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8

8.진상품 :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진상품 :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시간이 좀 지나면서 중국으로 보내는 사절들이 점차 관행화되었다. 사절단의 행차는 정사, 부사, 서장관, 종사관, 통사, 위원 등 관속 40여 명 외에 수행하는 비장, 역관 등 수십 명이 따르고 그 외에 가마꾼, 마부, 군졸 등 하속이 있어야 하니 전체 규모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정기적으로 매년 4번씩 가고 그 외에 제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어서 연중 쉬지 않고 가지만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 동지 사절단이었다. 동짓날 전후 간다고 해서 동지 사절단인데 날씨가 추워 서로 가지 않으려 했다. 공물로는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화문석, 종이, 모시, 명주, 금 등을 가져가고 중국에서도 약간의 답례품을 주기 때문에 오고가는 깅이 모두 번잡하기 짝이..

7.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중국이 끌고간 공녀들에 대한 침묵 일제는 우리나라를 36년간 식민지로 삼았다. 거기에 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다. 지금도 일제 36년의 영향이라는 표현이 흔히 쓰이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역사 왜곡이라든지 정치, 사회 등 각 부분에서도 많은 일제 잔존 관습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런데 순서가 좀 뒤바뀐 것이 하나 있다. 36년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청산 작업도 실시되었고 친일파 명단이나 사전도 만들고 극일을 위해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면서도 오백 년 동안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판도 없고 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끌고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하면서도 중국이 오백 년 동안 끌고간 수많..

6.실록은 왕권 견제용 명분의 산물

실록은 왕권 견제용 명분의 산물 모든 기록이라는 것이 단순히 후대에 남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당대에도 지나간 기록을 통하여 무언가 현실을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을 보면 그런 기본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활용할 생각도 없이 그냥 우직하게 기록하고 보관만 해놓은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춘추관에서 열람을 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아 어떤 문제에 국한하여 자료 검색을 한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왕들은 이런 기록을 애초에 싫어했다. 태조부터 실록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도 없었다. 그는 왕이 되어 조선을 개국한 뒤 정도전을 시켜 를 편찬하라 일렀다. 정도전이 편찬한 은 모두 38책으로 내용이 단출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고려 말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5.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기록만 하고 볼 수 없었던 왜 실록을 왕도 못 보게 했을까 조선을 말할 때 어지간히 비판적인 사람도 기록문화가 대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심지어 그것 한 가지밖에 볼 것 없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25대 왕 472년간의 동태를 기록한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진 은 세계에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 숫자는 총 6,400만 자에 달하며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것의 원전이 되는 는 그 방대함이 의 몇 배에 달한다. 총 3,245책이나 되고 글자 수로는 2억 자를 넘는다. 그나마 이것은 현존하는 것이 그러하며 광해군 이전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격으로 왕명의 ..

4.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 년 위선의 역사 "내 어진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 1849년 6월초. 충청감사 김수근이 병조판서인 김좌근을 급히 찿아왔다. 그들은 안동 김씨 집안이지만 한 살 터울이며 사촌형제간이다. 그때 조선의 24대 왕 헌종의 재위 15년째이다. 당시 헌종의 나이 고작 22세. 그는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후손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상감이 심상치가 않으니 전 의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데 가망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왕실의 종친부에서는 긴급회동을 열고 후사를 결정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하전이 낙점될 것 같습니다" 이하전은 완창군 이시인의 아들로 적장자가 없는 현재로서는 가장 가까운 왕..

3.삼천리 금수강산?

삼천리 금수강산?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에게만 이롭다? 1800년대 초엽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해 돋는 고요한 나라'라고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들와 각종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냇다. "서울에는 넓은 거리와 좋은 건물 몇 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이 없다. 거리의 더러움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1885년 서울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단의 의사 겸 선교사인 사우드 홀의 기록이다. 또 미국 선교사 알렌이 평양에 들어가서 목격한 광경을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평양은 서울보다 더 번창한 상업도시이며 근대도시였다...

2.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예전부터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 나라현의 정창원에는 신라 시대 고문서가 한 장 남아 있는데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인구 구조를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보면 노비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다. 고려 시대에도 매우 낮았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증한 것인데 이유는 미스터리다. 연구 자료도 없고 결과도 없다. 우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 포로를 노비로 삼는다. 우리나라도 가끔 왜구를 붙잡아 노비로 썼는데 그 노비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주인댁 여자를 강간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쪽의 말갈족, 여진족을 붙잡아다가 노비로 삼은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 숫자를 아무리 보태도 얼마되지 않는다. 어떻던 조선 시대에 들어와..

1.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1.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노비 값이 조랑말 절반 수준 조선 오백 년을 양반과 상놈 대립의 역사라고 일컫지만 대체 그 상놈이란 어떤 부류인가. 그 숫자는 얼마나 됐는가. 우선 왜 상놈이란 명칭이 생겼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일부의 견해로는 사농공상 분류 중 상인이 가장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아니면 보통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常)놈이라 했다지만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 중국 남부에 서쌍반납이라는 야만족이 살았는데 그들을 비하하여 쌍놈이라 부르던 것이 전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떻든 이 상놈이라는 호칭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여 비천한 계급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상놈으로 불리던 백성은 표현을 바꾸면 노비라는 말과 거의 동일어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