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48.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구름위 2023. 4. 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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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지금도 전국 도처에 남아 있는 각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라는 것이 있다. 백성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사또의 은덕을 기려 세워준 비석들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수령이 자비와 성실로 백성들을 다스려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들이 상당수가 수령들이 그 고을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세운 비라는 것이 드러났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으나 그런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왜 그런 비를 세운 것일까? 암행어사나 관찰사들이 자신의 공적을 인정케 하기 위한 눈속임 증거물인 것이다.

 

그러나 정조 때 안의현감 박지원은 퇴직 후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 공덕비를 세울 경우 달려가서 부숴버리겠노라고 알렸다.

 

탐관오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부터 깨끗해야 한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정의한 기준이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숙종은 인자했고 영조는 검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매정한 임금이기는 했지만 세종대왕 못지않게 문예부흥을 일으킨 임금이자 동시에 경제발전에 성공한 군주였다. 50년이 넘는 오랜 치세를 마감했을 때, 곡창에는 곡식이 가득하여 3년을 먹고도 남을 정도로 비축미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는 평소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스스로 이를 실천했다. 여름에 쓰다 남은 종이 조각을 버리지않고 모아두었다가 겨울이 오면 뚫어진 문을 바르는 데 쓰거나 문풍지로 만들어 요긴하게 썼다. 이 사실이 궁궐 밖으로 흘러나가자 국민 모두가 사치를 삼갔고 공직자는 부정행위를 부끄럽게 여겼다. 왕 스스로 무명옷을 입으니 신하되는 사람들은 감히 비단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776년 정조 재위 기간(1776~1800년)부터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800년대 이후에는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기강이 흐트러졌다.

 

정조는 영조가 이루어 놓는 국고를 바탕으로 개혁군주로 일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권을 잡고 있던 노론 사대부들의 반대로 개혁이 지지부진하여 결국 그가 죽자 노론들이 모든 제도를 다시 원래대로 원위치 되어 실패하였고 또 억울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려 수원성을 쌓아 효자임금으로는 이름이 났으나 국정을 잘 살핀 왕은 아니다.  다음 순조(1800~1834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권력이 안동 김씨에게 넘어 갔다. 그래서 왕은 실권이 없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부정부패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빚어졌다. 다음이 헌종(1834~1849년) 그리고 철종대에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임금 헌종은 1845년 헌종 11년 12월 3일,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로 신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백성의 고락은 오로지 수령들이 잘하고 못하는 데 달려 있다. 또 수령이 잘하고 못하는 것은 전최(수령 평가제도)가 엄하지 않은 데에 달려 있다 하겠다. 그런데 작금에는 이 전최가 사실상 겉치례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래서는 나라 기강이 서 있다고 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 가난한 백성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도 오로지 수령들의 탐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루 빨리 시정토록 하라."

 

역사를 보면 탐관 오리가 없는 시대란 존재할 수가 없겠지만 조선은 오늘날처럼 공무원이 1백만 명이 넘는 시대가 아니었다. 전국의 수령이라고 해봐야 360여 개 군현이 있었으니 통틀어 조정 대신을 합하여 도합 1천 명도 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 탐관오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참 기묘한 일이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과거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공직자 중 청렴하고 유능하고 청렴한 사람은 열 명 중 하나 정도밖에 안된다'고 털어 놓은 바가 있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조선 시대인들이야 오죽했을까.

 

1905년 고종 12년 2월 10일. 내부대신 조병식이 아뢰기를,

"방금 전라남도 순찰사 안종덕의 보고서를 보았는데 '전라남도 관찰사 김세기는 약탈을 끊임없이 하더니 부임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추한 소문이 이미 온 도에 쫙 퍼졌습니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온 도 안의 백성들이 모두 살던 곳을 떠날 터이니 한 시각도 급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황해도 순찰사 정규회의 보고를 보니, '서흥군수 이병훈은 부임하고 5개월 동안 세금을 이중으로 징수하였다고 소문이 나 있으므로 우선 봉고 파직하였고, 금천군수 김현태는 상인 출신으로 능력이 부족한 자인데도 다른 고을의 군수까지 겸임시켜 놓았으니 번번이 출장비를 따로 걷어 착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라북도 순찰사 박제빈의 보고를 보니, '김제군수 경옥은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처럼 무능하여 아들을 시켜 대신 정사를 보게 하고 뒤로는 아전을 시켜 토색질을 거듭하는 것이 확실하여 우선 봉고 파직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원도 순찰사 김성규의 보고를 보니, '홍천군수 유과환은 포학하게 사욕을 채우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에는 민첩하기 그지없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 보니 정사를 하는 데서는 일마다 미루고 그걸 기화로 군교들이 백성들에게 횡포를 일삼으니 가난한 집들이 꼬리를 물고 흩어져 없어지므로 즉시 봉고 파직하였습니다."

 

"경상남도 순찰사 김연식의 보고에 의하면, '진주군수 이용교가 수만 금의 돈을 착복한 것은 각각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다시 따져볼 필요도 없습니다. 온 백성이 그의 파직을 원하고 있으며 산청군수 조유승 역시 수만 금의 돈을 착복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 봉고 파직하였습니다. 거제군수 권중훈은 손바닥만 한 작은 섬에서 전적으로 약탈을 일삼아 탐오한 돈이 도합 6만여 냥이나 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병식의 보고를 받은 고종은 이들 모두의 징벌을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42년 2월 10일)

 

이 같은 보고가 그날 하루에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은 일본에 넘어 가기 전에 이미 안에서 완전히 썩어 가고 있었다.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쓴 해가 1821년 순조 21년이다. <목민심서>에는 수령이 지켜야 할 계율이 적혀 있는데, 그 첯째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라', 둘째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셋째가 '가정을 바로 다스려라.', 넷째가 '청탁을 불리쳐라.', 다섯째가 '사치하지 말고 절약하라.', 여섯째가 '즐겨 베풀어라'이다. 그러나 이런 계율은 이상일뿐 조선의 탐관오리들은 줄어들 줄 모르고 더욱 극성을 부렸다. 그것은 바로 왕을 포함, 지배층이 위로부터 부패하였고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받은 자는 지방에서 수령으로 근무하면서 더 많은 수탈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위로부터 부패한 사회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지배층이 부패하면 그 아래 모든 공무원들이 부패하게 된다. 특히 오늘날 5%의 가진자들이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95%의 서민들을 돈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끼리 부를 향유하고 있다. 또 그들은 사회 권력층 내지 재배층과 결탁하여 정치자금과 뇌물을 제공하고 대가성의 더 많은 재물을 얻게 되어 더욱 치부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층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 그리고 지배층이 부패하면서 망국으로 간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위협,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속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극심하게 부패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시급히 개혁하지 않는 한 망국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을 보는 듯하여 미래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