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8

38.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동학혁명이 나기 전에도 북쪽 각처에서도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캐나다 선교사 하다는 함경도 함흥과 덕원에서 농민 폭동을 역력히 목격했다. 이유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가혹한 세금제도가 목을 옥죈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여기서기 유령의 마을처럼 텅 빈 마을들이 늘어났다. 그런 헐벗고 황폐한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바로 평양 근처가 그 전쟁터였다. 남의 나라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치렀다. 거리와 강, 들판과 산기슭에는 온통 시체가 널려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당연히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동의보감 수준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의술은 전염병이나 외과 치료에서는 거의 속수..

37.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천국, 우물안 개구리 조선 "조선의 양반들은 아주 비열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한 후 3일 동안 부인과 산다. 그런 후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자기 첩들을 두고 그녀들과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엾은 본부인에게는 정절을 강요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가거나 정절을 버리면 관리에게 데려간다. 관리는 그녀를 매질한 후 자기 종에게 줘버린다. 양반집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들이 혼자서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며 우리가 집을 찿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아팬젤러는 1885년 입국 직후 미국 선교본부로 보내는 연례 보고서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잇다. " 서울 거리는 좁고 불결하기 때문에 늘 오물이 널..

36.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조선인들의 악덕 중 하나, '식탐' 조선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세상에서 으뜸으로 예를 알며 효를 숭상하는 뛰어난 문명국가의 지도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문명은 세상천지에 중국뿐이었고 그 밖의 서양이나 일본은 모두 오랑캐였다. 그러면 서양 오랑캐들이 본 문명국가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800년대 이전에도 서양 오랑캐들이 약간씩 들어온 적은 있으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조선 말기가 되면서이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도하려다가 많이 죽고 그 위기를 넘기자 그들은 의료 선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사실 그들 덕에 주사도 놓고 수술도 하는 의술이라는 것을 조선은 비로소 알았다. 그들은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들이 본 조선에서의 인상..

35.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이런 아사자 못지 않게,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 전염병은 조선을 더욱 시체 왕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다. 20세기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1909년 순종 2년 대역이 발생했다는 정도로 실록은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그해 심각한 전염병은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죽은 숫자만 서울에서 1만 2천, 전국적으로는 10만 명이 넘는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어림잡아 8,9백만으로 추정하는 데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전염병이란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유행한다. 가난하여 위생관념이 없으니 전염병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부족하여 씻는 법이 없고 인분을 뿌려 기른 야채를..

34.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2)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나가고...... 이런 처참한 사태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태평성대로 일고만 있는 세종 시대의 기록을 보자. 세종 6년의 지시는 이색적이다. 언제 흉년이 닥칠지 모르니 온 백성들이 도토리를 비축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큰 집은 60석, 보통 집은 40석, 작은 집은 10석을 모아야 했다. 1443년 세종 25년 9월 22일. 힘길도 관찰사로부터 보고가 하나 올아왔다. "함길도는 지난해의 흉년으로 인하여 민간에 먹을 것이 없어 집짐승을 다 잡아 먹었으며 5, 6월 사이에는 기근이 더욱 심하여 떠돌며 빌어먹다가 산이나 골짜기와 시내에서 굶어 죽은 자가 소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4백에 이르며 살아 있는 사람들도 무력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

33.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경신 대기근 때 최소 수십만이 굶어 죽어 불쌍하고 불쌍한 조선 백성들이여. 도대체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나라가 또 있었을까? 세계적인 통계를 알 수 없으니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라는 땅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몰론 사막이나 산악 등지로 된 나라 등 이러한 다른 열악한 나라에 비해서는 그래도 사계절이 있어 그에 비하면 살기는 좋은 편이지만. 그런데 당시 참상을 상상하노라면 몰골이 송연해진다. 이 땅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삼천리 죽음강산이었다. 그런 땅에서 모진 목숨을 연명했던 가엾은 백성들. 조선은 걸핏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게 널린 땅이었다. 한 해는 굶어 죽고 한 해는 전염병으로..

32.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앉은 채로 당할 형세는 아니었는데...... 이 바보같은 전쟁도 아닌 전쟁은 임진왜란이나 똑같이 사전에 충분한 경고가 있었다. 1년 전에 청나라에서 황제가 직접 조선을 치겠다고 통고를 해왔다. 심지어 명군 부총 백등용이 인조를 직접 만나 지금처럼 강경책만 고집하지 말고 청나라의 동태를 잘 실피라고 충고를 해줬다. 군 지휘관이었으니 청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을 터라 넌지시 조선의 갈 길을 귀뜸해 준 것이다. 왜 주제 파악도 못하고 큰 소리만 치고 있느냐는 그런 충고였을 것이다.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황손무도 그동안 명나라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쓴 소리를 내놨다. "간첩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것. 또 조선은 지독한 문민통..

31.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쌍령전투'의 치욕 방어의 강점은 공격군보다 오히려 더 야습이나 기습에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변변한 반격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몇십명 단위의 기습전을 벌여 십여 명을 살상하는 몇 차례 공격을 했을 뿐이다. 그 외에는 그냥 추위에 벌벌 떨며 성안에 갇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양식이 떨어지니 손들고 나와 버렸다. 이 사이에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에서 관군이 도착했다.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몇만 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과연 그들이 군사였는지도 의문이 간다. 그 이유는 '쌍령전투'의 치욕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쌍령전투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관군 동원령에 따라 경상도에서 4..

30.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1)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청군은 어떻게 바람처럼 서울에 당도했을까? "이제 국운이 다했으니 올바르게 죽고 싶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부르짖은 한마디였다. 조선을 통틀어 외적과 대치하면서 왕이 내뱉은 말로서는 가장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었다. 결사항전도 아니고 화친도 아니고 우물쭈물하다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는 결국 조선에서 가장 비겁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636년 인조 14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9년 전에 발생했던 졍묘호란의 2차전이다. 조선은 그때 항복하고 형제지간의 맹약을 맺었지만 그걸 무시했다. 힘도 없느느주제에 약속도 지키지 않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경고하던 후금(청)이 결국 군대를 물고 쳐내려 왔다. 조정에 청나라 대군의..

29.동래성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동래성 전투 동래는 당시 동래도호부로써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1년전쯤에 동래부사로 '송상현'이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정발'과는 달리 문인출신이었다. 동래부사는 경상도 남쪽 반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를 관할하는 자리였다. 물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방어력 개선에 노력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