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무기명 투서를 제보한 판관을 파직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 민족성이 나쁜 점을 거론할 때 그 원인을 항상 일제나 군부독재 시절의 영향이라고 강변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는 지금 연간 고소고발 건수가 세계 최고이다. 근래 몇 년의 평균치만 해도 연간 40만~50만 건 내외에 달한다. 인구 1만 명당 80건 정도인데 일본은 1만 명당 평균 1.3건이다.
우리나라는 사기 사건도 세계 최고다. 자동차 사고, 자살률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나라가 됐을까? 이것이 일제나 군부독재 탓인가? 아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우리 국민의 특징이다. 일종의 민족 성향 때문이다.
조선에서 횡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무기명 투서'였다. 무기명 투서를 조선에서는 '무명장'이나 '익명서' 혹은 '흉서'라 불렀다. 얼마나 무고가 많았는지 조선 초기 태종 10년 4월에 '무고 금지법'이라는 것을 만들고자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렸을 정도이다. 고자질하는 풍속이 성행하여 사람을 해치려고 무명장을 보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정조는 무명장을 보낸 자가 붙잡히자 본보기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간청을 만류하고 가장 먼 섬에 유배를 보냈다.
1504년 연산군 10년 7월 19일 새벽, 도승지 신수영의 집에 한 사내가 찿아왔다. 그는 제용감 정(正) 이규의 심부름을 왔다면서 서찰 한 통을 전달한 후 사라져 버렸다. 제용감이란 모시 등 피복과 그것의 염색, 그리고 인삼 등을 관장하는 부서다.
그걸 열어본 신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연산군의 처남, 즉 왕비의 오빠다. 언문으로 되어 있는 그 편지는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었고 내용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곧장 대궐로 들어가 연산군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서찰의 첯 표면에는 무명장이라 쓰였다. 그 내용은 궁 안에 근무하는 의녀 몇 사람이 모여 은밀하게 나눈 대화록인데 그 의녀들의 이름은 개금, 덕금, 고온지 등이다.
그들이 대화록에는
첯째, 개금이 "옛 임금은 눈앞이 잘 안 보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이렇게 파리 죽이듯 하는가?"하고 덕금이 "반드시 오래 가지 못 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말하는 것이 심하였으니 이런 계집들을 일찍이 징계하여 바로 잡으소서.
둘째, 다시 그들이 개금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우리 옛 임금들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여색이라면 정신이 없어서 기생이건 의녀건 악사건 모두 다 후정에 들이려 하니, 우리 같은 것들도 필시 모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무도한 임금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셋째, 그들이 다시 모여 말하기를 "신씨 일가 때문에 사람들의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이떻게 해야 신씨의 아비, 할아비, 아들, 손자를 모조리 없애 씨를 말릴 수 있을까? 우리 임금은 신하를 많이 죽여 놓고도 행차할 때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이 사대부들의 아낙을 엿보고 제 계집으로 삼으려 들고 있으니 어느 때에나 이런 왕을 바꿀 수 있을까?"하였다.
세 여인의 말을 기록하고 있지만 내용의 핵심은 왕을 욕하는 투서였다. 연산군은 즉시 계집들을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의녀들은 끌려왔으나 도대체 그런 일도 없었고 서로 만난 적도 없다고 부인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이규를 불러서 네가 무슨 글을 신수영의 집에 보냈느냐 추궁하였지만 그 역시 아무 상관이 없었다. 범인을 잡으려고 소동이 한창이던 와중에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처음에 신수영의 집에 서찰을 가져왔던 자와 비슷한 용모의 한 청년이 수구문 앞에서 어떤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더라는 것이다.
성안이 발칵 뒤집혔다. 왕의 명령으로 각 성문이 모두 닫히고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또 창의문부터 동소문 성 위까지 내관들이, 창의문에서 돈의문, 남대문,남산, 동대문, 동소문 성 위까지는 군사를 파수 세워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장 오늘 안으로 잡아 오라고 연산군은 길길이 뛰었다. 현상금도 내걸었다.
"범인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전 재산과 면포 5백 필을 주되, 직첩이 있는 자는 즉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직첩이 없는 자는 정 3품의 직첩을 주고, 천인이면 양인이 되는 것을 허가하며,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참하여 재산을 적몰시키고, 모의에 참여한 자라해도 자수한 자는 죄를 면해 준다." (연산군일기 10년 7월 19일)
가가호호, 수색을 실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성문을 닫아 땔감이 끊어지고 밖에서 들어 왔던 나무꾼들, 가난한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이 생겨났다. 신하들이 성문을 열어주자고 간청했지만 연산군은 고개를 저었다.
"내 비록 구중궁궐에 있다 할 지라도 어찌 그런 폐단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죄인을 꼭 잡기로 하였으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눔 때문에 이 같은 페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래야 다투어 잡아 바칠 마음이 생길 것이다. 또 앞으로 그런 무도한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거 아니냐. 아직 문을 열지 말고 그대로 두라."
