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0.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구름위 2023. 4. 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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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것은 일본 무사도의 정신이다. 주군을 기꺼이 배신한다. 이것은 조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치적인 해석을 떠나서 초기 외국 선교사의 이런 혹평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기업이건 어떤 조직이건 들어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런 표현이 나왔던 것은 고종의 말년에 왕이 보여주었던 조선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 때문이다.

 

"조선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소." 고종이 남긴 말이다. 가히 한 나라의 국왕의 표현치고는 비참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역사가들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허약하고 무능한 왕으로 고종을 꼽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험난한 시대에 가장 고통이 많았던 불행한 왕이 고종이다.

 

당시 고종은 대원군과 달리 청나라와 일본보다도 미국과 서양 국가들에 대하여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학교와 병원의 설립을 허가했고 일본보다도 서양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불량배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살해한 것은 1895년 고종 32년. 그 후 조선은 일본의 조종대로 친일 내각이 세워지고 고종은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민비 다음으로 자신이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고종은 푸트 공사의 뒤를 이어 새로 부임한 허드 미국 공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허드 공사가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다.

"내 괴로움이 많소. 발뻗고 편히 잠자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구려."

 

고종은 일찍이 어떤 외국인에게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밤이 되면 두렵소.낮에도 마찬가지지만 밤이 되면 더욱."

 

초췌해진 고종황제는 놀랄 만큼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내가 언제 어느 순간에 곤경에 처할지는 알 수가 없소. 왕궁 안팎에 온통 나를 해치려는 무리들만 넘쳐 나는 것 같아서 밤중에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잠이 깨곤 하오."

 

고종의 그러한 어록은 미국의 문서에 남아 있다.

"이미 이 나라는 적과 적으로 나뉘었고 청나라와 일본을 추종하는 세력들로 또 나뉘고, 이제 짐은 누가 내 편이고 누가 반대편인지도 모르겠소. 나는 조선 사람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소."

 

허드 공사와 의사 알렌이 상의를 했다. 그들은 일단 왕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 군대가 임시 경호를 맡아주겠느라고 제안을 했더니 고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나 군대보다도 미국 군대를 더 신뢰한 것이고 게다가 놀라운 제안을 했다.

 

만약을 위해서 미국인 의사가 곁에 있어 달라고 청한 것이다. 당시 미국 의사들은 모두 선교사였다. 이때 기록을 보면 미국인 선교사, 즉 의사 두 사람이 1개조로 하여 권총을 품고 매일 밤 고종의 침전 옆에서 곁을 지켰고 미국 해군 50명이 왕을 경호했다.

 

아무리 쇠망해가는 왕국이라 할 지라도 왕의 주변은 엄중한 경호군이 배치된다. 어영대장을 비롯하여 고위 대신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모시겠다고 나섰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조선 경호병 대신에 미국 경호병을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가슴에 총을 품고 고종을 근접 경호하면서 곁에서 밤을 세웠다. 언더우드, 헐버트, 아펜젤러 등이었다.

 

왕은 부친이나 그의 친형도 믿지 못햇다. 외국 사절들과 대담하던 중에도 친형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애기를 중단해 버렸다. 대원군이 고종을 폐위시키고 다른 아들의 자식으로 새 왕을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왕은 감시자가 있는 데서는 대충 얘기를 해놓고 언더우드가 돌아가려하면 그의 손에 작은 쪽지를 쥐어 주곤 했다.

 

그는 대궐 안에서 올리는 음식도 먹지 못했다. 독살의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철저하게 협박당하고 있음. 그의 생명이 위기에 처함." 이것이 당시 미국 공사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의 내용이다.

 

왕은 삶은 달걀이나 그의 눈앞에서 직접 개봉된 연유깡통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듣자 민비와 특히 가까웠던 러시아 공사 부인과 릴리어스 언더우드 부인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음식을 장만했다.

 

이 음식들은 커다라 양철통에 담아서 자물쇠로 채운 다음 고종에게 배달되었다. 열쇠는 언더우드가 매일 가지고 들어가서 고종에게 전해 주었다. 한 나라의 국왕치고는 참으로 너무나 눈물겨운 노릇이었다.

 

고종은 이런 상황을 탈피하려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탈출 작전을 시도했다. 선교사들과 일단의 외교관들, 그리고 함께할 대궐 밖의 신하 몇 사람이 궁궐에 들어오면 시위군들의 호위 아래 왕이 밖으로 빠져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추수감사절 밤에 시행키로 약조가 되어 1895년 11월 28일 새벽 0시 선교사들과 장교 몇 사람이 대궐 안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하면서 친위병력을 기다렸지만 가담키로 했던 이들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나타난 것은 총리대신 김윤식과 군부대신 어윤중이었다. 그들이 고종을 끌고가려 하자 고종과 세자는 선교사들의 팔을 붙잡으며 도와달라고 고함을 질럿다.

 

왕을 구출하러 오기로 했던 시위대는 조선군들이 체포하려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져 미국과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의 밀고자는 구출작전에 가담하였던 이진호였다. 그는 구출작전의 비밀 계획서를 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보여 주었으며 정확한 세부사항을 알아보려고 태연히 선교사들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배신자 이진호는 그 후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4년 후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이었던 거금 5천 원을 황령한 혐의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고종은 결국 한 많은 생애를 살다가 죽었으나 그의 죽음이 단순 사망이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지금 유력하다. 시체의 급격한 변질, 독살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는 증언들이 해방 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혈족도 신하도 아무도 믿지 못한 조선 왕, 오직 외국 선교사들밖에 믿을 수 없었던 조선 왕, 왕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배신했던 신하들, 이것이 한말 난세의 가장 뚜렷한 증표일 것이다. 미국은 이때 고종이 물이 가득 든 항아리를 혼자서 들고 있는 고독한 왕이라고 불렀다.

 

이는 결국 나라가 힘이 없슴이며 국운이 다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형제를 믿지 못했으며 부인마져 흉악한 왜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나라의 국왕. 신하를 믿지 못하고 궁녀와 주변 인물 누구도 믿지 못했던 국왕. 그래서 남의 나라 외교관에게 의지하여 경호를 부탁하고 음식을 시켜먹는 국왕. 그래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어찌 한 나라의 국왕이란 말인가. 국왕을 경호하는 군사는 다 사라지고 없고 주변에는 국왕을 감시하며 언제라도 목숨을 노리는 무리들로 가득차 있는 궁궐, 이것이 어찌 국왕이며 어찌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인가! 그때가서 지난 날을 한탄하고 원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아! 가련하고 불쌍한 조선의 불행한 마지막 국왕 고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