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2.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구름위 2023. 4. 1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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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 야 이 쌍놈아!"

"뭘 봐? 이 0 쌍놈아! 이 0 쌍놈의 00 같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욕이 바로 '이 쌍놈'이라는 것이다.  여자한테는 놈 대신 년을 붙인다. 어디 가던지 지천으로 널려 잇는 것이 욕설이다. 쌍놈이란 기본적으로 인간 같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 같지 않고 개 같으니까 0 쌍놈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개는 그렇지 않는 동물이다. 절대 충직하고 배신도 없다. 인간보다 더 낳은 면이 수두룩한데 왜 개를 그런 욕설의 기준치로 삼는지 모르겠다. 개보다 더 낳은 인간이 있으면 어디 손들어 보라고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개와 쌍놈이 합성어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잇다. 개라는 동물을 인간의 반려견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때려 잡아먹는 식용 동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천적으로 동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온 적이 없을 정도로 굶주린 민족이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욕쟁이 국가로 욕설이 보통 대화의 필수가 되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을 한다. 그런 욕설을 그들 말로 번역이 불가하다. 외국 사람을 호칭할 때도 그냥 사람이라 부르는 법이 없이 미국 놈, 일본 놈, 중국 놈, 소련 놈, 그런 식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욕은 바보, 머리가 나쁜 놈이라는 뜻이다. 몽골에서도 바보 천치라고 하면 아주 심한 욕이다. 중국에서도 '네 어미를 닷 돈에 팔아라' 정도가 가장 큰 욕설로 껍힌다.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 욕이야말로 세계 여러 나라와 너무도 격차가 큰 최상급이다. 한글이 표현력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하는 학자도 있지만 먹고살 만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는 욕이 발생하지 않는다. 고통과 절망 상태, 증오가 억압의 세월이 오래 계속되면서 욕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생각해서 들어야 하는 은유식 욕이 서양식 욕이라면 우리나라 욕은 직설적이다. 그냥 처음부터 육두문자로만 이어지는 무지막지한 욕설인 셈이다.

 

미친놈이라는 욕도 우리 국민의 입에 달려 있는 일반적인 수식어에 불과하다. 이걸 고상하게 말하자면 정신이상자인데 우리나라는 어디 가던지 정신이상자가 득실거리는 나라다. 

 

조선 후기 쌍놈들의 대화록이다. <경향신문>의 1900년 초기 서울 풍정에 소개되어 있다.

 

성 밖 왕십리에서 주머니 노끈을 꼬고 미나리를 뜯어서 먹고 살던 두 사람의 무심한 대화.

"0할 일 고만하고 밥이나 먹세."

"그래 0 같은거,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자고."

"그런데 야, 0할 반찬이 이것밖에 없냐?"

0자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싸움도 하지 않고 분위기도 평상인데 그런 상소리가 그냥 입에 달려 있다. 어떤 좌중에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름이 떠 오른다면 가장 흔한 호칭은 무엇일까? '야 그 0새끼'. '그 쌍놈의 00'. 친해도 욕설, 미워도 욕설이다.

 

조선의 쌍놈들은 뒤돌아서서 하는 욕설밖에는 양반들에 대한 울분을 풀 기회가 없었다. 그것이 지금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으며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표현은 아주 드문 대신 욕설만 난무하는 이런 환경은 상놈과 양반 간의 대립에서밖에 그 이유를 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골동품 애호가인 안덕환 씨는 좀 특이한 백자를 여러 점 소유하고 있었다. 그분은 새로 들어온 도자기의 내력부터 그려져 있는 그림까지 ㄲ모꼼히 파악하여 정리 보관하고 있는데 몇 해 전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한 백자를 몇 점 들여왔다.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여기저기 전문가들에게 문의해 봐도 모르겠다는 답변이 들어왔다. 보통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주로 꽃이나 새의 그림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용과 동물의 그림, 산수화도 그려져 잇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도자기에는 복숭아 같기도 하고 참외나 호박 같기도 한 기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타원형 물체, 그리고 꽃 수술 같은 형상.

