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관직 진출은 물론 재산 상속권도 없어
조선의 왕 중에서 여자를 가장 많이 거느린 왕은 태종이다. 이때부터 왕은 후궁이라는 명칭으로 여자를 들이기 시작했는데 가장 많이 거느린 순서를 보면 태종-성종-세종-선조-영조가 된다. 연산군도 비등하다.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 외에 16명의 후궁을 두었다. 세종은 그 명성과는 달리 왕후 외에 11명의 후궁이 있다. 성종도 계비와 후궁을 포함하여 12명.
성종, 선조, 영조 모두 10명 언저리지만 물론 이 숫자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헤아린 것인데 <선원록>에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정확한 수는 알기가 어렵다. <선원록>은 왕실 족보이며 자손이 있어야 거기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왕들은 이렇게 많은 후궁을 뒀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18대 현종, 20대 경종, 23대 순조, 27대 순종은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
왕에게 후궁을 더 들이라고 신하들이 채근한 기록도 있다. 1430년 세종 12년 12월에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을 담당하는 부서인 가례도감이 나서서 왕이 빈과 쳡을 더 맞아들이라는 청을 올리는가 하면 세종의 부친인 태종이 대신들을 불러 가로되,
"내가 지난해에 예관의 청으로 인하여 서너 명의 빈과 첩을 들였더니 그들의 가족이 왕실을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게 되면서 아들까지 많이 얻을 수 있으니 마땅히 왕은 한 번 혼인에 아홉 여자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부친의 그런 권장 때문에 세종도 왕후와 후궁 11명에게서 22명의 자손을 두엇다.
왕실이 그러할진대 어찌 사대부들이 따라 하지 않겠는가. 청빈하여 조강지처만으로 살았던 사대부들도 많았지만 밥술 좀 먹을 만하면 누구나 경쟁적으로 어김없이 첩을 두었다. 첩을 많이 두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의 상징이며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첩을 많이 두는 것이 잘 사는 사람의 신분 과시 같은 것이 되어 조선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1960년대까지도 축첩이 남아 있다가 5.16군사혁명 뒤로는 축첩 공무원을 공직에서 내쫓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조선에서 첩의 통계 같은 것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첩들이 낳은 서자의 숫자가 본처가 낳은 자식들보다 숫자가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첩으로 인한 사건은 부지기수로 나타난다.
그때는 천민들이 딸을 낳으면 '1년 농사 지었네'라는 것이 인사말이었다. 딸을 첩으로 보내면 1년 먹을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은 행실이 좋지 않았다. 전 현감 박진남이 첩을 데리고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그 첩을 한번 본 뒤로 임해군이 그 집에 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박진남이 병으로 누워 있는데도 임해군은 박진남의 첩을 데리고 집안 으슥한 곳에서 술을 즐겼다. 술자리가 반드시 초가 다 녹아 내린 다음에야 파했다. 이 때문에 박진남은 병이 악화되어 시골 집으로 갔지만 그의 첩은 따라 가지 않았고 박진남이 죽은 뒤에도 상을 치르러 가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박진남의 장례를 마친 뒤에는 임해군은 그 첩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갔다.
연산군 4년, 왕명을 보면 함경도의 인구가 적어 남쪽의 남자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남아 있던 가족 중 딸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를 엄금하라는 내용이 있다. 아마 남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세종 6년, 종친인 의산군 남휘는 같은 종친 윤자당의 첩 윤이를 간통하다가 윤이가 사촌 집으로 도망치자 뒤따라가 그 사촌 내외를 죽을 지경으로 폭행했다.윤이는 남편이 죽어 상복을 입고 있던 중이었다.
세종 16년, 은진의 수령 이의신은 임천 기생 계추를 데려다가 관아에서 본처와 함께 살게 했는데 관원들이 타투어 계추에게 아첨을 하고 본처와 싸움이 잦아 장 60대를 맞고 1년간 유배를 당하였다.
정종 2년, 종친인 화산군 장사길 형제는 본실과 첩을 모두 거느리고 온천을 다니는데 그 행차가 마치 왕과 같았다.
중종 23년에는 사대부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첩을 훔치니 이를 엄금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는 첩을 두고 무란한 풍속이 만연하였던 것 같다.
첩들이 낳은 자손을 서자라 했다. 이들은 양반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모친이 대부분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대부의 서자일망정 모두 양반이 아닌 중인 계급으로 취급 받았다. 중인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응시를 하지 못한다.
그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관직에 더러 진출하기는 했다.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은 서자였지만 2대에 걸쳐 어의를 지냈다. 그의 부친은 용천부사였고 모친은 찬민 출신이 아니고 역시 서녀였다. 그의 공적이 국가적으로 대단하였기 때문에 왕은 그를 양평군에 봉하고 정1품 보국승정대부에 임명하려 했지만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불가하다면서 반대를 했다. 아무리 공적이 있기로서니 중인 신분을 그런 고위직에 올릴 수 없다고 극렬 반대를 했기 때문에 결국 왕도 생각을 거뒀다.
당시 그런 서자들은 뭘 해서 먹고 살았나 궁금하다.
고려 시대에는 서자들에 대해서 별 차별을 두지 않았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주자학의 귀천의식과 계급사상이 자리 잡아가면서 서자들에 대한 차별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이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 서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여 적자가 아니면 왕위는 물론 사회적으로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자들은 관직은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 재산 상속권이 없었다.
