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7.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구름위 2023. 4. 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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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중국이 끌고간 공녀들에 대한 침묵

 

일제는 우리나라를 36년간 식민지로 삼았다. 거기에 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다. 지금도 일제 36년의 영향이라는 표현이 흔히 쓰이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역사 왜곡이라든지 정치, 사회 등 각 부분에서도 많은 일제 잔존 관습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런데 순서가 좀 뒤바뀐 것이 하나 있다. 36년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청산 작업도 실시되었고 친일파 명단이나 사전도 만들고 극일을 위해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면서도 오백 년 동안 실질적으로 조선을 지배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판도 없고 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끌고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하면서도 중국이 오백 년 동안 끌고간 수많은 공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녀들은 성노리개가 아니었으므로 괜찮다는 것인가?

 

정신대 여성들은 돌아왔으나 중국에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아무도 돌아온 사람이 없다. 그 중에는 귀족과 결혼하여 신분이 올라간 여성도 몇 명 있었으나 대부분 중국인들의 첩이나 노비로 살아갔다.

 

공녀란 중국에 바친 조선의 처녀들이다. 중국은 걸핏하면 말 몇 천내지 몇 만마리, 공녀 몇 명을 보내라, 은 얼마, 호비 얼마, 산삼 얼마를 보내라, 고자도 몇 명 보내라며 요구했고 사신들이 올 때마다 정식 요청건 외에 사신 개인에게도 별도로 상납하는 진상품 등 바리바리 공물을 바쳤다. 그래야 임긍 책봉 , 세자 책봉, 왕비 책봉 등등 승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인데, 기이하게도 우리나라가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병자호란 때는 기록마다 좀 다르지만 소현.봉림대군을 포함 3학사 등 약 30만~50만 명의 포로가 끌려갔다. 그 숫자는 대략 조선 인구의 대략 10분지 1 정도였다.

 

우리는 가감 없이 완전한 중국의 속국이고 식민지였다. 식민지란 '다른 다라의 특수한 지배를 받는 나라'로 국어사전에는 설명되어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모든 부문에서 제약과 탄압을 가했고 그들의 문자까지도 강요했으며 이름도 일본 식으로 개명토로 강요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일제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오백 년 내내 중국의 문자를 써왔다. 지금도 많이 쓰고 있으며 강요하고 말 것도 없다. 한글은 세종이 유신들의 반대를 염려하여 비밀리에 혼자서 몰래 만들었고 이 만들어진 한글이 반포되었지만 제대로 쓰이지를 못하고 천대받으며 지내오다가, 조선 중기를 넘어서야 겨우 궁중 여인들에 의해서 쓰여지기 시작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한 우리 문자가 아니다. 중국 문자가 없으면 해독이 안되는 반쪽 언어에 가까운 것이다. 말하고 읽는 것은 상관 없지만 쓰는 것은 한글의 독창성이라는 것은 반감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중국의 완전한 통제를 받고 있다는 증거로 조선에서는 새 왕이 즉위하면 먼저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승인을 받지 못하면 무허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유신들은 조선이 중국의 신하국으로 임금이나 신하들이 모두 같은 중국의 신하로 등등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 효종은 죽은 후 임금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신하들끼리 예송논쟁이 벌어져 예의와 허례허식만 따지다가 아까운 세월만 낭비했다.

 

새 왕이 즉위하면 축하한다고 중국에서 사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수많을 선물을 가지고 사절들이 찿아가 승인을 구했다. 완전히 꺼꾸로 살아온 것이다. 중국과 연호도 같이 썼는데, 어느 왕 몇 년이 아니라 중국 황제의 연호를 따랐다. 효종 즉위연은 청 순치황제 6년이고, 1895년 고종 32년까지도 청 광서황제 21년이라고 썼다.

