 유약한 왕이었다. 함부로 형님을 모욕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주변의 생각은 달랐다. 창원군은 술을 과도하게 즐기고 걸핏하면 말썽을 피우는 사람이었다. 농사철에 온양온천에 내려가 일대의 수령들을 불러다가 거한 대접을 받거나, 역마를 제멋대로 타고 다니며 안 된다고 하는 역졸을 매질하여 한 차례 소동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성종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이 형님을 극진하 우대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유야무야될 뻔한 사건이었는데 투서가 한 장 들어왔다. 최 첨지라고 하는 이름으로 보낸 그 투서을 위험을 무릎쓰고 도승지 신준이 성종에게 보고를 해 왔다. 내용인즉, 그 시신은 창원군 이성의 집 여종 고읍지이며 창원군이 총애하는 노비였다. 창원군이 질투를 해서 살해한 것인데 차츰 조사를 해보니 투서의 내용이 모두 맞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고읍지는 어느 날 이웃 남자의 꿈을 꾸고 나서 그것을 무심코 소문냈는데 창원군이 그 내용을 듣고 고읍지에게 그 남자와의 관계를 추궁하다가 그녀를 그만 죽이고 만 사건이었다. 조사결과 집안의 노비들이 모두 사실을 시인했지만 창원군은 끝까지 부인하면서 노비들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버텼다.
시체를 갔다 버린 남자노비들이 범행을 자백했지만 반면 여자노비들은 모른다고 부인을 했다. 이들을 추궁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성종은 "노비가 주인을 거역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지 않는가"라면서 듣지 않았다.
몇 달 간 더 조사 끝에 창원군의 소행이 확실히 밝혀졌어도 성종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1년도 못 돼 삭탈했던 직첩을 다시 모두 내려주었는데 설사 죄인을 잃더라도 노비가 주인을 고발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도 그의 시대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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