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25.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구름위 2023. 4. 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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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1. 과도기적(過渡期的) 교통로(交通路)

 

(1) 역도(驛道)의 정비
  조선왕조가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국의 교통망은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기에 앞서 과도기적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와 같은 내용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경기에 속한 역도 가운데 좌도충청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중로(中路:한양∼통영)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관동로(關東路:한양∼평해)와 관북로(關北路:한양∼경흥), 우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의주로(義州路:한양∼의주)의 시발 부분에 속하는 역들로 살펴진다. 그러한 비중 때문에 찰방(察訪:종6품)관할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역시 의주로의 연장으로서, 황해도의 참로(站路)찰방에 속한 역들과 평안도의 관로(館路)찰방에 속한 역들은 특히 사행로(使行路)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역시 찰방 관할로 한 것이라 하겠다.

 

셋째 특징은 전대에 비해 국토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기도 했지만, 역도의 수는 22:44(42)로서 거의 배로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전대에 비해 정치적 경제적·군사적·외교적인 면에서의 큰 변화가 교통정책의 재편을 불가피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건국 초의 과도기적 교통정책은 점차 중앙집권적인 변화와함께 역의 증감조정, 역도의 재편, 역승(驛丞:정9품)의 일괄적인 찰방으로의 승격 등 체제를 재정비하여 대전(大典)체제를 구축하게 되어 그후다소의 융통적인 조정은 있었지만, 조선 전반기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2) 전국(全國)의 주요 간선도로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된 역도와 함께 교통로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흔히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9대 간선도로니 10대 간선도로로 이름지어 부르기도 한다.


  제1로는 한양-의주(평안북도)를 잇는 교통로이다. 의주로(義州路), 사행(使行路), 연행로(燕行路)라고도 불린다.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교통로이다. 국내사절과 중국사절의 내왕로로서 그들의 숙식은 물론, 연향(宴享)을 위해 관사(館舍)도 설치되어 있었다.
  제2로는 한양-경흥(함경북도) 서수라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관북도(關北路)라고도 부른다
  제3로는 한양-동해안의 울진·평해(平海: 경상북도)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관동로(關東路)라고도 부른다
  제4로는 한양-부산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흔히 좌로(左路)·중로(中路)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좌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이용하여 서울에 들어오는 왜사입경로(倭使入京路)이기도 하다.
  제5로는 한양-통영(경상남도)을 잇는 교통로이다. 제4로와는 한양에서 문경(聞慶)의 유곡역(幽谷驛)까지 노정이 같다. 따라서 중로라 할 수 있다.
  제6로는 한양-통영을 잇는 교통로로서 제5로와 다른 점은 우로를 이용하여 전라도를 경유하여 통영에 이르는 노선이다.
  제7로는 한양-제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인데, 한양-삼례역(전라북도)까지는 제6로와 같다. 우로에 속한다.
  제8로는 한양-충청수영(忠淸水營)까지를 잇는 교통로이다. 제6로와는 진위(振威)까지 노정이 같다.
  제9로는 한양-강화(江華)를 잇는 교통로이다.
  제10로는 한양-봉화(奉化: 경상북도)를 잇는 교통로이다. 이 도로는 봉화 동북쪽 태백산에 사고(史庫)가 있음으로써 개설된 도로라 할 수 있다.
 

 

(3) 교통로(交通路)의 등급
  조선시대 도로와 역을 대·중·소로의 3등급으로 나누고 있었다. 도로 규정상 3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도로의 폭이라든지 노면 등 구조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간선도로로서의 중요성, 다시 말하면 도로의 이용도를 감안한 분류라 할 것이고, 오늘날 개념으로는 교통량의 많고 적음에 따른 분류라 하겠다. 그리하여 자연 대·중·소·로의 등급에 따른 역마(驛馬)와 역호(驛戶)가 차등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經國大典』에 의하여 전국의 대·중·소로의 분류를 표로 나타내 보면 옆과 같다.
  大  路    中  路      小  路
  漢陽∼開城  開城∼中和     그 밖의 도로
  漢陽∼竹山  竹山………尙州   그 밖의 도로
         鎭川∼黃澗∼尙州  
  漢陽∼稷山  稷山∼公州∼全州  그 밖의 도로
  漢陽∼抱川  抱川∼淮陽     그 밖의 도로
         漢陽∼楊根     


