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은 왕권 견제용 명분의 산물
모든 기록이라는 것이 단순히 후대에 남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당대에도 지나간 기록을 통하여 무언가 현실을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런 기본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활용할 생각도 없이 그냥 우직하게 기록하고 보관만 해놓은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춘추관에서 열람을 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아 어떤 문제에 국한하여 자료 검색을 한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왕들은 이런 기록을 애초에 싫어했다. 태조부터 실록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도 없었다.
그는 왕이 되어 조선을 개국한 뒤 정도전을 시켜 <고려사>를 편찬하라 일렀다.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실록>은 모두 38책으로 내용이 단출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고려 말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죽인 구절이 있다. 우왕은 그에게 중국 정벌을 지시한 왕이다. 이성계가 그를 배신하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을 해버렸으니 그는 평생 그 콤플렉스를 지녔을 것이다. 사초를 보고 난 태조는 대노하여 기록을 했던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을 잡아들여 엄중히 국문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공양왕의 지시였을 뿐이고 나는 만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결국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했던 이행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런 터였으므로 실록을 만들라 마라 할 리 없었고 그다음 정종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관이라는 직책은 유지하고 있어서 자체적인 기록은 계속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다음 3대 왕인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1401년 태종 1년 5월 동지사 이첨은 '이제 사관이 입시하여 왕의 발언을 기록하게 해 주소서' 하고 청원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미관말직인 사관을 입회시킬 수 없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다음 달에도 같은 청이 이어지자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고 있어서 임금의 언동을 다 알고 있는 터에 어찌 말직인 사관이 또 들어와야 되는냐, 차라리 할 일이 없다면 사관 직임을 없애 버리라는 의견이 나와 대신들이 어전에서 몹시 다투었다.
다시 한 달 뒤에 회의 도중 휘장 건너편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게 누구냐?"라고 물으니 "사관 민인생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대노하여 "명령없이 사관을 들이지 말라 했거늘 이 무슨 무엄한 짓이냐?"며 그를 귀양 보내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사관 입시 허용은 태종 3년에야 겨우 이루어진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태종이 종친 몇 사람과 활쏘기를 즐겼는데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오기를 왕이 날마다 종친 들과 어울려 활쏘기를 하므로 다른 종친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관의 행위에만 전념하고 있서 문관들도 싫어한다는 사초 기록이 있으니 유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태종은 또 불쾌해졌다. '이따위 낭설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활 한 번 쏜 것을 사관눔이 잘못 보고 헛소리를 한 것 아닌가. 내 이러니 사관 입시를 금한 것이다. 어디 그럼 가까이 와서 내 하는 일을 분명히 지켜보아라.'
그 뒤로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사관이 어전 회의에 입시를 했다.
1404년 태종 4년에는 그가 말을 타다가 낙마한 사건이 있었다. 태종의 첯마디는 "사관에게 알리지 마라"였으니 그 역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이때는 태조 친위 세력들이 쟁쟁한 권력행사를 하던 때였다. 친위 대신들은 왕의 뜻을 들어 사관 입시를 반대했고 반대파 대신들은 음으로 양으로 계속해서 압력을 넣었다. 그 기간이 10년이나 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태종 9년 들어 정식으로 태조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정리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실록 작성을 위한 그동안의 사초를 바치라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편찬시기 문제로 계속 논란이 이어지더니 드디어 태종 10년에야 정식으로 사관 입시가 허용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실록 작성은 국가에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 간의 명분 싸움이 계속된 끝에 결국 명분이 이긴 것이라 생각된다.
서서히 태종 친위 세력들의 힘이 사라져 가게 되었으며 아무래도 왕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실록 작성을 빙자하여 알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세력 때문에 사관 입시도 되고 실록도 만들어졌지만 기이하게도 왕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언행이 아니라 선왕들의 언행도 확인할 수 없게 해 놨으니 왕으로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햇을 것이다.
실록의 기본이 되는 사초도 편찬이 끝나면 지금의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글자를 없애 버리고 실록은 사고에 자물쇠를 채워 단단히 보관했다.
오백 년을 그런 식으로 꽁꽁 묶어 놓았던 자료를 자랑만 하기에는 개운치가 않다. 선대의 체험은 기밀로 하고 오직 고대 중국 왕들의 가르침만 달달 외워 그 사례만을 가지고 국정이 논의되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실상이다.
명나라 태조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당 고조께서 이르시기를, 맹자편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조 때에, 이런 것들이 모든 대신들의 발언 중 가장 많은 인용문구다. 왕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선대왕 시절에 왕이 직접 올린 예를 찿아보라 하니 예조에서는 몇날 며칠을 뒤적인 끝에 중국 자료를 끄집어 왔다. 광해군 때의 이이다.
실록의 경우는 그렇고 <승정원일기>는 비교적 오랫동안 개방되었다. 왕의 어떤 지시가 내리면 <승정원일기>를 살펴보고 답변을 올리겠노라는 응대가 많았다. 그것도 한 시절이었다. 열람 신청이 많아지자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그것도 엄금하고 말았다. 실록과 같이 엄하게 간수할 것이며 특별한 경우라도 허가를 받아야 열람이 가능하고 열람자의 관등직책을 염히 기록하도록 했다. 사실상 이로서 <승정원일기>도 자물쇠가 채워지고 말았다. 그토록 꼼꼼하게 작성하고도 대외비로 막아 버린 문서기록. 그것이 자랑스러운 두 기록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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