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2.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구름위 2023. 4. 1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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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우리나라 사대부 중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이 바로 황희 정승이다. 그는 21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31세에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지만 결국 강권에 의해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1418년 충녕대군(세종)이 장자를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갔다. 남원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니 상당히 오래 고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뜻밖에도 그를 불러 올려 중책을 맡겼다.

 

이후 18년 동안 그는 명제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오늘날 조선의 청백리로서 맹사성, 퇴계 이황과 더불어 한국의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고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은 18명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첯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황희이다.

 

그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고 그 뒤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지어 집들이를 하였다. 말이 집들이지 거하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했다.

 

잔치를 시작하려 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자면 뇌물을 받았음이 분명하지 않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 앉아 있기가 민망하다."

 

그리고 그는 음식도 들지 않고 바로 나가버렸다. 요즘 같으면 미리 아들이 집들이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집을 호화롭게 지었다면 야단을 치던가, 아니면 미리 그런 집들이를 하지 못하게 했어야 할 것이나 황희는 당일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장소에서 분연히 일어섰다는 것도 좀 이상하다. 쇼 맨쉽이 강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 집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

 

그는 농사 개량, 예법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의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인간적인 일화가 무척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를 데리고 밭갈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황희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이보시오. 두 마리 중에서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오?" 무심코 물었더니 농부는 귓속말로 "검정소가 더 낫습니다."

 

황희가 이상하여 "아니 그냥 말하지 왜 귓속말로 하는거요?"

 

농부는 조심스럽게 "동물을 말을 못하지만 듣는 귀가 있지요. 비록 집승이지만 남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황희는 농부의 말에 감탄하고 평생 그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근검절약으로 살았다. 부인은 속옷 하나도 변변히 없어서 딸과 교대로 입었다는 일화가 있고 비가 새는 초가에서 비가 오면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집들이 문제로 아버지의 분노를 샀으니 제대로 교육을 못시킨 것 같다. 그는 영의정까지 살면서 겸손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자취는 여러 군데서 오늘날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죽고 나서 보니 상복도 한 벌밖에 없어서 일가가 나서서 상복을 겨우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맏아들 놈은 무엇했는지 궁금하다.

 

이런 황희에 대해서 좋지 못한 폭로고발이 퍼졌다. 황희가 청백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파렴치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록의 일부 자료를 제멋대로 인용하여 해석하면서 만들어낸 이야기다.

 

세종 시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그 내용은 이렇다.

 

황희는 아들도 많고 딸도 많았다. 사위 중 한 사람이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 서달이다. 당시 황희는 좌의정이엇다.

 

서달은 자신의 모친을 모시고 신창현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지금의 충남 아산군에 있던 고을이다. 그 때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부인이니 양반 행차가 분명한데도 아전 한 사람이 빤히 쳐다만 보면서 목례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또 위아래로 쳐다보는 등 시선이 곱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서달은 지현사 직책이었는데 이 직책은 5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현감과 비슷한 것이다. 불쾌해진 서달은 하인을 시켜 그 아전을 불렀다. 그러나 아전은 오기는 커녕 산모퉁이를 돌아 줄행랑 쳐버렸다.

 

하인들이 아전을 쫓아가다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찿을 길이 없던 차에 다른 아전 한 사람이 오자 그를 대신 잡았다.

"방금 도망치던 아전이 어디로 갔는가?"

"내가 알게 뭐야?"

그러자 시비가 붙었다.

 

하인들이 숫자가 많았다. 셋이 달려들어 그 거만한 아전을 패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표운평이라는 다른 아전이 다시 나타났다. 그 장소는 아마 신창고을 어귀였던 모양이다. 하인들이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표운평이라는 그 아전이 호통을 쳤다.

" 이 상것들이 어디서 관아의 아전을 때리느냐. 네놈들이 관원이라도 된다는 거냐? 네놈들 주인이 누구냐? 당장 주인을 보자."

 

하인들이 흥분하여 표운평을 대신 끌고 서달에게 돌아왔다.

"이 놈이 감히 어르신에게 욕설을 하였습니다."

 

서달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놈 혼을 내주어라." 호통을 치니 하인들이 다시 덤벼들어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해댔다. 매를 맞은 표운평은 다음 날 그만 숨지고 말았다.

 

그러자 일이 커졌다. 이 사실을 표운평 가족이 충청감사에게 고발하니 조사관이 신창현으로 내려와 전말을 캤다.

 

폭행을 직접 한 것은 하인들이지만 지시한 사람은 서달이다. 보고를 전해들은 황희는 난감해져서 우의정 맹사성을 찿아갔다.

"대감의 고향이 신창 아니오? 거기서 내 사위가 실수를 저질렀는데 좀 도아주시오."

 

두 사람은 세 살 터울이지만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더구나 서달은 형조판서 서선의 외아들이었다.

"심려 마시오, 신창현감은 내 잘 아는 사이니 연락하리다."

 

서달이 직접 나설 수가 없는 형편이라 동서 한 사람이 적극 나서서 피해자의 형과 화해를 벌였다. 다행히 화해장을 받아내서 제출하고 여기저기서 잘 봐 달라는 청탁이 들어오니 신창현감과 감사는 이 모든 책임을 매질을 했던 하인들의 책임으로 몰아서 보고서를 형조로 올렸다.