용의자가 여러 명 잡혀 와서 조사를 받았지만 모두 범인이 아니었다. 성문을 결국 보름 만에 다시 열리고 이 사건은 종내 미제사건으로 남아 해결되지 않았다.
1727년 영조 3년 12월 16일
전주 시장 어귀에 왕을 비판하는 벽보가 한 장 붙었다. 전라감사 정사효는 사건보고와 함께 그 벽보를 조정으로 올려 보냈다.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보고 내용은 홍역의 무리가 임금을 모함하는 무도한 말로써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심을 광혹케 한다는 것인데, 영조와 조정대신들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이미 얼마 전 중국의 칙사가 도착하는 연은문 앞에 걸었던 벽보와 내용이 비슷했다. 영조 때에도 왕조에 대한 불만의 뿌리가 깊었던 모양이다. 사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얼마전 드라마 '동의'로 방영되었지만 숙빈 최씨가 입궁 전 만나던 북촌 최고의 활량으로 소문나 있던 양반 김춘택과 섬씽이 있어 출생한 것으로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그가 왕위에 오르자 일부 지방 사대부들 사이에 정통성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등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영조에 대해서 정통성을 들먹이며 '이인좌의 난'까지 발생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조정에서는 범인을 잡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당장 그 벽보를 불살라 버렸다. 그뿐 아니다.
"익명서를 발견하면 물이나 불속에 던져버리라는 것이 법문에 실려 있으며, 비록 부자지간이라도 서로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런 흉패한 글을 감히 상감께 올려 바친 전라감사를 우선 엄히 국문하고 첯 제보자 판관 이석인은 파직하되 앞으로도 절대 관직에 임명하지 말 것이며 범인을 체포하려 들었다간 널리 소문이 퍼지는 등 그들의 계책이 빠질 것이니 체포하지도 말라"고 하교하였다. (영조실록 3년 12월 16일)
애꿋은 두 사람만 이때 혼쭐이 났다.
1513년 중종 8년 12월에도 사헌부에 익명의 고발장이 들어왔다. 이때도 보고를 올린 승지의 처벌을 놓고 한바탕 시끄러웠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무명장의 일은, 절대로 사실로 인정해서는 안 되며 만약 사실로 인정하게 되면 거짓을 꾸미려는 자들이 누구나 다 이런 짓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문에는 이것을 중죄로 삼고 있는바 승지라는 직분을 가진 자가 이를 어겼으니 즉시 법대로 처벌하소서." 하였다. 하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8년 12월 28일)
조선 헌법의 기본인 중국 <대명률>에는 익명서를 보내 다른 사람을 모함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 익명서를 본 자는 그 즉시 불태워야 하며 익명서를 관가에 보낸 자는 곤장 필십에 처하고, 관가에서 받아서 처리하였을 경우에도 장 일백에 처하며, 고발된 자는 죄를 주지 않는다. 무명장 및 이것의 작성자를 잡아 관가에 보낸 자는 관에서 은 10냥을 준다고 되어 있다.
조선의 대전에도 익명서는 비록 국사에 관계된 내용이더라도 부자지간에도 전파해서는 안 되며, 전파하는 자가 있거나 여러 날 동안 불태우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율에 의거해서 죄를 가한다고 되어 있다.
위의 경우에는 왕조를 비방한 투서의 일부인데 그런 방이 내걸린 곳은 주로 서울에서 중국 사신의 숙소인 남별궁, 그들이 들어오는 연은문 등이다. 이목을 끌기 쉽고 평상시 비교적 경계가 소홀한 장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을 내걸고 고위 관헌의 집 대문에 활을 쏘아 보내거나 심지어 책자를 궁궐 담 안으로 던져 넣은 경우도 있었다.
광해군 때 개성에서 발생한 사건.
1612년 광해군 4년 8월 2일. 개성부의 관헌 김덕겸의 집에 책 한권이 던져졌다. 책자와 함께 언문 편지 한 장도 같이 묶어져 있었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그 직전에 김직재 역모사건이 일어나 관련자 수십 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책자는 역모를 계획했던 자들의 총 명단이 들어 잇었다. 그때까지 밝혀진 바가 없던 사람들의 이름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명부에 의해 용의자들의 체포 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주소나 관직도 없이 이름만 나열되어 있어서 정확치가 않았다. 추국청에서도 이건 뭔가 수정쩍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미 사형당한 사람 8명의 명단이 한쪽에 나란히 적혀 있는 것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떻게 그들이 사형당할 것을 몇 달 전에 미리 알고 한꺼번에 이름을 적어 두었느냐는 것이며 김백함의 집에서 어떤 형리가 이 책자를 훔쳤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로부터 몇 달이 지나 이제야 공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책자의 글씨와 그림 및 언문 편지의 필체를 보니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다.
이 옥사는 여러 날 동안 추국하였으나 끝내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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