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솜이불을 펼쳐서 적탄을 막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이 왔다. 사령관 이여송의 첯 마디는 경악 그 자체였다.
"아니 조선군은 무기가 없는가?"
조선 군사들이 들고 있는 것은 죽창과 몽둥이, 아니면 농기구였다. 승자총통이며 대완구며 비격진천뢰만 내세우지 말기 바란다. 군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복장과 무기는 각자 알아서 준비하여 동원시 모여든 것이 조선군이었다. 군장과 무기는 비싸다. 전시에 시골 농민과 천민들이 장만할 능력이 없다. 칼을 장만할 능력이 없어 집안의 호미를 녹여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칼은 몽둥이와 부딪히면 부러지고 만다.
그런 빈약한 군사들이 파수(보초)라도 잘 봐줬으면 좋겠는데 파수를 세워 놓으면 도망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두 번째 탄식은 조선군은 도망군이라 불렀다. 접전이 벌어지면 절반이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대체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선 관군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가?
무기는 고사하고 첯째 병력이 없었다. 이율곡은 이미 20년 전에 상소(만언봉사)를 통해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아닙니다."라며 피 끓게 부르짖었다.
"날로 심하게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 가는 큰 집에 불과합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 댈 수 없는 집입니다."
이런 나라에 세계 최강의 일본 군대가 최신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 왔다. 장수는 녹봉이 없고 군사는 무기가 없었으며 군중에는 군량이 없어서 군사들은 언제나 굶주렸다. 군 체계가 없어서 장수마다 명령이 달랐다. 도원수가 전진 명령을 내리면 순찰사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선조는 압록강가에서 왜 조선군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느냐고 화만냈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서울에서 급히 군대를 모았지만 다 도망쳐 버리고 동원 가능한 숫자는 겨우 300여 명이었다. 조선 최고의 작전통이던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하고 조선 최고의 장수라던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기마군 7천여 명과 접전을 벌이다가 전멸했다.
이일은 용인 이씨다. 용인 이씨 문중에 이일에 대한 글을 살펴보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명장 신립을 도순변사로 이일장군을 경상도 순변사로 임명하여 부산. 동래가 함락되었을 경우 이를 방어토록 하였다. 당시 54세의 노장이었던 이일 장군은 신립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신망이 높았으며 당시 한양에서는 이일 장군이 야인을 물리치고 풍악을 올렸을때처럼 왜인을 물리치고 한양을 한바퀴 돌며 풍악을 올릴 줄 알았다.
그는 왕명을 받고 종사관인 조방장 몇 명을 인솔하고 진지로 내려가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웠으나 수와 무기에 있어 워낙 큰 차이가 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전투에 패해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대항할 무기도 변변치 않고 병사 또한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전사하고 이일 장군은 후일을 도모하고자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 평안도로 피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충주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한 죄가 크다고 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을 폈다. 서예 유성룡은 이일 장군이 패전한 것에 대하여 <징비록>에 " 이일은 객장으로 수병도 없고 창졸간에 충돌한 것이기 때문에 당하지 못하였음은 자명하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가 전투의 경험이 많은 무장이며 그간의 전공을 감안하여 용서하고 오히려 격려하였다.
그 후 이일 장군은 서울로 올라와 선조의 근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임진강 등지에서 왜군 6백여명의 목을 베어 그들의 기세를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왜적의 세력이 평양까지 미치자 인심이 혼란해지고 드디어는 평양까지 함락되었다.
선조 임금은 다시 의조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이때 이일 장군은 동변방어사의 임무를 띠고 민심을 환기시키고 왜적과 맞서 싸웠다. 세자 광해군을 3천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 전투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때마침 명나라의 이여송이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정해오자 이들의 힘을 입어 왜적을 소탕하고 끝내는 평양을 탈환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백금 20냥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 뒤 지중추부사 비변사 당상 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도 주로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함경북도 순변사. 상도순변사의 임무를 띠고 왜적의 빈번한 침범에 대치하여 크고 작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유지에 힘썼다. 충청도에서 송유진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았다.