 

형조 역시 꾸물거리다가 최종적으로 하인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누군가가 왕에게 이런 사실을 모두 일러바쳤다.

"황희의 압력으로 억울한 아전을 더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그들 일파를 모조리 엄벌하소서."

 

이에 왕 세종이 진노하여 황희, 맹사성, 서선을 의금부 옥에 가두고 형조참판과 대사헌을 비롯하여 서달을 봐준 관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사건의 제공자인  서달은 그 죄가 교수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외아들이라 교수형은 면했다. 그는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갔으며 황희, 맹사성, 서선 등을 비롯해 관련자들은 모조리 파직되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된 듯하지만 뜻하지 않는 보고가 올라왔다. 힘없는 아전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판서 허조는 판부사 변계량의 경우를 들어 당시 아산군 일대에 흉포한 민정을 보고했다. 

 

변계량은 부친이 그 지역 관찰사를 역임한 집안이었는데도 부인이 그 지역을 지나갈 때 말 탄 기병을 포함하여 50여 명의 인근 무뢰배들이 부인을 희롱하며 만류하는 하인들을 구타하는 등 불량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으며 그런 자들이 그 일대에 넘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건 당시에도 서달이 황망한 나머지 신창현감을 찿아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역시 수십 명의 무뢰배들이 쫓아와서 관아 안에서 서달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면서 심지어 발꿈치에 활을 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당시 관아의 무력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역 아전들이 공공연히 그런 무리들을 부추기고 있어서 행패가 커지고 있다는 보고에 세종은 다시 대노하여 황희의 파직같은 것은 없던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황희에 대한 고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가막히는 것이 황희는 청백리이며 찟어지게 가난하게 살아도 첩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서자 중 황중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궐 내 한직에 근무하면서 도적질을 자주 했다. 금패물 등을 몰래 빼돌려 황희의 장자에게도 나눠주곤 했는데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면 황희는 황중생을 파문하고 성씨조차 조씨로 바꿔 쫓아내고 말았다.

 

또 황희는 뇌물을 받았으며 무능 관리를 비호하기도 했고 심지어 매관매직을 해서 땅을 받았다. 여자를 몰래 집안에 감추어 두고 치정을 일으켰다는 고발 등이 쉼 없이 보고되었다. 이런 내용들은 황희를 비방하는 쪽에서 단골로 들고 나오는 혐의점이다. <실록>의 기이한 점은 황희의 반론은 한 줄도 없이 비방하는 쪽의 내용이 장황하게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쪽을 믿을 것인지는 각자 판단에 달린 것이지만 이후 황희는 9년 동안 처벌론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하여 9년 전 사건을 거론하면서 끈질기게 처벌을 요구해온 것이다.

 

황희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를 한 것은 남원부사로부터 기름 먹인 우산을 한 개 받은 것이 전부다. 남원부사가 여러 사람에게 우산을 보냈지만 뒤늦게라도 밝힌 사람은 황희 한 사람뿐이었다.

 

포악무도한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던 한 여인이 피신하여 황희의 집으로 와서 잠시 토굴에 살다가 떠났는데 그것이 치정사건으로 소문이 나 버렸다. 여인을 집안에 숨겨두고 정분을 나누었다는 식이다. 원래 소문은 이런 식이다.

 

황희가 죽고 단종 때 <세종실록>이 편찬되었는데 정인지와 성삼문 등 편수관들이 실록을 검토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황희에 대한 모든 기록은 이호문의 사초를 그대로 올려놓은 것인데 이호문의 사초를 보니 다른 종이는 빛이 바래 누런데 황희 편만 하얗다. 이것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근래에 추서를 한 것이 분명하니 삭제함이 옳다." 성삼문이 한 말이다.

 

"내가 이호문과 한때 사림에 같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미친 것 같고 어지러워 족히 따질 것도 없소."

이것은 같은 편수관 김맹헌의 말.

 

"황희를 비하하는 이런 내용은 일찍이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쳐서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의논해야겠소." 

정인지가 그렇게 나섰고,

 

허후는 

"나의 선친께서 항상 황희 대감을 칭찬하고 흠모하면서 존경하여 마지않았다. 사람됨이 도량이 매우 넓으며 희로를 잘 나타내지 않았다. 관직 30년에 진실로 욕된 이름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맏아서 재물을 늘렸겠는가? 자식의 문제는 부끄럽기는 하지만 부모가 책임을 질 수가 없는 것이며 여자관계라는 것도 다른 외인들은 아지 못하는 것인데 이렇게 외인이 다 아는 것처럼 적어 놓았으니 황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삭제에 찬성하였으나 정창손, 황보인 등이 반대했다. 명백한 일이라 삭제해도 무방하지만 한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뒤따라 올 폐단을 막을 길이 없으므로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때문에 결국 그대로 그런 기록이 남았다.

 

우리나라가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보다는 매장에 더 쾌감을 느끼는 민족이라고 평가를 받는데, 그렇다면 그런 정신은 조선에서 이미 만개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