 

한말에 서양의 외교관들이 숱하게 들어와 조선이 왜 중국의 연호를 지금까지 사용하느냐고 핀잔을 주자 그때서야 비로소 심사숙고 끝에 건양 1년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세금을 바치지 않았으니 식민지가 아니라 화폐 경제 시대가 아니라 물건으로 바치고 거래하던 시대였는데 해마다 나라의 등골이 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특산물을 공출하여 바리바리 갖다 바쳤다.  안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왕족과 궁궐내, 그리고 양반 사대부들은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의주에는 큰 창고를 지어 놓고 비축해 두었다가 요청이 들어오면 얼른 가지고 떠났다.

 

조선이 중국에게 독립적인 일종의 연방이었다고 둘러 부치면 안되고 조선 오백 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모두가 잘 알시다시피 당당한 독립국가였다. 그들은 중국의 승인을 받아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공녀나 공물을 갖다 바치지도 않았다. 그 뒤를 이은 고려도 조선처럼 그처럼 창피하게 굴지는 않았다. 거란족의 3차에 걸친 침공에 강력하게 버티면서 마지막 3차 침공시에는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란군이 거의 전멸당하다시피 했다. 무신정권 80여 년을 겪으면서 무신들에 의해 나라의 기강과 국력이 쇠약해졌으나 원나라에 대항하여 40여 년간 피의 항쟁도 벌였다. 고려 원종의 몽고 입조와 오랫동안 저항하던 강화도에서 출륙이 이루어지면서 최씨 정권, 김준, 임연 정권의 무신정권이 차례로 무너지자 그들을 떠받치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대몽항쟁은 그들이 비록 최씨 무신정권의 하수인들이었지만 원에 항복하는 순간 그들은 목숨을 보장받기 어려웠기에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에서 진도로, 다시 제주도까지 물러나면서 여.몽군에 대항하여 끈질긴 불굴의 대몽항쟁을 벌이다가 결국 남해 바다에 모두 충혼의 피를 뿌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고려 말 우왕이다. 광개토왕은 우리나라 영토를 광할활한 만주 전지역, 내몽고 지역, 중국 대륙까지 넓혀놓은 왕이다. 우왕은 비록 최영의 주도에 의해 시도되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중국을 치기 위해서 군대를 출병시킨 왕이다. 조선의 효종도 그런 꿈을 가지고 북벌을 추진하였지만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정작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바로 청나라가 아니라 무너져가던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일차적인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가정이 필요없다지만 그래도 가정을 한 번 해보자. 그때 고려군이 위화도를 건너 진격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주와 요동 지역은 당시 원이 무너져가고 명이 중원을 차지하고 원을 북쪽으로 쫓아내기에 급급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만주와 요동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었던 지역으로 시기적으로 호기였다. 그래서 고려군이 큰 난관 없이 점령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명이 원을 몰아내고 고려군이 차지하고 있는 만주와 요동 지역을 반환하라 했을 것이다. 그러면 과거 서희처럼 유능한 외교술로 "만주와 요동은 고구려의 옛 땅이므로 고려라는 나라의 국호를 보듯이 고려는 고구려 후예이다. 그래서 이 땅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며 원이 강점한 땅이므로 고려의 땅이 되어야 한다"면서 강력하게 주장하였다면 명이 나라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물러서던가 아니면 고려와 일전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뒤는 지루한 싸움이 되다가 고려가 승리했다면 만주 땅은 오늘까지 한민족이 지배하는 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고려가 명군에 밀려 패전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온 국토가 보복을 당하거나 고초를 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피 속에는 자주와 독립의 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성계는 비록 현실감각이 있어서 이 작전을 배신했지만 그는 결국 오백 년간 우리 민족의 피와 혼을 끊어버린 사람이다. 피 속에 기개가 살아 있지 못하면 그건 대접받지 못하고 천대받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노예같은 삶, 즉 그건 인간이 아니고 민족이 아니다.

