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금수강산?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에게만 이롭다?
1800년대 초엽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해 돋는 고요한 나라'라고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들와 각종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냇다.
"서울에는 넓은 거리와 좋은 건물 몇 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더럽고 보잘 것이 없다. 거리의 더러움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1885년 서울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단의 의사 겸 선교사인 사우드 홀의 기록이다.
또 미국 선교사 알렌이 평양에 들어가서 목격한 광경을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평양은 서울보다 더 번창한 상업도시이며 근대도시였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직항로가 나 있었고 외국문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좋은 물건을 사려면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야 했다. 해방 후까지도 평양으로 레코드를 사기 위해 보따리상들이 드나들곤 했다. 가장 개화된 도시가 평양이었던 셈이다. 알렌의 보고 문서다.
"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거리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기에도 비좁으며 진흙탕 길에 온갖 짐승들의 배설물이 깔려 있어서 숨을 쉬며 지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그 길을 태연히 오고가는 남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제멋대로 헐클어진 머리에 위통을 벗었으며 바지는 처음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맨발이 대부분이고 여자들은 위통은 벗지 않았지만 짧고 누런 상의 아래로 젖을 내놓고 다니는데 그것이 유행인지는 모르겠다.
길 양편으로 가축우리보다도 훨씬 못한 흙과 풀로 만든 작고 납작한 집들이 끓임없이 마치 버섯단지처럼 이어져 있고 부유한 동네에 가서야 다소 기와집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그 선교사 한 사람만의 기록이라고 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보고서가 공통적이다.
"서울의 대감들이 몰려 살고 있는 부촌도 뱔반 다르지 않다. 커다란 기와집의 담장 앞으로는 시궁창 하수로가 있는데 대부분 씻고 버린 채소나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바람에 부패한 하수가 좁은 길로 넘쳐 나와 악취가 범람하고 있다. 그런 길을 태연하게 대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간다. 그런 불결한 위생상태 때문에 서울과 대도시에는 끓임없이 전염병이 돌아 서울 인구의 10%가 콜레라와 페스트로 죽어나가는 참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런 선교사들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도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가 들어온 뒤 시작되었는데, 당시 서울에서도 큰 거리라는 것이 우마차 2대가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나머지 작은 도로는 겨우 몇 사람이 통행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국도 역시 산길이나 밭길 수준이었다. 수레가 다니지도 않고 그저 사람이나 말이 지나가기에 적합한 소로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도로를 닦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전국을 잇는 도로라는 것은 모두 농로 수준밖에 안 됐다. 가마 한 대만 지나가면 족했다.
도로의 의미라는 것은 왕의 행차나 중국 사절들이 통과하는 경우에만 해당이 될 뿐 백성들이 통행하는 도로는 그냥 사람이 다닐 정도로 그쳤다. 심지어 일부러 도로를 닦지 않았다.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나 내부의 적을이 침략했을 때 오리혀 불리하다는 주장이 조선의 도로 정책에 대한 생각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양곡의 운반도 육로가 아닌 해운으로만 했으니 사실 도로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도로가 이렇게 협소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도시가 형성되었으니 청결이라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당초 무리였다. 동물들의 배설물과 인분, 넘치는 하수, 온갖 쓰레기, 그런 곳에서 틈만 나면 발생하는 온갖 전염병, 그것이야말로 조선 후반의 고질적인 도시 풍속도였던 셈이다.
조선에서 도로 조성계획이라는 것은 1896년 대한제국 정부가 한성 내의 도로 폭을 규정하는 내부 명령을 내린 것이 그나마 최초에 속한다. 이때 비로소 4대문 내의 도로와 왕궁 주변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불법 가게들이 철거되고 고종은 서양에 다녀온 개화파들의 건의에 따라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 중심 도로망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획뿐이었다.
