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영창대군 역모 사건에 희생된 자만 천여 명
1613년 광해군 5년 영창대군 역모사건 당시 친국 모습을 액면 그대로 재현해본다.
4월 25일, 왕이 서청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참석 대신 전원이 배석하고 왕이 나와 앉은 가운데 비변사낭청이 소리 높여 조인의 범죄 사실과 죄인들의 성명, 전력을 읽었다.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의금부판사 박승종, 대사간 이지완, 형방승지 권진, 그리고 뒷전으로 전 대사헌 이이첨 등이 입시했다.
여강가에서 강도질을 하던 서자의 자식들이 잡혀왔고 그들의 입에서 영창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자백이 나오자 가족 전부와 내왕이 있었던 사람들이 남여노소 가리지 않고 체포되어 친국장으로 끌려 나왔다.
여자인 선이는 나이 21세로 기운이 약해 형장을 견디지 못하고 형신을 정지한 뒤에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었다. 박치의의 처 추옥은 마찬가지로 형장을 가했지만 끝내 아는바가 없다며 기절하였다.
여주목사 심언명이 변계허 등 5명을 잡아보냈거니와 이들 역시 규정대로 형신을 가하였지만 죄를 자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이 이르기를
"낙형(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형)을 가하기 전에 바른대로 사실을 말하면 형을 느슨하게 해 주겠다고 일러라." 했지만 낙형을 받고도 승복하지 않았다.
병조판서이며 의금부판사인 박승종이 아뢰기를,
"서양갑과 심우영 등의 어미.처.자녀.노복들 모두를 먼저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허홍인의 종 덕남에게 형을 가하였다. 그가 4,5번 장을 맞자 입을 열었다.
"창동 김비의 집에서 여러 번 흉악한 모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홍인의 사촌동생 허경생은 형주를 받았는데도 승복하지 않았다.
서양갑의 어미 사경을 신문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았다.
'서양갑을 대좌시키고 그 앞에서 사경을 형추하면서 신문하라."
왕이 이르기를,
'양갑이 만약 바른대로 털어 놓는다면 어미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또 유시하기를,
"그가 승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엄하게 형신을 당하면 죽고 말 것이다. 승복을 할 경우에는 그 자신은 죽을 지라도 어미는 살아날 것인데 어찌하여 바른대로 자백하지 않는단 말이냐?"
양갑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수차례 형신을 당한 사경이 기진하여 양갑에게 말하기를,
"네가 역모를 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 승복을 하거라."
양갑이 불복하고 말하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승복할 수 있습니까?"
사경이 형장을 맞았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사경에게 형신을 가하면서 아들인 서인갑과 서양갑을 좌우에 앉혀서 보게 하였는데 형신이 끝나도록 승복하지 않았다. 이어 서양갑에게 형신을 가했는데 기절하자 중지하였다. 서인갑에게 형신을 가했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형리들이 이미 사경이 기절하여 깨어나지 않자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 늙은 여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서양갑의 누나 경신이 공초를 받았다. 그는 전 승지 윤양의 첩이었다.
"대관의 첩이 되어 본실과 같은 집에서 사는 관계로 한 번도 친정 형제들을 집안에 들인 적이 없습니다. 찿아오면 문 밖에서 잡시 이야기하고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늘 눈물을 머금고 보내곤 했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영의정 이덕형이 아뢰기를,
"경신은 사경과 차이가 있습니다. 법전 안에 여자가 출가하면 연좌율을 적용받지 읺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양갑은 흉악하여 그 어미가 형신을 당하는 것을 직접 보고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데 하물며 누나의 경우야 말해 무었하겠습니까. 형장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이르기를,
"그래도 우선 형추해 보도록 하거라."
압슬형을 받았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양응하가 공초하기를,
"지난번 8월 정협이 종성현의 판관이 되었을 때 서양갑 등 몇 사람이 정협과 함께 숙박하면서 꽤나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즉시 정협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박치의의 어미, 서양갑의 처, 심우영의 처, 심우영이 춘천에 둔 첩의 아비, 서양갑의 형을 모두 잡아들여 심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서양갑의 형 용갑이 공초하기를,
"양방에게 매번 힐책을 하면서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고 하엿습니다. 그러면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사마시나 대과에 급제하여도 고작 해마현감 정도밖에 되지 못하고 구박만 받을 터인데 그깟 과거를 봐서 무엇할 것이오?'하였습니다. 그의 형편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형장을 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좌우에 도열하고 있던 형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사방에서 어지럽게 그를 쳤다. 그래도 꿈틀거리자 그의 허벅지 위에 사금파리를 깔고 그 위에 판자를 올린 다음 두 명이 올라 어이야를 외치며 짓밟기 시작했다. 한참 짓밟다가 군관이 신호하여 내려와 살펴보니 용갑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4월 28일
서양갑이 처음에는 형신하는 과정에서 낙형을 받는 등 참혹하기 그지없었는데도 조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네 차례나 화형과 엄청난 태형을 이겨냈으나 그의 어미와 형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고 난 뒤, 밤에 같이 갇힌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내 어미와 형을 죽였으므로 나도 똑같이 하겠다. 앞으로 온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왕 앞에서 독기를 머금고 부르짖었다.