 

그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리면서 변명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고 있다. 장마철이라 활이 늘어지고, 전염병이 돌고, 탈영병이 많고 왜구가 침범할지 모르며 소국이 대국을 거역할 수 없다는 등 4대 불가론을 배신의 핑계로 삼았으니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미화하여 쓴 조선의 기록들이다. 활이 늘어지면 우리 활만 늘어지는가? 장마철이면 우리만 불리한가? 비가 오니 시합을 못하겠다는 축구팀이나 마찬가지다. 장마철이면 적의 이동도 쉽지 않고 그 허점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시기를 맞췄을 수도 있다. 도망병이 속출한다는 그의 주장도 핑계일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사람을 왕으로 내세우고 조선이 출발하였으니 그의 후손들과 추종자들이 지배하던 조선의 미래는 우리 역사에서 보듯이 결국 미개한 오랑캐로 생각하던 일본눔들에게 머슴이 주인을 쫓아내고 주인 마님을 겁탈하여 집을 차지하듯이 마찬가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출발부터 부도덕한 쿠테타로 출발한 조선이었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린 후 제일 먼저 고려 우왕이 광폭하고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대국에 망덕을 저질렀으므로 폐하였다면서 말 1천 필을 보내면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으로 명나라에 보고했다.

 

 

명나라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그때부터 조선의 왕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이 중국 황제의 신하라는 관습을 굳혔다. 중국의 황태자가 죽어도 마치 조선 황태자가 죽은 것처럼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걸핏하면 사은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보내 선물을 올렸다. 선물은 좋은 말 60마리가 기본이다.

 

중국 황제는 처음 이성계에게 왕의 호칭 대신 권지국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에 이성계는 답신 사절을 보냈다.

"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았사온데 내린신 말씀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신은 온 나라 신민과 더불어 감격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억만년이 되어도 항상 조공을 바칠 것이며 송축하는 정성을 바칠 것입니다." (태조실록 1년 10월 25일)

 

조선에서는 정월 초하루의 가장 큰 행사는 중국 황제에게 축하연을 벌이는 것으로 중국 황제가 잇는 방향을 향해 절하면서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를 망궐례라 한다. 날씨가 혹독하게 춥고 왕이 병중에도 철저하게 망궐례가 행해졌음은 물론이다. 선대왕이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도 올렸다.

 

광해군 때 좌의정 이항복이 한번 제동을 걸었던 적이 있다.

"금년 겨울은 추위가 오락가락하여 감기가 크게 유행하니 오래도록 조섭 중에 있는 몸으로 함부로 바깥바람을 쐬지 않으셔야 합니다. 삼가 듣건데, 이번 초하루에도 영모전에서 친제를 모시고 이어서 인정전에서 망궐례를 행한다고 합니다. 친제를 거행하는 것이야 당연한 행사고 좋은 날에 명나라 임금의 만세를 부르는 것은 정말 우링의 큰 경사입니다만 지금은 삼년상중입니다. 이런 때에는 모시지 않아도 크게 결례가 아닙니다. 옛날부터 노래 부르고 곡하는 것은 같은 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례와 흉레를 함께 행하는 것은 예를 아는 곳에서는 금하는 사항입니다. 같은 날 새벽에 면복을 입어 애곡을 하고서 곧이어 경사에 참한다면 예법으로 보아도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오래도록 병환 중에 있는 터에 무리하실 필요가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망궐례를 대신 올리게 하소서." (광해군일기 1년 12월 30일)

 

명나라 왕제를 향해 왕과 온 조정대신들이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춤을 추며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치던 그 광경을 생각해보라. 왕은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차림이다. 그 앞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포문과 잔칫상이 차려져 있고 그 표문에 왕이 엎디어 절을 올린다.

 

이런 것이 부끄러웠는지 점차 슬그머니 기록에서 빼버리고 정월 초하루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을 볼 때에 그래도 배알이 있었던 신하들이 조금은 있었던 듯하다.

 

인조 때부터는 정월 초하루가 아니라 동짓날로 날을 바꿨다.  동지 사흘 뒤에 명 황제 생일이라 다시 성절 하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득세하자 조금씩 달라지더니 인조 25년이 되어 드디어 왕명으로 이 행사가 중지되었다. 명이 망하고 청나라의 세상이 되니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다.

