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모로 시작해서 역모로 끝난 조선 오백 년
1천 회가 넘는 역모 고변
조선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많은 역모사건이다. 왕을 몰아내고 새 정권을 수립해야겠다는 무력 음모가 역모인데, 우리 현대사에서도 군부 쿠테타가 두 번이나 있었으니 조선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백 년을 이어 이렇게 줄줄이 역모가 발생했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흔했던 것이 아니다.
'워낙 왕이 황음무도해서'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복수심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무리들이 일으킨 반정이 대부분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은 권력에서 밀렸고 핍박받던 서인들이 반격을 한 것이며 반란의 명분이 망해가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대명주의 하나뿐 다른 명분은 내세울 것이 없다.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니요 왕이 특별히 실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역모나 반정들은 왕 개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왕조의 권력 자체에 대한 반란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성공한 반정은 중종반정, 인조반정 두 개뿐이지만 그 밖에도 왕이 난을 피하여 서울에서 도망친 큰 반란은 두 번 더 있었다. 1624년 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이 난 외에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있다. 이 역모는 지방의 양반들 일파가 일으킨 반란이다.
인조 2년, 이괄이 서북방면에서 쳐들어오자 인조는 황급히 남쪽으로 공주까지 피란했다. 이때의 서울 참상이 상당히 심각했다. 왕을 따르는 백성이 없고 오히려 서울에 입성한 반란군 쪽에 백성들과 사대부들이 다투어 투항을 했다. 이때의 국민정서가 그 정도였다는 것이 과연 인조정권이 어떤 정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괄이 서북방면 방어군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원인은 간단하다. 인조반정 때 자신의 공로가 컸는데 자신을 제외하고 별로 공적도 없는 무리들이 대거 포상을 받는 대신 자신은 다시 북방의 한직인 군 지휘관으로 밀려난 데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실록에는 나와 있지만 실상은 서북방면 부사령관으로 이괄을 선정하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래서 가장 적임자로 이괄을 선정해 보낸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반정 공신들의 파벌싸움이 벌어져 이귀 등 반대파들이 이괄을 제거하기 위해 쉬지 않고 모함을 하면서 궁지로 몰자 괄괄한 무인으로서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괄의 반란은 실패하고 만다. 서울 궁궐을 점령하고 반정이 성공한 것으로 자만에 빠져 있다가 뒤따라온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던 서대문 밖 안산전투에서 대패하여 반란군이 흩어지고 이괄은 이천으로 도망갔으나 반란이 실패한 것으로 판단한 부하 장수 일부가 이괄을 포함한 지휘부를 모두 살해하자 반란이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살아남은 일부 그의 추종자들이 청나라(후금)로 도망쳤다. 그래서 그들은 청나라 황제를 선동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청했다.
인조는 아무 잘못도 없는 광해군을 몰아낸 역적이며 청국의 적이니 조선을 쳐서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을 공격할 때 어디가 취약하며 어디에 군대가 얼마 있으며 강화도를 미리 봉쇄하여 도망갈 도주로를 막아야 한다는 등의 정보를 모조리 제공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청군은 정묘년에 바람처럼 내려왔고 다시 10년 후 병자년에도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남한선성에서 버티던 인조가 내려와 삼전도에서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 내부 정보 제공자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는 속전속결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역모 고변 사건은 이일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가장 많았던 시기가 광해군 때로 대략 400여 회나 된다. 매년 평균 30여 회의 역모 고발이 들어왔으니 한 달에 평균 2~3번 꼴이었다. 한마디로 역모로 날이 새고 날이 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진작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역모 고변이 들어 왔고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광해군은 또 그런 소리려니 했다가 당하고 말았다. 또 수하의 근위대 장수들이 대부분 반란군에게 포섭된 뒤였다. 그래서 한양 외곽 성문과 궁궐문이 반란군이 도착함과 동시에 저절로 열렸다.
조선에서 광해군 다음으로 인조, 그다음으로 숙종-정조-명종-선조-중종 순으로 역모 고변 숫자가 많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고종 때 갑신정변도 3일 천하로 끝난 실패한 역모였다.
조선 시대에 출세의 지름길은 과거급제하는 것이지만 영달하는 방법은 바로 역모 고변이었다. 주변에 역모 혐의가 탐지되면 즉각 고발해야 한다. 엄중 수사로 사실로 드러나면 그 고발자는 영달하여 특진을 거듭하고 정권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영달을 위해서 허위 고발을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단순한 사회 불만분자를 역모로 묶어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광해군 때 김직재의 역모사건이 대표적인데 그 사건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1612년 광해군 4년 봉산군수였던 신율이 적발한 사건이다. 신율은 관내에서 김경립이란 천민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주제에 맞지도 않게 자신은 군역을 면제받았으며 병조판서와 왕이 발급한 명령서를 가지고 있다는 허풍이었다. 신율은 즉각 김경립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시작했다. 그가 분명히 왕의 도장인 어보와 관인이 찍힌 문서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위조문서였다.
