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1.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구름위 2023. 4. 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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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조선의 왕들은 적자로서 승계를 받았을 경우는 비교적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서자나 차남 등 적자가 아닌 경우는 거의 힘을 펴지 못하고 살았다. 더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왕이 되었다.

 

헌종은 8세, 순조는 10세, 단종 11세, 명종 11세, 성종 12세, 고종 12세, 선조 15세, 중종 18세, 에종 18세, 연산군 18세, 철종 18세 등이다. 세종도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테조와 그 직게인 정종, 태종을 제외하면 정상적으로 20대 중반 나이에 오른 사람은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불과하다. 광해군은 서자의 신분으로 30세가 넘어 간신히 왕이 되긴 했지만 항상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조선에서는 결국 27대 왕 중 일곱 왕만이 정식으로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있엇던 셈이다. 그러나 그중 경종은 4년 만에, 효종도 10년 만에 승하했다.

 

근래 발견된 정조의 비밀서신을 보면 그는 정승 심환지에게 은밀한 서신을 많이 보냈는데, 그중 상당부분은 조정 대신들에 관한 것인데 한 대신을 지목하여 웃기는 놈이라고 비하하고 있다. 그 신하가 왕 앞에서 하는 말과 돌아서서 하는 말이 다른 인간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믿는 신하에게 그런 은밀한 서신을 보낸 것이지만 얼마나 할 말을 못하고 살았으면 그랫을 것인가 측은한 생각이 든다.

 

왕과 신하의 관게가 언제나 그런 대치 상태로 볼 수는 없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왕을 길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했다.

 

첯째가 경연이라는 이름의 공부 시간이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2, 3회도 열렸다. 아침에 하는 경연이 조강, 낮에는 주강, 저녁에는 석강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당대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으로 선정하여 경연청에 속해 있고 강관, 시강관 등으로 불렀다.

 

과목은 주로 유교 경전으로 <소학>, <대학>, <중용>, <예기>, <논어>, <맹자> 등 전부 중국의 책이다. 그곳에서 강관들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이 입회하여 지켜보면서 갖가지 훈수를 놓아 왕을 주눅들게 하는 시간이 곧 경연인 셈이었다. 때로는 왕에게 강론을 해보라 시키기도 했으니 왕으로서는 진땀 나는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만약 강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에는 사방에서 공부를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느냐며 핏잔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서 물론 가르침도 많겠지만 핵심은 우리 모두가 중국 황제의 신하일 뿐이라며 암암리에 자기들이 왕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자신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면서 왕의 존엄성을 깍아내리는 데 열중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중종을 훈계하던 조광조는 6품 시독관에서 5품을 뛰어넘어 4품으로 특진을 했다. 중종이 조광조가 이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그렇게 하자고 하니 중종은 거절하지 못했다.물론 조광조는 당대에 뛰어난 도학자로써 조야에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중종에게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였고 조광조의 철저한 자세와 태도에 중종은 진전리를 쳤던 것은 사실이다.

 

광해군은 왕이 되자 경연을 잘 열지 않았다. 선조의 장례식이 겨우 끝나자 허약체질이었던 탓으로 탈진하여 쓰러진 후 병을 핑계로 경연을 열지 않았다. 그는 왜적과 전쟁을 몸소 겪은 터라 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허한 중국의 학문보다는 전쟁터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고 무엇이 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지 체험을 통해서 익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2년 가까이 경연을 파하자 강원도 관찰사 이형욱이 오만무례한 상소를 보내왔다.

 

"근래에 가뭄, 천재지변 등 여러 흉흉한 일들이 모두 왕이 경연을 멀리하는 등 수신제가에 힘쓰지 않은 탓이다.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라는 거의 악담에 가까운 상소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인정받았던 이정귀는 왕에게 "4민(사농공상)중 선비가 으뜸인데 선비들의 뜻을 읽지 못하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셈입니까?"라며 오만무레한 상소를 올렷다.

 

선비들, 즉 양반 사대부들의 마음을 사지 않으면 왕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그런 말 대신에 '이 나라 백성들의 태반인 상놈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확실히 학문이 깊다는 것과 인품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지식인이라고 큰 소리치고 권세가라고 큰 소리치는 자들치고 인품이나 성품이 후덕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사대부들은 독한 왕 연산군이나 태조, 태종, 세조 치하에서는 할 말도 못하고 지내며 눈치만 살핀 것이다.

