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
사람은 돈과 권력을 쥐어보면 금방 그 사람의 본성과 됨됨이가 드러난다. 그것이 없을 때는 모두 지엄환 우국투사요 정의의 화신이지만 정작 손에 그러한 것들이 들어오면 금방 변하고 만다. 어제의 인물이 아닌 것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둘을 떼어 놓고 보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면 금의환향이나 다름없었다. 권럭과 재물이 한꺼번에 생기는 자리였다. 지방 수령은 세금을 거두고 거기서 자기 녹봉도 챙긴다. 서울에서 녹봉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부패 고리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는 누구일까?
보통 알려진 바로는 동학혁명 발발의 원흉인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일 것이다. 그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민중혁명인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원인제공자로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탐관오리의 대표주자로 남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농민들을 등쳐먹었는가?
그는 당시 왕비였던 민비 일가에서 뇌물 7천 냥을 주고 군수 발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조선의 마지막 국모 민비는 일본사람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명성황후를 기리는 드라마나 연극, 영화 등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미안하게도 실상은 조선 망국에 앞장에 선 사람 중 민비는 단연 으뜸이다. 당시 민씨 일족들이 대원군부인 민씨와 민비를 등에 업고 저지른 매관매직과 부정부패의 만행은 단연 압권이다. 그들은 권력을 농단하고 매관매직은 물론 노른자위 자리로 정평 나 있던 평양감사 대부분을 민씨 일족들이 돌아가면 해 먹었다.
평양감사 자리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선망받던 자리인데 유명한 평양기생을 끼고 연일 잔치를 벌이며 흥청망청 보내면서도 막대한 뇌물을 챙기던 그런 자리였다. 한마디로 나가면 백만장자가 됨은 물론 관리로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노른자위 자리였던 것이다. 결국은 한수 이북 땅의 모든 관리들을 통제하며 뇌물을 챙기고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농민들을 수탈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조병갑은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부임하자마자 관아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농민 수탈 작전에 들어갔다. 이것은 동학혁명시 봉기한 농민들의 요구사항에 '수령에게 아첨하고 뇌화 부동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라는 것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수탈작전 첯 단계로 각종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했으며 돌째로 이미 저수지가 있는데도 새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저수지 물을 사용하면 사용료를 징수하면서 양곡 7백여 섬을 착복했다. 셋째로 전 태인군수를 지낸 자신의 부친 공덕비를 세운다며 비용 1천 냥을 걷었다. 넷째 역시 농부들을 강제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한 다음 추수도 나오지 않았는데 강제로 쌀을 징수했다.
사실 이 액수는 별것이 아니다. 당시 쌀 시세가 한 가마당 2~4냥 정도였으니 다 합쳐도 그다지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서 동학혁명 발생 원인의 하나로 백성들의 흉포해진 것을 들고 있는데 아마 그것도 분명히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이미 이보다 앞서 진주에서 농민들의 민란이 발생한 터이고 그 뒤 30년간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백여 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런 것 자체도 상당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 봉기는 동학혁명으로 발전되어 이십만 명 이상의 거대한 농민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로 대부분 괴멸되고 말았다.
한 사람의 생애가 초지일관 탐관오리로 기록된 인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려내기도 무척 힘들다. 암행어사의 사찰로 탐관오리를 많이 적발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탐관오리의 실체는 시작과 끝을 보면 쉽게 드러난다. 재산가도 아닌 사람이 관직을 거치고 죽었을 때 거대한 가옥을 남기고 명당자리라는 것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자를 지어 유유히 말년을 보냈다면 탐관오리나 진배가 없을 것이다.
어디서 그 돈이 생겼는가? 조선의 관헌들은 당상관이라 해도 받은 녹봉은 별것이 없었다. 대부분 공짜로 땅을 하사받고 다시 그것을 늘리고 노비들을 늘려서 부를 쌓았다.
선조 때의 이이첨은 광릉 참봉부터 말직을 전전하던 사람이었는데 광해군들어 일약 세력가가 되었다. 그는 성균관의 수령도 겸직했는데 유생들이 밤낮으로 그를 에워싸고 다녔으며 그의 집에는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선물을 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조선 관료들 중에서 가장 거액을 착복한 사람은 조병갑이 아니라 고종 때의 백낙신이다. 그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진주목사 홍병원과 결탁하여 벼 5만 2천여 석, 돈으로 환산하면 15만 6천여 냥을 착복했다. 조병갑에 비하면 엄청난 큰 액수였다.
그 결과 1862년 진주 백성 8만여 명이 들고 있어났는데 이를 '진주민란'이라 한다. 진주민란은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찰종 말년에 일어났으니, 그 당시 조정이 정신을 차렸더라면 동학농민전쟁까지 30년 동안 얼마던지 부정부패의 뿌리를 뽑을 수도 있엇을 것이지만 안동 김씨 세도 정치는 가문의 영광만 생각했지 백성들이나 나라를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학혁명 뒤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아 겉으로 보기에 엄청난 개혁 정치를 시도한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대원군은 부정부패의 근원이 무엇인지 밑바닥 생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권력을 잡자 그도 닥치는 대로 뇌물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세 가지 큰 폐단이 있으니, 충청의 사대부와 관서의 기생, 그리고 호남의 아전들이다.'
대원군이 그런 와중에 남긴 말이다. 호남의 아전들이 얼마나 추악했는지, 또 평양의 기생이 부정부패의 근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충청도 양반이 부정부패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기생은 북에서는 평양, 남에서는 진주기생이 으뜸이었으니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기생들은 한결같이 관헌들, 관료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범람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호남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도 호남 아전들의 횡포가 그 근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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