 

그 도자기를 머리맡에 놔두고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깨달았는데 그 그림의 상징은 너무나도 쉬웠다. 타원형 물체는 여자의 하체 부분이고 꽃 수술은 남자의 남근이었다. 그걸 기묘하게 추상화시켜 알아볼 수 없게 해놨지만 모두 그런 형상의 변형이었던 것이다.

 

그걸 만들어서 대담하게 양반 댁에 납품을 했던 것이다. 당시의 도공은 가마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1년 내내 자기만 구웠다. 신분은 천민이엇고 장가도 가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꽃그림이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안반에 모셔두고 잇는 양반들을 얼마나 비웃엇을 것인가. 생각날 때마다 낄낄 웃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상놈들 뿐 아니라 양반들도 욕을 많이 했다.

 

정다산은 그의 저서 <아언각비>에서 욕이라 부끄러움이고 굴욕이다. 우리나라 풍속은 추악한 말로서 꾸짖는 것을 이름하여 욕이라 한다고 정의 했다. 그 역시 우리나라는 욕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 시대에 사대부들로서 추잡한 욕설을 했다 하여 처벌된 사람은 아주 많다.

 

세종 24년 10월 8일 천안에서 70세 된 전 현감 이신은 당시 현감에게 욕을 했다 하여 전 가족이 함길도로 추방령을 받았다. 정조 2년 전 집의 이해조는 욕을 하다가 탄핵되었다.

 

인조 14년, 왕은 대행 왕후를 칭송하면서 그분의 장점은 함부로 불평과 욕설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미 대궐 안에서도 욕설이 난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정 공신 이귀는 욕을 잘하는 잡군자로 찍혔다. 광해군 5년에는 대비전 상궁 응희가 심한 욕을 하다가 끌려간 기록이 있고 숙종 1년에 사대부 이유는 숙모에게 욕을 했다가 귀양을 갔다. 지평 윤상헌은 호남에 출장을 갔다가 심한 욕설을 한 것이 추후에 들어나자 파직되고 말았다.

 

광해군 5년에는 고산에서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포악한 현감을 향해 욕을 퍼붓는 바람에 결국 그 현감이 파직되었고 정조 1년에는 깅진현감이 이웃 고을 수령에게 욕을 하다가 파직되었다.

 

심지어 임금이 욕을 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영조는 형조 아전들에게 죄인들을 매질할 때마다 아 기 쌍놈아 같은 욕을 하라는 기묘한 명령을 내렸다. 한 대 때릴 때마다 '이 육시럴 놈아, 더 맞아봐라' 하며 곤장을 친 것이다. 지체 있었던 양반출신들이 붙잡혀 국문을 받는 도중의 일이다. 나중에 신하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차라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낼지언정 형리들이 사대부들에게 욕설을 해대며 매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상소하는 바람에 영조는 알았다며 화가 나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지만 거두겠다고 했다.

 

궁궐이나 사대부들이 이쯤 욕을 해 댔다면 백성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쟁이 나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떼죽음이 이어지면서 살기 고달픈 백성들의 한은 욕으로 이어지가 마련이다.

 

우리 대학생 한 사람이 미국 어느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옆의 미국인 학생이 장난을 걸어왔다.

"야 너희 나라 기차 있어? 전화는 되냐?"

 

몇 번 그런 조롱이 이어지자 유학생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 새끼 죽여버릴 거야!"

 

순식간에 온 식당은 싸늘한 침묵에 사였다. 장난을 쳤던 그 미국 학생도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들은 그런 욕이 없다. 죽여버린다는 것은 살인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곧 살인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오히려 한국 유학생이 더 당황하여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1980년대 이야기다.

 

우리는  " 0새끼, 콕 죽여버려," 정도는 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 간에도 흔히 쓰이는 일상용어가 되어 버렸다. 친구 사이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사회건 욕이 사라질 수는 없다. 아무리 못하게 해봐야 사회 환경이 고쳐지지 않는 한 잠시 숨어 있다가 다시 흘러나올 뿐이다. 지금을 국가 개국 이래 가장 욕설이 난무하는 시절이라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다. 최고조에 이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욕설의 원조는 결국 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