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구름위 2023. 4. 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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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만 하고 볼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

 

왜 실록을 왕도 못 보게 했을까

조선을 말할 때 어지간히 비판적인 사람도 기록문화가 대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심지어 그것 한 가지밖에 볼 것 없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25대 왕 472년간의 동태를 기록한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 숫자는 총 6,400만 자에 달하며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것의 원전이 되는 <승정원일기>는 그 방대함이 <실록>의 몇 배에 달한다. 총 3,245책이나 되고 글자 수로는 2억 자를 넘는다. 그나마 이것은 현존하는 것이 그러하며 광해군 이전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격으로 왕명의 드나듦과 모든 회의, 행차 시의 동태 같은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8명의 사관이 있어서 왕이 있는 곳이는 항상 그림자처럼 참석하여 대화를 기록했다.

 

실록은 별도의 상설 기관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왕이 죽은 후 실록청이 구성되면서 전 왕 시절의 <승정원일기>와 시정기, 상소 등을 참조하고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가려 놓은 최종 편집본이다. 이런 전통은 일찌감치 중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모든 것을 중국과 같게 하려는 사대부들의 주장에 따라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에도 고려실록이 작성되었지만 조선실록처럼 시시콜콜하게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훌륭한 기록물들은 조금 물러나서 분석해 보자면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기록물을 만든 것일까? 그런면에서 의문이 생긴다. 애초의 목적은 훌륭하지만 활용 면에서는 전혀 점수를 줄 수가 없는 것이며 무조건 예찬만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활용을 할 수 없다면 그 기록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어 놓고 도서관장을 비롯하여 아무도 책을 열람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곳이 바로 조선왕조였다. 그 실록은 왕도 보지 못했고 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 뿐이었다.

 

정조도 "실록은 금궤에 넣어 석실에 엄중 보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수가 없다. 그런 때문에 잘 알려진 일들은 다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더 중요한 실록의 자료를 쉽게 활용할 수 없는 것은 매우 흠결이 되는 일이다."라고 불만을 털어 놓은 뒤에 <국조보감>을 따로 편찬하라고 명령했다.(정조실록 5년 7월 10일)

 

<국조보감>은 주로 왕의 치적을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실록을 볼 수 없으니 선대왕들의 행장을 간소하게나마 흝어볼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간략본으로 현재 90권 28책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수식과 과장이 넘치고 왕의 치적에 대한 찬사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별로 없다.

 

왜 실록을 왕도 못 보게 만들었을까?

 

물론 명분은 있다. 왕이 보기 시작하면 불만이 있는 부분을 고치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사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는 이 기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전라 감사 이극돈은 국상 기간 동안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시는 불법을 저질렀는데 사관 김일손이 이런 사실을 모두 사초에 기록하고 말았다.

 

뒤늦게 알게 된 이극돈이 이 기록을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있다가 벌인 복수극이 무오사회인데 그 때문에 조정 대신 수십 명이 죽고 귀양 갔으며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는 욕을 입었다.

연산군은 이때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명령했지만 실록청에서 반대했다.

 

"에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의 기록자들이 옳게 기록할 수가 업쇼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화를 내고 '즉시 빠짐없이 가져와라"고 호통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로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했지만, 종묘사직과 관계가 있는 중요한 일이라면 그 부분만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참작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안호는다는 정의에도 합당합니다."

 

결국 6조목만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으니, 그가 본 것은 실록의 극히 일부분이다. 천하의 연산군도 실록에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예종은 실록청에서 <세조실록>의 완성을 보고 받자 첯 권을 들이라고 명령했다. 사초의 방향을 한번 살펴본 정도였다. <세조실록>은 모두 49책이었으니 그중 한 권을 살펴본 것에 그쳤다.

 

세종도 궁금하여 한번 보자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왕이 실록을 보면 다음 왕도 또 보자고 할 것이고 그다음 대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걸 알면 사관들이 공정하게 기록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이길 수 있는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실록을 공개하라는 왕과 이를 거부하는 대신들 간의 논쟁은 중종 때 가장 격렬했다.

 

1536년  중종 31년 7월. 전례대로 <국조보감>을 편찬하게 되었을 때 찬집청에서는 춘추관 문을 열고 실록을 한번 열람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려 왕의 허가를 받았다.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정권이었으니 연산군에 대한 기록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 한번 잠시 공개가 되었지만 얼마 후 추가 기록을 위해 다시 실록을 찬집청으로 실어 보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왔다. 실록청과 춘추관 등이 시끌벅적해졌다. 간단한 보감은 편찬하면서 실록을 이렇게 재차 열람시킨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홍문관 부제학 성윤이 쫓아왔다.

"이제 들으니 실록을 찬집청으로 실어 보내라 하셨다는데 춘추관을 열고 실록을 보내는 일은 매우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조종조의 본받을 만한 일은 기왕의 보감에도 모두 실려 있으니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을 것 입니다. 사고를 경솔히 열고 닫고 한다면 뒤 폐단이 이루말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종의 반론도 지엄하였다.

"엄히 보관하는 것도 옳은 듯하나 예부터 큰 일이 있으면 실록을 상고함이 당연한 것인데 국조보감을 찬집하면서 실록을 참고하지 않고 어쩌겠는가? 비록 지난 국조보감에 기록이 있다 하여도 자세하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에 대신들이 다시 보자는 것 아닌가."

 

춘추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 가볍게 열었다 닫았다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번 국조보감을 처음 편찬할 때는 선왕들의 일을 본받기 위해 할 수 없이 잠시 열었지만, 지금은 긴요한 일도 없는데 다시 열어본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합니다. 지난번 무오사화의 발생도 임금이 친히 사록을 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실록을 본 사람이 적지 않아 겸춘추까지 들어와 열람하였습니다. 특별히 비밀스러운 내용이야 없겠지마는, 대체로 임금이 본받을 만한 일은 6경보다 나은 것이 없고, 근래 조종조의 일을 알고 싶으면 국조보감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더 상고하려고 하십니까?  또한 폐조(연산군)의 일을 경계하기 위해 책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도 부당하다고 봅니다. 폐조 때의 일이 아직 오래되지 않아 사람들의 머릿속에 역력한데 특별히 책으로 편찬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지금 실록각을 여러 날 동안 여닫으므로 시골의 평범한 서민들도 모두 '지난날 이 문이 열렸을 때 큰 참화가 일어났는데 지금 또 이 문이 열리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며 물의가 흉흉하여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중종이 결국 다시 밀렸다.

"이 일은 좋은 일은 본받고 나쁜 일은 징계하기 의해 폐조의 일을 열람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 굳이 열람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여러 날 실록각을 열어놓은 일은 나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중종실록 31년 7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