선조 28년(1595).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북도북병사가 되고, 지충추부사, 행호군을 거쳐 함경도 남병사가 되었다. 선조 34년(1601). 임진왜란 당시 상주에서 부하를 사형한 것에 대한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64세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죽은 뒤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일설에는 그가 선조33년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재임중 왕의 소환을 받아 상경도중 정평에 이르러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용인군 모현면 매산리 고시능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인 전주 이씨와 함장되었다. 그의 묘소 앞에는 묘갈만이 있고 묘역에는 묘갈,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갈은 145*60*16센티미터의 크기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그의 묘역은 용인군 향토 유적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측면에 안내판이 있어 그의 업적을 가늠할 수 있으나, 아쉬운 점은 길가 입구쪽에 세워졌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10월에 그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소입구 마을에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그의 저술로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지은 <제승방략>이 있으며, 현재 <장양공시전호정벌도>가 전해지고 있다
이일 장군은 항상 북경지역 야인이 침범하는 것을 염려하여 비변책을 마련코자 하였다. 이에 조선초기에 김종서가 저술한 것을 선조 21년(1588)에 시의에 맞게 정리하고 저술하였다. 제승방략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과 이에 소속된 각 보의 방수를 논한 병서이다. 이일 장군은 이 책을 여러 장수들에게 배포하여 참고토록 하였다 이책은 훗날 군대에서 시강의 표본으로 간행되었다.
현재 2권1책의 목판본이 전한다. 내용은 권1과 권2의 상반까지에는 도내 각 진의 위치와 산천의 형세, 노정의 원근, 성보의 배치, 행군의 절목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각 진보에서 일났던 야인의 침범사건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살필 수 있다.
또, 적의 침입에 대비한 응변책, 봉수, 복병, 체탐, 망해 등의 배치를 열거하고 있다. 향화야인부락의 위치와 추장, 호수 등도 부기하였다. 권 2의 끝부분은 속록의 형태로 국경 수비의 군무 29조, 금령 27조, 육진군관의 관명으로 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이일 장군의 <청행제승방략장> 등이 있다.
이 책은 선조때 야인에 대처한 조선시대의 비변책은 물론 두만강 주변의 야인부락 사정도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며, 연산군 이래의 주요고사도 알 수 있어서, 여진관계사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판본은 현종 11년(1670)에 이선이 중간한 것인데 그 내용이 비록 함경도 지방에 국한되어 있지만, 조선중기의 군사 운용의 병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유일무이한 자료이다."
용인 이씨 문중은 그들의 조상이니 그런대로 이일에 대하여 좋은 점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임진왜란 당시 이일은 조선에서 가장 무능한 장수 중 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다.
이처럼 조선 최고의 전략가이며 <제승방략>을 증보한 이일도 상주에서 패전했고 탄금대 전투에 참가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제승방략이 아니라 36계를 최고의 전술로 생각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한강, 임진강 등지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던 패전한 장수들이 나중에는 주변 장수들을 모함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에서 일본군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던 인물은 권율, 이순신, 김시민, 유성룡, 일부 의병 장수 정도 외에는 대부분 작전을 제대로 아는 장수는 한 명도 없었다.
왕은 급히 이덕형을 도체찰사로 임명했다. 이때 올린 이덕형의 상소는 참담하다. 그는 조선 군을 꿰뚫고 있던 단 한 사람이었다.