그들은 상놈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양반의 먹물이 튄 계층으로 갓 쓰고 두루마기 입었지만 언제나 열등의식과 저항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서얼의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인 첩의 경우 그 손자로부터는 과거를 볼 수 있게 했지만 합격해도 유학이라 부를 수 없게 하고 문서에 서얼이라는 것을 표시하게 하는 등 하나마나한 시책이 나왔다.
1777년 정조 시대가 되어 절목을 새로 만들었는데 정유년에 만들었다고 하여 '정유절목'이라 불린다. 모두 9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1에서 5조까지는 서얼 체용 상한선과 한계를 규정한 것이고, 6조는 서얼 중에서 숨은 이재를 발탁하는 조항, 7조는 서얼 본가의 문벌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 8조는 서얼이 너무 강성해지는 것을 막는 장치, 9조는 지방 서얼에 대한 배려 등이다.
이런 규정까지 나왔으나 뿌리 깊은 서얼 차별은 별로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모범 사레를 만들기 위해 서얼 중 학문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몇 사람을 추천받아 특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미관말직으로 규장각에 검서관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연구에 전념토록 했다. 이 관직은 9품의 말단이고 오늘날로 치면 9급 공무원 임시직이었다.
그들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들로 명망을 날렸으나 관직은 그것이 한계였다. 규장각에서만 오래 근무하다가 쉰 넘어 겨우 지방 현감을 지내고 또 모함에 걸려 귀양을 갔다가 죽었다. 다른 사람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같은 시기 규장각에 함께 근무했던 이서구와 더불어 '한시 4대가'로 불렸는데 서얼이 아니었던 이서구는 그 뒤로 이조판서, 우의정까지 역임했으니 지방 현감과 우의정의 차이가 당시 조선 시대 서얼 차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개혁 준주였던 정조도 혼자서 서얼 차별을 없애기 위해 갖가지 애를 썼지만 조선 사대부들의 근본적인 인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서얼 차별은 결국 밥그릇 싸움
조선을 통틀어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은 한 둘이 아니다. 또 대부분의 역모사건에는 반드시 서얼의 이름이 들어 있다. 가장 대규모는 임진왜란 도중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사건이다. 그는 같은 서자 출신인 속모관(군량 조달하는 임무) 한현과 더불어 노비, 승려, 농민들을 선동하여 5천의 대군을 모아들였다. 그다음에는 인근 관아를 습격하며 파죽지세로 북진, 한양을 공격하여 왕도 제거할 계획을 세웠지만 진압군을 이끌던 도원수 권율에게 패해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선조 27년에도 서얼인 송유진이 천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실패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조선에서 서얼 역모사건 중에는 대표적인 사건이 '계축년 옥사', 혹은 '칠서의 옥', '여강칠우 사건'으로 불리는 '영창대군 역모사건'이 가장 참혹하다. 여주 근처의 한강을 여강이라 불렀r고 이즈음 여기 자주 모이는 일곱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양반집 서자들이었으며 그들 스스로 '여강칠우'라 불렀다.
여강칠우의 꿈은 훗날 언젠가는 자신들의 이상국가를 만들어 보리라 결의하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나무꾼이나 소금장수 또는 노비를 잡으려 다니는 관헌 등으로 위장하여 화적질에 나서곤 하였는데 강도짓을 하다가 꼬리가 잡혀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처음 문초를 해보니 심지어 금부도사를 사칭하여 부잣집을 털었는가 하면 걸리는 대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부친들은 대개 이미 죽은 뒤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가난하고 관직에 있어도 수문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비참한 역모사건이 이미 드라마나소설로 많이 소개되었다. 그들이 정말 여덟 살짜리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사건을 모의했는지는 당시의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해석은 자유다. 음모의 냄새가 많이 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서자들이 그 시절에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자들의 꿈은 결국 역모라도 해서 조선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신 같은 신분의 사람들도 인간답게 한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고 내왕했던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모조리 끌려와 고문을 받다가 죽고 귀양가고 했는데 그 역시 서자들과 그 가족들이 많았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확고하게 계급 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서자들을 그렇게 차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결국 그것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당시 조선은 전국에 대략 360개 정도의 관아가 있었고 중앙 조정에서도 여러 직책이 있었지만, 예를 들어 승정원 같은 곳도 승지가 여섯 자리밖에 안되었고 의금부 도사 자리도 열 명이 고작이었다. 기본적으로 관직이 적어서 명망가문의 정실 자손들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그보다 훨씬 많은 서자들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해 놓으면 그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조선에서 과거 급제자 수는 문과만 총14, 420명이었다. 이 숫자를 27대 왕으로 나누면 한 왕 재위 시에 500명 정도다. 500년으로 잡아도 1년에 30명 정도, 3년에 90명 정도이다. 왕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줘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직이 한번 들어가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것이 관례인지라 공석이 나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자리도 마련하기 어려운데 수만 명에 달하는 서자들에게까지 일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정권타도라는 것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지만 내면에는 자신들의 입신 영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서자들을 희생시켰다. 그들이 항상 상대 당파를 깡그리 매장시켜버린 것도 결국 이러한 밥그릇 싸움이라고밖에 다른 해석이 불가하다. 결국 서얼도 무시하고 상민들도 무시하고 오직 선택된 한줌의 양반들만을 위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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