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이란?
서얼(庶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이 낳은 자손을 말하는 것으로, 양인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또한 서얼의 자손도 서얼로 불렸다.
서얼은 양반의 신분에 속했으나 가정에서 천한 대우를 받았으며 상속권(相續權)도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이 혈통이나 결혼으로 인한 인척 관계로 출세가 규정되었다. 서얼에 한해서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 허용하였으며, 이도 또한 대부분이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귀천의식(貴賤意識), 유교의 적서(嫡庶)에 대한 명분론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제도이다.
서얼은 수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으로 지방의 수령(守令) 등에 승진시키기도 했으나, 영조 때에 다시 서얼에 대한 차별과 관직의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이 같은 제한은 《경국대전》의 금고(禁錮) 및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 《속대전》의 허통금지조(許通禁止條)에 규정되어 있는 바, 1882년까지 계속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서자는 법적으로 양반이었으나, 사회적으로 서자는 양인 또는 중인이었으며, 얼자는 천민 또는 양인의 대우를 받았다. 이는 서자의 어머니는 양인(또는 그보다 높은 신분)이며, 얼자의 어머니는 천민이기에 그에 따라 그 자녀의 신분이 정해졌다. 서자의 어머니가 반가의 여인이거나 중인층의 여인이면 서자의 신분은 중인이고, 그밖에는 양인이었다. 얼자는 그 어머니가 면천하였다면 양인이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인지를 받았을 때(정식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랐을 때)에도 양인이었으나, 대부분 천민의 대우를 받았다.
서얼은 고위 관료로의 진출이나 양반 사회로의 진출이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중종 때 승문원의 이문학관(吏文學官)이나 정조 때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 등 비교적 낮은 지위는 서얼이 독점하였고, 이들은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제술(製述)이나 《일성록》의 기록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아보았다. 이와 같이 서얼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계의 진출은 변변치 못했으나, 학문·문필(文筆)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어숙권(魚淑權)의 《고사촬요(故事撮要)》,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은 서얼은 각처에서 반란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었으며 당쟁에 가담하는 자도 많았다.
명분은 정치·사회 안정… 실제는 양반의 권력독점 정당화
조선 사회에서도 권세깨나 부리는 양반은 대개 여러 여자를 거느렸다. 하지만 그 중 한 명만 정식 부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싸잡아 '첩(妾)'이라 했다. 조선을 명색이 일부일처제 사회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부일처다첩(一夫一妻多妾)사회였다. 그리고 똑같이 한 남자의 아내일지라도 처와 첩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 신분 또한 엄격히 구별됐다.
첩의 자식을 일컬어 '서얼(庶孼)'이라 한다.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수필집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양첩(良妾), 즉 양가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서(庶)'라 했다. 서(庶)는 '여럿'을 뜻한다. 한마디로 덤이다. 또 천한 신분 출신인 천첩(賤妾)의 자식은 '얼(孼)'이라 했다.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바로 얼이다. 첩의 자식이라도 '서' 다르고 '얼' 달랐던 것이다.
비록 양반가의 성씨를 따르더라도 서얼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집안에서는 상속에서 소외됐고, 사회적으로는 관직 진출의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서얼 차별 정책은 1415(태종15)년,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규제가 최초로 성문화됐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확립됐다.
조선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이 법전에 따르면, 아버지가 2품 이상의 최고위층 양반이라 하더라도 양첩 태생은 정3품까지, 천첩 태생은 정5품까지로 벼슬길이 제한됐다. 물론 문과에는 응시조차 할 수 없고 잡과만 허용됐다. 그나마 '경국대전' 편찬 후에는 과거 응시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처럼 서얼의 관직을 제한한 제도를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라 한다.
하지만 적서(嫡庶)차별에 대한 논란은 조선조 내내 끊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인재 활용 측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선두 주자는 중종 때 개혁가 조광조였다. 뒤를 이어 명종 대에는 서얼 출신 문인들이 직접 "양첩의 후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許)하라"고 요구했다. 또 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 명이 비슷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서얼허통(庶孼許通) 운동은 번번이 유교적 명분론에 막혀버렸다.
그러던 1583(선조 16)년. 여진인 이탕개(尼湯介)와 그 무리가 변방을 침입해왔을 때,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李珥)가 계책을 내놓았다. "자원해 육진(六鎭)에 나가 3년을 근무하는 사람은 서얼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공사(公私)의 천인(賤人)은 양민(良民)으로 면천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 세력의 반대로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불어 이이는 동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벗어 던지고 율곡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결국 서얼의 통용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쌀을 징수하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게 했다. 역사적 상황이 서얼허통 운동의 작은 성과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조선시대 서얼차별정책은 끊임없는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주자학의 '명분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여기에 봉건적 신분제도와 귀천 사상이 뿌리를 내림에 따라 조선시대 서얼은 가문 안이나 사회에서 극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 이면에는 고상한 철학적 이념보다는, 권력 독점을 지켜내려는 양반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적 이념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가 앞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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