"이미 순변사도 있고 순찰사도 있으며 도원수, 방어사, 병마사, 별장도 있는데 지금 부족한 것은 명령을 내리는 장수가 아닙니다. 지금 가장 염려되는 것은 명령이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내려와 아래에서는 어느 쪽 명령을 들어야 할지 어지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이 사이에 넣어 또 명령을 내리게 한다면 그야말로 엇갈리고 뒤섞일 것 아닙니까. 우리 군은 지금 병사, 수사, 조방장, 수령까지 모두 별개의 직위로 별개의 군사를 가지고 있어서 공문만 여러 군데서 한꺼반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앉아서 문서로만 전쟁을 치르는 꼴이다. 군사조직도 사류상으로는 속오군 2,500명 아래 사 500명, 그 아래 초관 99명, 기총 33명, 대총 11명 등으로 편제되어 있지만 어떤 초대에는 초관이 있지만 기총이 없고 어떤 곳에는 군사가 단 한 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군, 군단, 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등 편제는 있지만 병력이 한 명도 없는 소대나 중대가 수두룩한 대신 그 지휘관들은 넘쳤다는 것이다. 당연히 도원수라고 해봐야 민병 100여 명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속되어 있는 군사라고 해봐야 평상시 훈련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쟁 전에도 그들은 동원되면 대궐 등지의 파수나 서고 아니면 성 쌓는 잡역 등이나 하고 돌아갔다. 전투 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군사훈련 교재라는 것이 한 권도 없었으니 소집된 노비들, 농민들은 맨주먹이나 농기구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규장각에는 <동국병감> 등 우리 병서가 20여 종 보관되어 있지만 조선 최초로 펼쳐낸 <동국병감>은 고려 때까지의 중국에 대한 항전 기록이고, <병장설>이란 병서 역시 중국이 북방 민족과 벌인 전쟁 기록이다. 우리나라 군사를 직접 훈련시키고 우리 지형을 이용한 작전 훈련 병서는 전무하다.
작전술로써는 눈에 띠는 것은 한참 지난 1778년 정조 2년 무관 송규빈이 제안한 것인데 좀 황당한 내용이다. 솜이불로 적 공격로에 펼쳐서 적탄을 막자는 것과 적 침투로에 나무를 심어 막자, 그리고 겨울에 얼음으로 장벽을 치자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은 병사, 수사, 첨사, 권관 등 직책이 수두룩하지만 또 하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에 대한 녹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봉급 한 푼도 없이 이들은 병졸들에게서 양곡을 걷어다 먹었다. 조선 내내 이 방식은 고쳐지지 않았다.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은 군역에 나가는 대신 군포라는것을 납부했고 이것으로 조선의 군대가 유지되었다. 돈으로 군 지휘관이 된 자를 채수라고 하는데 이 채수들은 몸으로 때우려고 오는 사람보다 군포를 바치는 사람을 더 반가워했니 그런 군대가 일본의 대군을 만난 것이다. 그런 장수들은 도망치기 바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웃이나 상급 지휘관을 모함했다.
경상도 의병 곽재우는 전란이 발발하자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봉기했다. 우선 무기도 없고 양곡이 부족하던 차에 인근 현감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것을 보고 남은 무기와 양곡을 썼다가 나중에 알게 된 현감으로부터 당장 고발당했다. 잡배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관청을 약탈해간 도적이오니 당장 잡아들이라는 내용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유숭인은 임란을 통해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함안군수로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한 달여 만에 적 50여 명을 사살하고 이 공적으로 그는 경상 우병사로 승진되었다. 정3품에서 종2품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는 창원전투에 참가했지만 부대는 대부분 궤멸되고 말았다.
왜군이 2만 병력으로 진주성을 향해 전진해오자 그는 남은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진주성은 목사 김시민이 방어준비를 갖추고 성문을 굳게 틀어 잠근 뒤였다.
"함께 싸우러 왔소."
성밖에서 그가 외쳤지만 김시민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진주목사로 자신의 지휘하에 전투를 치르려 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병마사의 지휘를 받는단 말인가. 지휘에 혼선이 온다는 핑계,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직급이 낮았던 사람한테 명령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 혼자 승리하여 공을 독접하고자 하는 생각, 그런 여러가지 판단 때문에 그는 끝까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밖에서 싸워 주시오."
유숭인은 도망가지 않았다. 성의 동문 앞에서 수십 명의 부하들과 함께 적진을 돌격하다가 죽었다.
1차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이 승리함으로써 그의 공적만 남았다. 유숭인의 외로운 죽음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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