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8.진상품 :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구름위 2023. 4. 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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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품 :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시간이 좀 지나면서 중국으로 보내는 사절들이 점차 관행화되었다. 사절단의 행차는 정사, 부사, 서장관, 종사관, 통사, 위원 등 관속 40여 명 외에 수행하는 비장, 역관 등 수십 명이 따르고 그 외에 가마꾼, 마부, 군졸 등 하속이 있어야 하니 전체 규모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정기적으로 매년 4번씩 가고 그 외에 제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어서 연중 쉬지 않고 가지만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 동지 사절단이었다. 동짓날 전후 간다고 해서 동지 사절단인데 날씨가 추워 서로 가지 않으려 했다.

 

공물로는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화문석, 종이, 모시, 명주, 금 등을 가져가고 중국에서도 약간의 답례품을 주기 때문에 오고가는 깅이 모두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보다 더한 것은 명나라에 바치는 공녀였다. 젊고 미모에 머리까지 똑똑한 여자를 골라서 보내라는 지시가 시도 때도 없이 떨어졌다. 공녀뿐만 아니라 고자도 보내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환관의 쓰임새가 많은 터에 자체 숫자가 적으니 속국에서 주문했을 것이다.

 

공녀는 조선 시대가 처음이 아니다. 뿌리가 깊어서 고려 충렬왕 이후 공민왕 때까지 약 80년 동안 처녀 공납사건이 50여 회나 일어났다. 원나라에 공납한 공녀 숫자는 남아 있는 기록으로만도 150명이 넘는다.

 

고려 고종 때는 몽골이 침입하여 고려가 항복하는 조건으로 동남동녀 각 1천 명씩을 요구한 적도 있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끌려간 공녀들은 대부분 궁전의 시녀나 노비가 되었다. 물론 몽고 말기 기황후라는 고려인 출신 여인이 가장 큰 출세를 하였으나 그녀의 후광을 입은 기씨 집안 사람들이 고려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극심하게 농단하였고 그 위세가 대단하였으며 일족의 무리들이 반란까지 도모하다가 모두 참살되었다. 그러자 고려왕에게 복수한다면서 몽고군 1만 명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명나라 시대가 되어서도 부정기적으로 그런 요구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공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자 당장 전헌색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동녀 모집에 들어갔으며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진혼색을 설치하여 전국 각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13세 이상 25세 미만 처녀들을 모두 골랐다. 그러자 온 나라가 흉흉하여 이를 피하려고 몰래 서로 혼인을 시켜버리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세종 1년에 중국에서 온 사신 황엄은 불경을 인쇄할 종이 2만 장과 고자 40명을 요구했다. 세종도 마찬가지로 별수 없이 달라는 대로 보냈다.

 

1521년 중종 16년 5월 20일, 대사헌 홍숙은 여자와 고자 뽑는 일을 명나라 사신이 이미 여러 번 재촉했는데 명나라 새 황제가 이런 폐단들을 제거하고 있다 하니 등극사가 가는 편에 이런 실상을 알리도록 건의햐기도 했다. 영의정 김전도 명나라 사신들이 고자를 보내지 않으면 노할 것이니 우선 어린 고자는 약간 명이나마 뽑아보내도록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자 중종은 결국 그들의 말을 따랐다.

 

확실하게 공녀 관습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다. 명나라는 청나라를 북쪽 야만 오랑캐라고 불렀지만 차라리 오랑캐들이 더 예를 알았던 결과가 된다.

 

조선에서 의주 땅은 중국으로 보내는 진상품 창고였다. 한꺼번에 공출하여 가져가는 것이 힘들어 사전에 이곳에 귀한 진상품들을 미리 비축했다. 그러다가 보낼 일이 있으면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새종 때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예물은 해마다 내려오는 전례의 방물 외에 별도로 말 50필, 황금 안장 4개, 석등잔, 종이 2마 장, 초피 5백 벌, 적호피 1천 5백 벌, 청서피 5천 벌, 교기 30필, 세부면 30필이고, 황태자와 중궁에게는 석등잔 각 3개, 교기.면주 각 10필을 더하여 준비하기도 했다. 또 평안도와 황해도 두 도에서 인삼 공출로 이러움을 겪고 있다고 하자 호조판서는 현재 인삼 2천근이 보관하고 있다면서 답변하였다.

 

해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뒤덮었던 이 황폐하고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중국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 중에 영조가 중국 칙사를 맞이하는 영접도라는 것이 있다. 중국 칙사가 거만하게 가마를 타고 오는데 영조가 그 칙사에게 극진하게 허리를 굽혀절하는 모습이다. 칙사 대접이라는 것은 조선 용어인데 왕부터 그런 식으로 영접을 하고 있으니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은 왜 조선이 중국처럼 왕의 명칭을 건방지게 조, 종이라 하느냐 책망을 해왔다. 그냥 조선국왕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신라 고려 시대 이래로 잘못되고 그릇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이어받아 왔는데 이를 뉘우칠 줄 모르고 승계하여 왔으니 이는 실로 무지에서 망령되이 저지른 죄입니다. 이것으로써 죄를 주신다면 신은 비록 만 번 죽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연히 중국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모두 조선 왕 아무개라고 적어 보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 중국으로 도망가기를 원하며 보낸 편지에서도,

"이제  오직 부모의 나라로 돌아가서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이같은 조선 왕조의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심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