 

망궐례가 중지되었어도 해마다 십수 차례 각종 사절단이 올라갔다. 황제나 황후의 생일에 성절사가 다녀왔음도 마찬가지.

 

애초에 '조선'이라는 국호도 중국에서 정해줬다. 태조의 지시로 우리 사절이 올라가서 조선과 화양 중에서 하나를 골라 달라고 아뤄었다. 중국이 조선을 정하자 그대로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중국은 애초에 조선을 동이라고 호칭했다. 동이라는 말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말인데 이성계도 스스로 이런 표현을 썼다. 한영우 교수는 동이를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란 뜻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중국에서 노략질을 하던 여진족 일부가 우리나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눔들을 당장 붙잡아 보내라는 명령이 오자 "저희 오랑캐가 감히 대국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잡아 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중국은 조선이 스스로 오랑캐라 하고 국호를 정해달라고 하며 대국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부터 본격적인 공물 요구가 들어왔다. 말 1만 마리르 보내라는 것이 시작이었다. 첯 번째라 그랬는지 중국에서는 말 값을 보내왔다. 말 한 마리에 면포 2필이었으니 형편없는 가격이다. 한 필로 보통 세 사람의 옷을 지을 수 있었는데 쌀 반 가마니 가격이었다. 그러니 겨우 쌀 한 가마니 값으로 말을 가져간 것이다. 그래도 "감히 말 값을 받을 것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그런 글을 가지고 사은사가 부리나케 또 갔다. 너무 사은사가 들락거리자 오히려 중국에서 중지령이 내렸다. 멀리 있는 작은 오랑캐들이 너무 들락거리지 말고 3년에 한 번씩만 오라 한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무슨 염탐을 하고 각종 귀한 물건을 들여가는 등 좋지 않은 낌새가 이어진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사은사 이염은 들어가서 절을 할 때도 불량했다고 매를 맞고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그 후 3년에 한 번씩만 들어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걸핏 하면 들어갔다가 입국시키지 않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조선에서 중국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것은 황제 생일날인 성절과 정월 초하루 날을 제외하고도 공자의 제사날 등에도 모셨다.

 

조선에서 왕이 되면 가장 시급한 일이 중국의 허가를 받는 일이다. 이런저런 일로 왕이 바뀌었다고 보고를 하면 확실히 병으로 죽은 경우에는 1년 정도 내로 왕의 칭호를 허락한다는 칙서가 내려왔다.

 

태조, 태종, 단종, 세조,, 중종, 인조 등은 3년쯤 지나 비로소 허가가 내려왔고 그동안은 권국지사라는 직책을 받았다. 서자였던 광해군은 나라의 은을 죄다 털어 바치고 간신히 왕의 칭호를 허락받앗다. 심지어 순조는 왕비책봉까지 허가를 받았고 연산군은 세자도 허가를 받았다.

 

대신들의 관복도 중국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인사법도 들여왔다. 명나라에서 하고 있는 읍.배례라는 것을 똑같이 시행한 것이다. 대신들은 청사에 들어와서 서로 읍하고 대궐 밖으로 나와서도 서로 읍하라는 명령이다.

 

중국에서도 가끔씩 사신들이 왔다. 그들 사신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좌군도독부 즉 국방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온 것인데 그 사신들은 전부 귀화한 조선족 환관들이다.

 

그들이 오면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까지 나가서 영접을 하였고 그들 앞에서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옥체가 만복하신가를 물었다.

 

이런 조정을 환관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들 중 한 놈은 돌아갈 때 "전번 사신들은 후하게 대접했다는데 왜 이번에는 이 모양인가. 내가 이런 초라한 옷을 입고 오니 사람같지 않으냐" 면서 제 옷을 잡아 뜯고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이런 환관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연일 큰 잔치를 베풀었고 심지어 그 환관들의 고향은 특별 우대를 했다. 직산현을 군으로, 밀양군을 밀양부로 승격한 것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