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로 시작해서 역모로 끝난 조선 오백 년
동학군의 요구 12개 조항에 담긴 조선의 실체
조선에서 역모사건으로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온 것은 선조 때의 정여립 사건이고 광해군 때 영창대군 역모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조작된 사건이었다. 영의정 정철은 정여립 사건을 지휘하여 실질적으로 반대파 동인 1천여 명을 처단했다. 선조는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내가 정철에게 속았구나"라며 한탄했다.
영창대군 사건 때는 궁 안팎에서 무차별적으로 관련자들이 끌려가고 고문을 받고 옥에 가둘 공간이 없어 죄상이 좀 작은 자들은 석방시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노비들도 고문당하고 여자도 아니도 노인도 고문당하여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이 즐비했고 철물거리에는 나마다 끔직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여립은 지금 뛰어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당시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체제하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자였다.
전주에서 태어나 과거에도 급제했고 관직도 거쳤지만 당쟁 가운데서 왕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낙향, 진안군의 죽도에 서실을 짓고 사람들을 규합,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으로 관군이 당하지 못하던 왜구를 무찌르는 등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대동계를 만들어 겨울에 한강이 얼면 서울로 진격하려 했다는 역모 모함을 받고 관군에게 쫓기자 죽도로 들어가서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이다. 조정에서 그를 역모자로 단정했지만 지금은 누명을 쓴 것이라는 설이 더 강하다.
이 사건 이후 호남은 역도는 고향이라는 낙인이 찍혀 관직을 주지 않는 등 차별정책이 이루어져 오늘날까지도 호남 멸시의 시발점이 이 사건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심지어 임진왜란 와중이던 1596년 선조 29년에는 종실의 후예로서 관의 양곡을 모집하던 임무를 띠고 있던 이몽학이 그가 조직한 동갑계원 700명을 사주하여 임진년 이후 대기근으로 굶주리던 농민들을 선동,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왜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수천의 농민이 호응, 청양, 대흥을 휩쓸고 서울로 가던 도중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그의 부하 두 명이 현상금을 노리고 이몽학의 목을 베어 바치고 말았다.
얼마나 국가관이나 왕실에 대한 존엄성이 메말랐으면 국가의 운명이 정체절명의 순간이었던 전쟁 중에 반란을 일으켰을까? 임진왜란 중에는 이몽학 외에도 송유진 역시 충청도에서 역모를 일으켰다. 국가기강 바로 세우고 왕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하자 수많은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만큼 백성들이 집권 세력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역모 사건은 그 숫자가 너무나 많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일어나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승려 소덕유는 제주도가 벽지라서 역모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선조 22년 자체 왕국을 세운 다음 서울과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했다.
또 가장 큰 역모 사건으로는 동학란을 들 수 있다. 이 반역은 규모가 가히 남북전쟁의 수준이었고 일본과 청나라가 개입하는 등 국제적인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동학혁명, 갑오농민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894년 고종 31년에 전북 고부군에서 시작되었다.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어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등을 요구하며 봉기가 일어났다. 1차 봉기는 고부에서, 2차 봉기는 광주에서 일어났다.
관군 토벌대와 협상하면서 그들이 요구한 12개 조항은 아래와 같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류의 천민에 대한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체 면제
12. 토지 평균 봉작
이 요구조건 속에 조선왕조의 실체는 다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들이 오죽했으면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인가. 조선 오백 년 동안 하나도 시정되지 않고 내려왔던 잔인한 규정들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잇다.
만약 가정법이지만 동학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합병도 없었을 것이다. 수십만 농민군이 항쟁하는데 일본이 들어올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원군 등의 정치적인 술수로 막강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면서 동학농민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20만 병력이 나중에는 5천도 못되는 숫자로 줄어들고 말았으니 그 참혹한 실패를 어떻게 표현하랴.
20만이라고 하면 남쪽의 남자들은 대부분 나섰다고 보면 된다. 그들은 비명에 갔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상한 몸으로 노후를 보내면서 도끼를 들고 산과 바다로 나가 헤매면서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돌아가셨다. 비록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이 뿌린 피와 혼은 이 땅에 스며들어 일제 치하 36년 내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그들의 개혁 사상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동학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그 흔한 TV드라마에 한번 등장하지 못하였고 임권택 감독이 유일하게 영화로 한 편 만들었을 뿐이다. 방송 기획은 여러 번 올라갔으나 그때마다 반대 의견이 일어서 제작에 실패했다고 한다. 은연중 민중혁명을 선동한다는 것이 반대의 논리다. 민중봉기 같은 것이 가망도 없이 사라진 오늘날의 시대지만 아직도 그 함성이 겁이나는 것일까.
'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조선의 대표적인 반역, 반정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0) | 2023.04.10 |
---|---|
11.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0) | 2023.04.10 |
9.역모로 시작해서 역모로 끝난 조선 오백 년(1) (0) | 2023.04.10 |
8.진상품 :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0) | 2023.04.10 |
7.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0) | 202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