'이번 역모에 뒤에는 영창대군과 그 어미 인목대비, 그 조부 김제남이 있다."
왕은 벌떡 일어났다. 심문은 당장 중지되고 장내가 싸늘한 침묵으로 접어들었다.
나오지 말아야 할 소리가 나온 것이다. 영창은 여덟살이다. 모친인 인목대비도 서른이 안됐고 외조부인 김제남은 쉰하나다. 이들 부녀.모자지간이 모두 역모의 배후 인물로 정식 거론되고 만 것이니 친국은 당장 중지되었다. 왕의 동생과 모친, 외조부를 모두 끌어들인 것이다.
"저놈을 처형하라."
왕은 한마디를 남기고 들어가 버렸다.
오강의 공추를 받았다. 오강은 오윤남의 아들로 나이 14세였는데,
"나이 어린 아이라서 밖에 나가서 놀기만 했을 뿐인데 집안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양갑에 대해서는 외가로 친척이 되는 것만 들었을 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속임수를 쓰겠습니까."
왕이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리니 압슬형을 무겁게 하지 말고 차분하게 시행하라."
-압슬형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겁게 누르면 사람이 갑자기 기절하고 입을 다물어 인사불성이 되고, 가볍게 누르면 아우성을 치므로 용이하게 실없는 말을 뱉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가볍게 누르도록 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조종조에 비록 이 형벌이 있기는 했으나, 반드시 큰 옥사가 났을 경우에만 괴수 한 두 사람에게 사용했다. 그렇지만 두 번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마다 이 형벌을 사용하는가 하면 심지어 네 번이나 다섯 번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는 곤장을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압슬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강 같은 어린아이가 압슬형을 받았으니, 그가 실없는 말로 거짓 자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실록작성 사관논평)
종성현 말단 판관직에 있다가 압송되어 온 정협이 몇 번의 입슬형을 맏고는 자복하겠다고 하면서 마구 말했는데,
"일찍이 김제남을 사복시에서 만났는데, 그때 말하기를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를 이용하여 군사로 기습하고 이어서 대궐을 치려고 했는데 그러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협이 또 몇 대를 더 얻어맞자 김제남의 자제 및 서인으로 알려진 대신들과 일찍이 원한 관게에 있었던 자 수십 명을 마구 끌어들이면서 말하기를,이들 모두가 서인이거나 김제남 편에 선 사람들로 함께 역모를 했습니다."
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엇다. 정협이 또 말하기를,
"지난해 3월 이정귀, 황신, 정사호 등이 모두 김제남의 집에서 열린 큰 잔치에 참삭하여 역모를 꾀했습니다."
왕은 신문을 중지시켰다. 황신은 그 당시 사절로 명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회수가 아뢰기를,
"서인뿐만 아니라 어느 당이고 간에 충성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뒤섞여 있지 않겠습니까. 이무렇게나 서인에 속한 대신들의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데 이건 뭔가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 날 정협은 말을 뒤집었다.
"어제는 너무도 매를 많이 맞아 정신이 혼미하여 되는 대로 말했습니다. 역모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입니다. 거명한 관헌들은 이름을 알고 잇는 사이였기 때문에 되는 대로 불렀을 뿐입니다."
당시 형장이 가해지자 정협이 또 말을 바꾸었다.
"어제 공초한 것이 사실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이 자가 말을 자꾸만 바꾸고 잇다. 앞뒤의 말이 또한 같지 않다. 다시 형장을 가하여 신문하라."
정협이 또 말하기를,
"처음 공초한 것이 모두 사실입니다."
다시 형장을 가하자
"황신 등이 어떻게 역모를 알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너무나 겁이 나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김상준 같은 사람들도 무슨 배 아픈 일이 있어서 역모를 꾀하겠습니까기타 끌어들인 무인 이수, 이시익 등의 이름을 말한 것은 모두가 허위로 고한 것입니다."
