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동학혁명이 나기 전에도 북쪽 각처에서도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캐나다 선교사 하다는 함경도 함흥과 덕원에서 농민 폭동을 역력히 목격했다. 이유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가혹한 세금제도가 목을 옥죈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여기서기 유령의 마을처럼 텅 빈 마을들이 늘어났다.
그런 헐벗고 황폐한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바로 평양 근처가 그 전쟁터였다. 남의 나라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치렀다. 거리와 강, 들판과 산기슭에는 온통 시체가 널려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당연히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동의보감 수준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의술은 전염병이나 외과 치료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었지만 1892년이라 해도 국내에 들어온 당시 서양 의료기술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화상을 입어 손가락 세 개와 손바닥이 붙어 버린 소녀의 피부 이식에 성공한 닥터 홀의 사례가 있었고 바이러스 퇴치라는 전염병 대책도 가지고 있었다.
188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 해군 군의관 조지우드의 보고서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서울인 한양의 길은 도심지라고 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좁고 진흙투성이였으며 길은 온통 소나 말, 개의 배설물로 뒤덮여 았습니다. 더구나 정상적인 화장실이라는 것과 하수도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배설물도 거리 이곳저곳에 쌓여 있어서 거리를 다니기가 심히 어렵고 누더기에 가까운 헐렁한 옷차람의 사람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개 떼, 짐을 실어 나르는 소와 말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로 양 옆의 시궁창에는 온갖 오물이 흐르면서 표현할 길이 없는 악취로 들어 차 있어서 그날 당장 악성 전염병이 창궐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정경이었습니다." (조지우드 보고서)
언더우드 부인의 글을 좀 더 소개한다. 그녀는 1883년 이 땅에 들어와 15년을 머물렀다. 그녀는 왕과 왕비와도 친해져서 동학교도들을 폭도라고 미워했다.
"서울에 들어와 처음 본 것은 거대한 버섯 단지 같은 나지막한 흙집이다. 그런 집들은 방 한 칸과 창고 한 칸으로 나뉘어 있다. 나지막한 산들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었으며 길 양쪽에는 도저히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시궁창이 흐르고......
조선의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지만 그 일을 털어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드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하고 얼굴은 까칠해졌으며 상처투성이다. 그래서 스물다섯을 넘은 여자들에게 아름다움을 찿는 다는 것은 헛일이다.
궁중의 나인들도 마찬가지다. 중산층이나 천민 중에서 데려다가 밖과 완잔히 격리된 장소에서 오로지 일만 하는 이 불쌍한 나인들은 거칠고 못생겨 동정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그들이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왕비를 진찰할 때 혀를 보려면 휘장을 조금 찟고 그 사이로 혀를 내밀게 해야 한다. 작은 부스럼이 있어서 간단한 외과 수술로 제거할 수 있는 정도지만 칼과 가위를 가지고 곁에 접근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면서 모두 반대했고 왕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조선 사람들은 어떤 잔치에 갔다 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어 치운다. 또 그들은 잔칫날 먹으려고 미리 굶기도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손님에게 손바닥만 한 잔 몇 개와 근사한 접시를 늘어놓지만 음식이라고는 쥐꼬리만큼만 내놓는다. 조선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데 일본은 부자가 되는 이유가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일본에 다녀온 한 선비는 '일본 사람들은 하루에 천 원을 벌면 백 원어치를 먹은데 조선 사람은 백원을 벌면 천 원어치를 먹습니다'라며 한탄했다.
또 원수같은 일본이라 할지라도 부인하지 못할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술과 검소함일 것이라는 한탄도 남겨 놓았다.
조선 사람들은 미신을 잘 믿는다. 평양에는 우물이 하나도 없다. 조선은 한 채의 큰 배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가라앉는다고 철저히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다. 청일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무수히 강물에 떠 있는데도 그 물을 먹고 있었다.
개성 송도의 성문을 모두 떼어 내버렸다. 고려 시대에 이 나라 서울이었던 곳인데 여기에 왕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성문을 달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을 철저하게 미워하고 있는 듯하다. 도망친 범죄자들이 산적이 되어 도처에 널려 잇으며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보면 가치 없이 폭행하고 물건을 뺐었다. 일반 백성들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았고 그들은 관헌의 편이 아니라 모두 그런 산적들 편이었다." (언드우드 자료집)
다블뤄 주교의 기록으로 그런 종류가 상당히 남아 있다. 백성들 뿐 아니라 사대부들에 대한 평가도 매섭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가혹한 폭정을 가한다. 돈이 없으면 평민에게서 착취, 약탈, 불법구금 등을 자행하는데, 그런 것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 관리나 수령 등 양반들은 논이나 집을 사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습이다. 조선에서 가장 못된 착취계급은 바로 양반이며 조선의 왕이 백성들을 잘 통치하려 해도 양반계급이 중간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황령과 착취를 일삼았다."
그는 또,
"조선의 국왕은 인간적인 마음씨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선량한 사람이다. 국왕은 가진 것이 없고 백성들은 굶어 죽는 데 비해 어떤 대신들은 넘칠 만큼 풍족하게 산다. 권력과 부, 자유를 모두 가지고 깄는 것은 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양반 계급일 뿐이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조선 사람들의 좋은 점들도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상부상조하며 단순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려는 마음씨, 끔찍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윗사람을 섬기는 정신 등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기록들이 훨씬 더 많다.
조선인들은 노동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며 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이마 이런 것들은 양반들은 놀면서 일은 비천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통념 때문으로 보이며 미래를 개척하기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잘못된 교육의 영향도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따끔한 충고 한마디 더.
<전환기의 조선>이라는 선교사 게이의 글 중 일부분이다.
'조선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매사에 정확성이 없고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모레는 그저 어저께와 같은 날이고 약속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신의가 없어서사 아니라 어떤 일에서 정확성을 모르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다. 조선에서 명확한 설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확한 정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리 있고 정확한 정보란 조선인의 정신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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