신율은 판서 신점의 손자였다. 남이 대신 지은 글로 과거급제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양반 사대부들이 그를 상대를 해주지 않았고 벼슬도 현감 정도로 맴돌아 항상 앙앙불락하던 처지였다.
그는 봉산군수로 부임한 뒤로 잔혹한 행동을 거듭했다. 좀도둑을 하나 체포하면 혹독한 고문을 가했는데 대나무 못으로 열 손가락의 끝을 찔러 마음대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작은 절도범이지만 반드시 큰 도둑으로 몰아 조작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보고를 올리던 자였다. 그 때문에 왕과 조정에서는 그를 업무에 뛰어난 수령으로 알고 직급을 올려줬다.
이런 때에 어보를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했으니 신율은 당연히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가혹한 고문으로 문서 위조범에 불과한 촌민 한 사람을 역모범으로 만들어냈다. 어보와 관인 등을 위조해 역모를 도모할 시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물품으로 몰았고 그 배후에는 8도에 각각 대장이 있다느니 장수를 정했다느니 서울을 공격하려 했다느니 등으로 크게 엮었다.
자백이 황당하고 두서가 없었지만 진술을 주워 모아 중대한 역모사건으로 장계가 올라갔다. 아니면 말고 식이 당시의 역모 고변이다. 이니면 말고는 지금도 우리 정치인의 단골 메뉴다. 이런 관행이 바로 조선시대에 이러한 역모 고변에서부터 비롯된 나쁜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모 고변은 의금부에서 무조건 체포하여 국문을 해야 했다. 그래서 김경립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이 시작되었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대북파는 이 기회에 반대파인 소북파를 완전히 몰아내기로 작당하고 사건을 교묘히 비틀었다. 그래서 소북파 대신들 상당수를 연계시켜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구속시켜 국문하였다.
심지어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여섯 번째 아들인 순화군의 양자 이태경을 추대하려 했다는 진술까지 받아내어 이태경을 처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름이 오른자 중 소북파였던 성균관 학록 김직재도 끌어내어 모진 고문으로 수많은 허위 자백을 빋아내고 관련자 100여 명의 소북파들을 완전히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몰락한 소북파들이 인조반정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고 실록은 이를 김직재의 역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하기만 하다.
신률은 이 공적으로 일약 참판으로 승진하고 영풍군에 올랐지만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
영조 때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일종의 양반 반란이다.
청주 송면 출신 양반으로 소론이었던 그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정희량 등 과격파와 역시 정계에서 쫓겨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시 삼아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쟁탈을 계획했다. 당시 경상도 사대부들에게는 관직을 일체 주지 않았던 때라 경상도 쪽의 호응자가 많았다.
그는 스스로를 대원수라 칭하고 1728녀 영조 4년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충청병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했다. 이어서 각처에 격문을 돌려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북상을 거듭,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에 이르렀다. 그러자 진압군이 출동하여 안성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패하자 죽산으로 도망갔으나, 계속적인 추격으로 산사에 숨어 있던 중 현상금을 노린 마을사람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해 3월 26일 대역죄로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이것이 이인좌 반란 사건의 개황이지만 그 후유증은 더 복잡하다. 이 사건 이전부터 당초 사대부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에서 실각된 후 다시는 등용되지 못한 몰락한 양반층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 과 이인좌의 난 이후 그들의 불만이 더 팽배해졌다.
이들을 4색 당파별로 보면 북인과 남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몰락한 사대부들이 도처에 있었지만 경상도에서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조정에 대한 불만이 푹발직전이었다. 그러던 터에 1681년 인조 9년에는 합천에서 광해군 복위사건이 일어났다. 억울하게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광해군을 다시 모셔 오자는 역모사건인 셈이다.
이 사건으로 경상도와 충청도, 호남의 가담 양반들 40여 명이 처형되고 6명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 본거지인 합천은 역적의 고을로 낙인찍혔다.
이 사건은 몰락한 경상도 양반들의 집권 세력에 대한 궐기나 다름 없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몰락한 소론 세력의 반격으로 강원도에서 교영계 조직이 역모사건을 일으켰다. 교영계는 처음 훈장 유봉성이 아동을 가르칠 목적으로 조직된 서당계였으나 역모를 시작하면서 교영계로 이름을 바꿨다. 이들은 양반이었던 심정연을 필두로 미륵신앙과 결속하여 영동지역의 유랑민, 승려 등 불만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춘천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이어서 서울을 공격할 셈이었다.
이 사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연루자 수십 명이 처형되었다. 1775년 영조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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