정협은 그날 죽었다. 형장을 받고 기절한 끝에 그대로 죽어 버린 것이다. 그가 살았던 집은 죄가 너무 큰 역적이라 하여 모두 허물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협은 종성에서 붙잡혀 올 적에 김개 등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길에서 그에게,
"이번에 공초할 때 누구누구 이름 있는 재상과 관원들을 많이 끌어들여라. 그러면 죽음을 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관직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협이 형신을 당할 적에 여러 관헌들을 끌어들였는데, 특히 이정귀, 황신, 김상용 등의 서인들은 대체로 대북파에게 평소 증오를 받고 있었던 터였다.- (실록 작성 사관논평)
김제남과 교분이 있었던 전 예조판서 신흠, 판서 이정귀, 전 승지 김상준도 속속 끌려들어 왔다. 자주 만나면서 나눈 밀담 내용을 털어 놓으라는 식이엇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는지 왕이 한탄을 하면서 "죄인이 너무 많구나. 전옥으로 옮겨도 될 만한 자들만 가려서 보고하라."할 정도였다.
소용없었다. 이번에는 김제남 집의 여종들이 줄줄이 끌려와 압슬형을 받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이덕형이 한마디 아뢰었다.
"노비들의 국문은 부당합니다. 옥의 체면이나 국문의 채통을 봐서라도 노비들의 국문은 중지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 정도의 상소도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곧 여기저기서 이덕형이 수상하니 조사를 해야 한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이덕형은 궐 안이 텅비었다면서 한탄을 했는데 그것을 빌미로 얼마 후삭탈관작되고 화병으로 드러누운 후 회복되지 못하고 3개월 뒤에 죽었다.
대사헌 윤효전은 "압슬 고문이 너무 심하여 죄인들이 함부로 자백하오니 잠시 고문을 멈추소서."했지만 역시 탄핵 요구를 받았다.
김제남이 마침내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어도 광해군의 외조부인 처지였지만 손자 앞에서 무릎을 끓고 앉았다.
"신은 성격이 옹졸하여 사람들과 사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인이나 서얼 그리고 관헌들 중에서도 드나들며 절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었고, 밖을 잘 나가지도 않습니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 부원군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늘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맏는다는 두려운 생각을 갖고 한결같이 근신해 왔으며 또 매번 집안에서 청백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손들을 단속해 왔습니다. 신의 마음 가짐과 행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좌우의 여러 신하들과 상하 대소의 관원으로서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는 역모는 부인했지만 선조의 적자인 영창이 왕이 되는 것이 사리로 볼 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답변을 했기 때문에 결국 사약을 받았다. 5월 30일이었다. 그의 자식, 형제나 조카들, 처가 쪽의 일가도 모두 죽거나 귀양을 떠났다.김제남의 아들 세 명과 사위 한 명이 모두 곤장을 맞고 그자리에서 죽었다. 그이 아들 김내에게는 조금 자란 아들이 있었는데, 내의 아내가 은밀히 중에게 주어 상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거짓말로 병들어 죽었다고 하면서 예대로 장사를 치렀으므로 온 집안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록 작성 사관논평)
장님 점쟁이 고성도 끌려와 고문을 받았다. 영창대군이 11세가 되면 이 땅의 왕이 되리라는 점괘를 풀었다는 신고가 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누군가 한 번 묻기에 병인생은 13세가 되기 전까지는 점을 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라고 변명했지만 그 역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비슷한 혐의로 무당 12명이 잡혀 왔다. 영창을 위해 축원 굿을 했다고 누가 일렀기 때문이다.
이 역모 사건은 1천여 명이 죽은 선조 시절의 기축옥사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죽고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고 병자가 되거나 귀양을 간 자, 관직삭탈 된 자, 가문이 파문되어 버린 자를 모두 합치면 역시 1천여 명이 넘는다. 5~6백만 인구에 1천여 명이면 지금으로 치면 1만여 명이 넘는다.
의금부에서 국문이 시작되면 역모나 강도사건의 범인은 먼저 곤장을 쳐서 반죽음을 만든 다음 주리를 트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참혹한 고문과 비명, 피비린내가 모두 덕수궁 마당에서 진행되었다.
덕수궁에 가서 미술을 감상하고 산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귀를 기울여 보라. 그 땅바닥은 피로 절여 있으며 지나간 그 시절의 신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때뿐만 아니다. 조선의 그 숱한 역모 고변으로 붙잡혀 온 사람들은 모두 대동소이한 절차로 고문을 당했다. 아시아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해서도 더 잔인하다. 역대의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어느 정도 잔인했을까?
충청도 해미읍성에 가면 서문 밖에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던 '자리개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리개돌이란 널따란 바위를 말하는데 이 바위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피가 묻어 있다.
칼로 목을 치기에는 너무 사형수가 많기에 이 바위에 사람을 패대기쳐서 죽인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친다. 몇 사람이 사형수의 다리를 들고 휘둘러 그대로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부관참시도 있고 거열형도 있지만 사람을 처형하는 데 이런 잔인한 방법을 쓴 것은 중국에도 그런 예가 없다.
이런 여러 정황을 살펴 볼 때, 과연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자랑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면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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