 

1828년 충청도 남포현 삼계리에 살고 잇던 조병덕은 양반이었으되 3대가 관직을 못한 탓으로 낙향하여 시골에 살았다.  3대가 관직에 못 나가면 사실상 양반이라고 대접해주지 않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여전히 사대부로 통한다. 비록 몰락하엿다고 해도 노비가 수십 명에 물려 받은 전답이 넉넉하기 때문에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해에 그 집 행랑채에는 떠돌이 과객 몇 명이 잠시 묵고 있었다. 어느날 관아에서 형방이 현감의 편지를 가지고 찿아왔다. 그 편지 내용은 즉, 행랑채 과객이 도적 일당인 거 같아 체포하려는 데 그 전에 그 사유를 먼저 아뢴디는 내용이었다.

 

형방은 조병덕의 부친에게 사유를 전달하면서 허락을 받은 뒤에 비로소 그 무리들을 데려갔다. 이것이 당시 사대부가에 대한 관헌들의 기본예절이었다. 포졸들은 감히 집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한마디로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셈이다.

 

다시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1858년 철종 15년 4월.

 

부친이 타계하고 난 뒤 어느 날 조병덕은 포졸들과 아전들이 우르르 중문 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웬 놈들이냐?"

 

그러나 그들은 상당히 뻣뻣했다. 역시 집 안에 머물러 있는 아무개가 도적의 일당이니 체포하러 왔다는 것이다.

 

"이 고연 놈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가족들과 노비들이 몰려들어 포졸들의 오랏줄과 방망이를 빼앗고 두둘겨서 내쫓고 말았다.

 

관할 부사는 사대부랍시고 감히 공무집행을 방해했다고 대노했지만 그에 맞서 조병덕은 상것들이 감히 사대부 집안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사대부를 모욕했다는 주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조선 후반기 사건이다.

 

조병덕은 한 집안이던 좌의정 조두순에게 이같은 무도한 사건을 알리고 결국 관할 부사도 사건의 확대를 막기 위해 집행을 중지하고 말았다. 결국 명령에 따라 그 집에 들어갔던 포졸들만 처벌을 받았다.

 

조병덕의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대부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을 지언정 명예를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 하영희 <양반의 사생활> -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은 모두 철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방 곳곳에 설치된 서원에서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앉아 백성들을 마음대로 데려다가 매질을 하고 형을 집행하는 등 관헌들도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할 정도로 만행을 일삼는 곳이었다. 국가도 필요없고 사대부들이 저들만의 소왕국인 나라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폐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의 어느 왕도 하지 못했던 것을 대원군이 서원을 대대적으로 철폐한 것이다. 물론 사대부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대원군이 워낙 강하게 밀어부친 탓에 정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양반들의 지조인지 오만인지는 해석이 각각일 것이다. 왜 조선의 양반들은 그런 특권을 누리려 들었을까. <경국대전> 그 어디에도 그런 규정이 없는데도 말이다. 

 

당시 양반들은 집집마다 땅을 사고 팔 때도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돈을 주고받는 천한문서에 감히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교만함으로 그 집안의 노비들이 대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뒤로는 뇌물을 열심히 챙기는 사람들이었다. 가히 그 가식적인 이중성이 돋 보인다.

 

제판도 양반들은 판관의 심문에 서서 답하고 심지어 재판정인 동헌 마당에 나타나는 대신 관아 모퉁이에서 몸을 숨기고 대답하면 아전이 대신 받아서 크게 복창하기도 했다.

 

상놈은 돈을 벌어서 모처럼 기와집을 지어도 둥그런 기둥을 사용하지 못했다. 단지 4각 기둥만 사용할 수 있었고, 또 초가집인 경우는 그나마 4각 기둥도 세울 수 없었고 그냥 구부러진 그대로 써야 했다. 솟을대문도 당연히 금지되었다. 행랑채보다 본채가 더 높은 집은 양반들만이 지을 수 있었고 이것이 조선 사회의 관습이었고 법이었다.

 

상민은 흰 도포도 제사 때만 입을 수 있었고 가죽신도 못 신고 평생 짚신만 신어야 했다.

 

지체가 조금 높은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형틀을 마련해두고 문제가 생기면 아무나 잡아오게 하여 매질을 했다. 관가고 법이고 없었다. 조선 말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족은 자체적으로 큰 옥사를 만들어 놓고 사병인 순사까지 두고 백성들을 별도로 통치했다.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바로 양반 사대부들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로치면 대기업 총수들이 조직폭력배를 고용하여 사병처럼 부리면서 약자들을 데려다가 폭행하고 협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조폭들이 없어지지 않고 먹고 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뉴스에도 나왔지만 어느 대기업 부인이 자신의 남편과 썸씽이 있다는 여자 대학생을 청부살인 한 경우가 바로 그건 것이다. 가진자들의 횡포, 조선의 사대부나 오늘날의 대기업 총수들이나 마찬가지다.이런 상태로는 절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