일제는 이런 계획 대신 거주의 편의성 위주로 격자형 도로 계획을 세워 비로소 근대식 도로들을 닦기 시작했는데 현재 서울의 중앙부가 이때 모두 확장되고 신설되었다. 새로 도로를 만들었다고 해서 신작로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런 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주지, 거기에 불결하기 짝이 없는 환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휩쓸었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는데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도 병의 원인이 쥐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의 무당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집집마다 고양이 그림을 내걸고 무당들이 굿판을 벌여 고양이 울음을 내면서 콜레라 귀신을 내쫓았다. 콜레라가 걸리면 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콕콕 쑤시며 발을 떠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쥐가 무는 형상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쥐 귀신이 몸 안에 들어와서 생기는 병이라 하여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 20세기 초반에 말이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에는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고 마을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다. 소작농이 대부분이고 나무, 나물, 강아지, 닭, 계란 등을 장에다 내다 팔거나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겨울내내 목욕한 번 못하고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비누가 없어 돌로 떼를 벗기곤 했다. 휴지도 없어서 재래식 화장실에는 짚이나 다쓴 노트, 헌책, 시멘트 종이나 신문지가 뒷처리용으로 사용되었고, 어린이가 체하거나 열이나면 병원은 커녕 약방도 없어서 동네 무당을 불러 손가락을 따거나 부억칼과 바가지물로 주술식으로 치유하곤 했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온 몸에는 종기가 쉬임없이 났고 코를 흘리고 손에는 떼가 새까맣게 끼곤 했으며 겨울에는 손발이 갈라지고 터졌다.
봄이면 춘궁기라 식량이 부족하여 동네 부자집에서 양식을 빌려다가 허기를 채웠고 그것이 어려우면 산이나 밭에 가서 나무껍질, 생무우, 오이, 토마토, 감자, 배추뿌리, 생감, 산딸기, 칡뿌리, 소나무 껍질, 쑥, 고사리, 두릅, 호박, 가지, 옥수수, 고구마, 미숫가루, 수제비, 칼국수 등으로 끼니를 떼우곤 했다. 가을철에는 추수를 하고 빌린 양곡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궁이 불을 피우던 시절이라 모든 땔감은 산에서 나무를 해와서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후 자유당 시절에는 온 산이 나무가 없어서 빨갛게 민둥산으로 변했다. 그래서 여름철 홍수가 빈번하였고 산사태가 빈번하였다. 그래서 땔감이 부족하여 잡풀이나 볏짚, 산에는 나무 뿌리까지 캐다가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다. 당시 지방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자갈 도로였고 차가 지나가면 번지가 뽀얗게 피어나곤 했다. 당시 노력동원이 자주 있어서 있어서 주민들이 도로에 나가서 자갈길을 고르기도 했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우유가루나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해 주었고 반드시 계몽영화나 종교 관련 영화를 상영해 주기도 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집에 올 때는 학교에서 옥수수가루로 떡을 만들어 나누어 주곤했는데 손 떼가 새카맣게 뭍어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먹었다.
산에 나무가 없자 그때부터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방공사를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가을이면 야산에 올라가 잡초 씨앗을 채집하였던 기억이 난다. 엿장수와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을 다니면서 고철, 고무신, 그릇 등을 엿과 바꿔주며 팔았고 돈이란 구경도 못하고 대부분 물물교환으로 외상빚을 갚았다. 농촌에는 머슴살이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이를 불문하고 어른 어린이 거지들이 아침.점심.저녁으로 구걸을 하려 다녔던 시절이 겨우 30~40년 전 우리나라의 농촌 모습이었다. 일제 36년 수탈과 억압의 시대를 지나고 해방이 되었으나 자유당 정권은 친일청산과 정권 안정에 주력하다 한국전쟁을 겪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장기집권에 관심이 있었을 뿐 백성들의 삶은 조선 말기 시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서양에서는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수도 보급과 빌딩과 병원들이 일반화되고 있을 때 서울과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이었다.
서울에서 고아원이 처음으로 생겻을 때는 그 앞에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거의 폭동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을 모아 키우면서 살을 찌운 다음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사진관도 플래쉬가 터지는 것을 보고 사람의 혼이 빠져나가면서 서양 사람의 노에가 되어 버린다는 소문으로 폭동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되자 서울의 풍수지리상 나라의 종말이 다가왔다면서 백성들이 거리를 가로막고 운행을 막았으며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폐쇄적인 사회였는지, 그리고 국제정세를 모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개화파를 모두 숙청하고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와 매관매직과 탐욕, 그리고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싸움에 외세의 끌어들임, 임금 고종의 우유부단함으로 아까운 허송세월을 보낸 결과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었다.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았다
세계 유레없는 아름다운 한복을 자랑하고 백의민족임을 자랑하지만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복식이다. 일 년 내내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흰옷만 입게 한 것은 우리 양반들이다. 게다가 한 벌만 가지고 입기 때문에 나중에는 본래 색깔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엇다. 그런 옷을 깁고 또 기워 입었다. 보통 백성드은 그 한 벌이 잠옷이고 작업복이고 외출복이엇다. 그나마 없거나 아껴 입으려고 여름철에는 웃통을 벗고 살앗다.