 

2) 역참제(驛站制)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기능을 대표하는 것은 역전(驛傳)·파발(擺撥: 騎撥과 步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역참제는 역전이 주였으나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그 기능은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역리(驛吏)나 역호(驛戶)의 도망 또는 유망으로 그 기능 수행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역마를 함부로 탔다든지, 역전(驛田)을 사유화했다든지 찰방(察訪) 등의 작폐가 역전 기능의 쇠잔 원인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5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을 설치한 데서 파발제가 성립되었다. 물론 파발제 성립으로 역전제가 소멸된 것은 아니고, 역참제 복구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봉수제(烽燧制)의 군사통신수단과 전명(傳命)을 주로 담당하는 파발제의 두 기능을 합한 파발제가 성립된 것이다.

 

 (1) 역전(驛傳)
  역로행정을 총괄하는 관서는 병조(兵曹)였고, 역전(驛傳: 郵驛) 사무를 관장하는 실무부서는 승여사(乘輿司)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국에 퍼져 있는 530여 개의 역을 40∼44개의 역도로 조직하여 관할하게 하였고, 역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역의 등급을 나누었다.


  역도의 책임관원으로 찰방(종6품) 1인을 두고 있었고,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로서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일수(日守)·역노비(驛奴婢)·보인(保人)·솔인(率人)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종사자의 수는 역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경국대전』에 보면, 상등역 121인, 중등역 96인, 하등역 71인 등 신분별 정원이 정해져 있었지만, 후에는 신분별 구분도 없어졌고 정원도 증가되고 있었다.


  대개 역장이나 역리들은 사신의 영송(迎送), 역마의 보급, 공문서 발송 등의 업무를 맡았고, 역노비는 급주(急走)노비와 전운(轉運)노비로 구분 편성되었는데, 공문서 전달, 사신접대에 따른 운반, 역토지(驛土地) 경작에 종사하였다.


  각 역에 딸려 있는 이른바 역마가 얼마였는지 자세하게 살펴지지는 않지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전국 40개 역도 535개 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역마는 상등·중등·하등·태마 등의 등급이 있었고, 역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배속이 달랐다. 가령, 병조 직속역이었던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蘆原驛)에는 각각 역졸이 144명, 역마가 90필씩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마의 이용은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에게 지급되었고, 지방에서는 중앙에의 보고나 진상(進上) 때에 사용되었는데, 품계에 따라 말의 지급수와 말의 등급이 달랐다. 출장관원이 각 역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로 마패(馬牌)가 발급되었다. 즉 연호(年號)·월(月)·일(日)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긴 앞면과 그 뒷면에 마필수가 말그림으로 새겨져 있는데, 말그림은 1∼5필까지의 5종이 있었다.


  마패의 발급절차는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이 마패를 내주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절도사(兵使 또는 水使)가 중앙에 보고나 진상을 올려보낼 때 마패를 발급하였다.


  역마의 이용규정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즉, 역마는 원칙적으로 1일 3식(息: 1식은 30리)인 90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 함부로 타는 자[濫乘者]라든지 아무에게나 내주는 자[濫給者],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 등의 사고가 생겨남으로써 이에 대한 법적 처벌규정도 『경국대전』은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인 영조 38년(1762)에는 노문(路文: 마패 외에 從隸者의 숫자와 路程을 써넣은 표)을 발급하기도 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한편, 역의 운영경비와 종사자들의 급료 지급을 위해 각 역에 토지가 지급되었다. 즉, 역의 운영경비, 급료지급을 위해 관둔전(官屯田), 공수전(公須田) 등이 대·중·소로의 구분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고, 역마 충당을 위해서 마전(馬田)이 대마·중마·소마의 구분에 따라 차등·지급되었다.

 

  (2) 파발(擺撥)
  파발은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기구로서 변방의 급한 보고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파발제가 생겨난 배경은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마비상태에 놓인 역참제와 봉수가 순수한 군사 통신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1597년 5월 한준겸의 건의로 명나라의 파발제를 도입한 것이 그 효시이다.


  파발의 조직은 전송수단에 따라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구분되며, 전국을 3대 간선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기발은 사람이 말을 타고 급보를 전하며, 보발은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급보를 전하는 것이다.