정자 위에서 주인 대감이 기생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아래에 대감의 말을 보살피고 있는 노비는 웃통을 벗은 봉두나발의 차림새다. 이것은 근래 방영된 KBS 진품명품에 소개된 한 충청도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그림의 내용이다.
상민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당연히 옷은 얼마가지 않아 누런 옷, 검은 옷이 되어 버린다. 흔한 풀물을 들여도 됐을 것이다. 각종 열매로도 얼마던지 염색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굳이 흰색만 입게 한 것이다.
허려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옷은 양반들만 입었다. 상민들이 혹시라도 색깔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앗다.
1671년 현종 12년 부응교 홍주국이 상소하여 백성들의 흰옷을 볼래 물들여 입는 폐단에 대해서 말하였다.
미국의 선교사 게리 길모어의 기록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것으로 비난하지만 그것은 조선인들의 옷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잇다 때가 타기 쉬운 흰옷을 입기 때문에 더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검정 옷이 되어 있으니, 더 유별나게 더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옷은 목과 소매 끝부분이 더 빨리 더러워지고 여인네들은 머리 기름을 바르는데 그것이 옷에 닿아 시커메지고 애초에 색깔과 대조가 되면서 더 한층 더러워 보인다. 왜 굳이 이런 흰색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요즘 각종 드라만 영화가 화려한 궁중 비사만 다루느라고 백성들의 이러한 실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차 한 대 다니기도 불편한 좁은 거리, 당연히 가마를 타거나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던 그 거리들이 그렇게 더럽고 어지러웠다는 기록들은 차마 믿기지가 않는다.
조선 시대 내낸 도시 계획을 세워 도로를 확장하고 가옥들을 개선하며 위생 관념을 위해 의복을 개량하고 질병 예방을 위해 무슨 시책을 펼쳤다는 기록은 찿기 힘들다.
196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전국적으로 당시의 도로가 얼마나 좁고 집들이 작고 거리가 더러웠는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독히 더러웠던 길거리 공중화장실은 말 할 것도 없었고 지금처럼 비교적 깨끗하게 개선된 것이 최근이다. 1960년대 종로의 길들은 좁은 거리가 온통 인분천지여서 날마다 몇 차례씩 발을 씻었다고 한다. 시골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길을 가다가 대변이나 소변은 아무 곳에서나 누었고 휴지가 없으니 나뭇잎이나 풀잎, 돌 등으로 뒤를 닦았다. 어떤 사람은 아예 닦지도 않고 그냥 지냈다.
자기 집의 쓰레기를 태연히 집 밖으로 던져 버리고 이웃집은 아랑곳 없이 자기 집반 돋보이게 하려는 본성, 자기 가게의 간판이 옆집보다 돋보이게 튀어야 한다는 전투적인 경쟁심리, 이런 성품은 모두 어디선가 은연중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 원천이 조선 오백 년의 속성이라 한다면 과장이라 할 것인가.
도시 계획기은 선진국은 전체적인 균형을 중시하여 집단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일본이안 유럽을 돌아보면 어디를 가 봐도 자연이 비교적 아름답게 보전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그런 개념이 없다. 조금만 풍치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 그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모텔과 매운탕집, 삽겹살집들이다. 전체 도시 계획이라는 것은 없이 일부 그 동네 단지계획만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조금 비약하여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부분적으로 거리가 깨끗해지고 화장실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산천 전체를 통틀어 평한다면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축에 들어간다. 얼마던지 계획도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계획도시는 경남 창원시밖에 없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혼란스런 가게들만 산천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피 속에 지저분한 생활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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