  한편, 3대 간선이란,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서발(西撥), 서울에서 함경도 경흥을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북발(北撥), 서울에서 부산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 파발로를 남발(南發)이라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3대 간선 가운데 서발은 기발이며, 북발과 남발은 보발이기 때문에 따로 대로기발(大路騎撥)이니 대로보발(大路步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간선에서 뻗어나간 지선을 간발(間撥)이라 하는데, 이들은 대개 서발과 북발에만 있다. 예컨대, ① 서발은 안주-강계, 안주-벽동, 영원-위원까지의 3개의 간발이 있고, ② 북발은 북청-후주, 부령-회령-무산까지의 2개의 간발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파발은 군사통신적 기능이 강한 것이기 때문에 파발로는 군사통신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조직면에서도 군사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가령, 기발의 경우를 보면, 25리마다 혹은 20리∼30리마다 1참(站)씩을 두고,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군정(軍丁·騎撥軍) 5인, 말 1필씩을 배치하였다. 한편 보발의 경우는 30리∼40리 또는 50리마다 1참씩을 두었고, 매참에 발장 1인, 군정 2인씩을 두었다. 이와 같은 파발로의 구성은 기존의 역참제와 병행하여 설치되었는데, 서발에는 모두 41참, 북발은 64참, 남발은 31참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생겨난 파발제도 그 폐단은 적지않았다. 신속히 전달되어야 할 전문(傳文)이 지체되거나 파손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쨌든 고종 32년(1895) 근대적 통신시설이 설치되기까지 군사통신수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역참(驛站) 이용의 보조설비

  역참 이용의 주요 보조설비로서는 이정표(里程標)와 숙박시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국대전』을 보면, “외방도로(外方道路)는 매 10리마다 소후(小대)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후에는 리수(里數)와 지명을 새긴다”라고 했다.


  한편, 보다 자세한 내용을 『대동지지』에서 살펴보면,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6척(尺)이 1보(步), 360보가 1리(里), 3,600보가 10리이며, 매 10리마다 소후를 세우되, 후에는 리수와 지명을 새긴다(속칭 장승이라고 부른다). 30리마다 대후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옛 제도에서는 대·중·소로에 각기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들이 거쳐가게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과한 이후부터는 원우는 모두 폐지되고 점사(店舍)가 많이 생겼다. 그러므로 혹 원(院)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점(店)이다. 많은 점사가 생겨나는 것은 불규칙하고 변화가 많아 원과 점의 소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컨대 양란을 경과하면서 원우가 소멸되고 점사가 생겨나고 있음을 알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여행자들의 공영 노변시설 제공이 시세변화에 따라 사영형태인 점사로 이행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후(텎)란 흙으로 쌓은 돈대[土臺]를 말하는데,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느티나무를 심었고, 한편 나무그늘을 지게 하여 여행자들의 휴게소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갖게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를 정자나무라고도 하여 느티나무뿐 아니라, 회(檜)나무, 은행나무 등이 많이 심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후나 장승, 정자나무 등은 이정표로서 휴게소로서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한 노변설비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원거리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숙식의 문제였다. 그 중요성은 조선시대 교통로를 말할 때 반드시 역(驛)과 원(院)을 묶어서 역원(驛院)이라고 하는 사실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원의 설치 과정을 보면, 조선 초기에 원을 보완 정비하는 방법으로 원이 소재하는 인근주민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 책임을 맡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원주(院主)의 설치라고 하는데, 국가는 원주에게 원주전(院主田: 대로변의 원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 35부씩)을 지급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우(院宇)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국에 약 1,310개의 원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역원을 중심으로 이 곳에서 시설장비와 관계 역무에 종사하는 관리 및 서비스에 종사하는 거주민의 주택이 들어서 부락을 이룬 것을 역취락이라하고, 역과 근접한 거리에 위치하여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객사(客舍) 중심의 취락을 원취락이라고 하였다. 두 기능은 중복되거나 상호 보완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역원취락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시대 여행자에게는 아주 긴요한 것이었다.


  원이 공무 여행자의 편의시설인데 반해 일반 여행자를 위한 시설로는 점사(店舍, 店幕)를 들 수 있다. 점사는 원이 피폐된 이후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일반 여행자의 편의시설은 임의적으로 일반 민가가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