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예전부터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 나라현의 정창원에는 신라 시대 고문서가 한 장 남아 있는데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인구 구조를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보면 노비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다. 고려 시대에도 매우 낮았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증한 것인데 이유는 미스터리다. 연구 자료도 없고 결과도 없다.
우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 포로를 노비로 삼는다. 우리나라도 가끔 왜구를 붙잡아 노비로 썼는데 그 노비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주인댁 여자를 강간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쪽의 말갈족, 여진족을 붙잡아다가 노비로 삼은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 숫자를 아무리 보태도 얼마되지 않는다.
어떻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죄인이나 포로 때문에 노비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결국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다. 조선은 진실로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였다. 지금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대표적인 언어였다.
태조 때부터 빚 진자는 양민이라 할지라도 노비로 삼았는데 그것을 '부채노비'라 불렀다. 한마디로 가난한 백성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노비의 숫자도 불어난 것이다.
한일합방이 되어 조사를 해보니 서울의 양반촌은 북촌을 비롯하여 통틀어 800호 미만이었다. 궁궐과 권력자들이 노비의 태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흔히 인도의 신분제도가 최악이라고 하지만 그 나라는 우리와 다르다. 전쟁으로 빚어진 타 종족간의 대립이 그런 천민계급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단일 종족이다.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말을 쓰며 같은 땅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같은 동족에게 그런 수모를 받으며 평생을 살았다. 일본도 황족과 무사계급인 사족, 그리고 보통 백성인 평민 외에 천민계급이 있었다. 그 천민은 죄인이나 전쟁 포로 등으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은 숫자였다.
도대체 자기 나라의 같은 민족을 이렇게도 많이 노비로 부리며 사고파는 나라가 동서고금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이의 <만언봉사> 상소문-
그들은 상민들을 백성이라고 호칭하는 대신 하천배들이라고 불렀다. 조정 대신들이 어떤 사건에 대해서'그렇게 하면 하천배들도 비웃을 것 입니다'라는 식으로 상소나 대화는 비일비재하다. 현종 1년 송시열은 상소에서 '도라지나물 같은 것은 하천배들이나 먹는 천한 것이니 나랏돈으로 사들리이지 말라'고 아뢰고 있다. 이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나라가 조선왕조였다.
1428년 세종 10년 5월 26일 <세종실록>에 의하면 좌사간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된다고 상소하는 내용이다.
"천하의 이치는 명분입니다. 명분이 분명해야 상하가 서로 보전할 수 있고, 국가가 편안하게 다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하늘에 있고 아래에 못이 있는 것처럼 상하 귀천의 명분을 밝혀야 백성의 사는 것이 안정될 것입니다.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고, 천한 것이 귀한 것을 받들며, 위는 아래를 부리고 아래는 위를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도리로서 당연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입니다."
지금 경주에 가면 양동마을에 노비들이 기거하던 집이 남아 있다. 주인집 담장밖으로 마치 가축우리 같은 노비들의 집들이 빙 둘러 가며 늘어서 있다. 이 노비 집들은 담장 밖에서 주인집의 경비 초소 역활도 했다. 안을 들여다보면 경탄스럽다. 이런 방에서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방 한 칸과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아궁이 한 칸이 전부다. 마치 무덤처럼 작은 집이다.
이런 생활을 하며 천대 받던 쌍것들이었지만 그러나 국난을 당하자 결국 국가를 살렸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이런 하천배들이지 사대부들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도 수군은 절대 다수가 전라도 쌍놈들이다. 쌍놈 중에서도 개쌍놈이라는 사노비나 백정 출신들이었다. 경상도 수군도 마찬가지다. 수군은 군대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힘들기 때문에 기피 직종 1순위였다. 조금만 요령 있어도 다 빠지고 주인대감이 지목해서 강제로 내려 보낸 노비들, 관에서 징집한 천민들이 좌다 수군이 되었다. 왜적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초전에 부산 앞바다 경비나 해전은 커녕 소문만 듣고도 경상좌.우수영이 한꺼번에 소리없이 무너졌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장수나 병사들이 죄다 도망쳐 버린 것이다. 권율 장군을 따라 서울까지 반격한 군대도 모두 전라도 충청도 쌍놈들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공은 모두 양반들이 차지하여 쌍놈들은 싸우다가 죽는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은 결국 이란 쌍놈들이 살린 나라였다.
왜 쌍놈들이 도망가지 않고 용감히 나사서 싸웠을까?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에서? 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것은 노비가 전쟁 중 큰 공을 세우면 면천을 시켜준다는 영의정 유성룡의 당근책이었던 '면천법' 때문이었다.
선조가 이를 허락하자 머뭇거리던 전국의 쌍놈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왜군 목을 하나 베어오면 상을 주고 둘을 자르면 면천이고 셋 이상 자르면 관직을 주었다. 이런 명령이 내려왔으니 가만히 있을 쌍놈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결국 쌍놈들은 사기를 당한 꼴이 되고 만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돌아가면서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다. 쌍것들이 쥐꼬리만 한 공로를 핑계로 양반이 되려 하니 나라의 근본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면천법은 취소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니 선조도 없던 일로 처버렸다.
그 뒤로 조선의 어떤 왕도 반상철회나 노비해방 등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이 거의 없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0여 일 간 항쟁하는 동안 남쪽의 조선군이 구원을 위해 올라오다 광주 근방에서 소수의 청군에게 5만이나 되는 조선군이 대부분 지리멸렬되어 대패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오합지졸로 구성된 조선군이 청군의 기습 공격에 조선군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조선군의 패전 원인은 장수의 무능을 비롯하여 지휘계통이 통일되지도 않았고 지방군이 올라오는대로 각개약진으로 전투에 임했고 상호연결 작전도 없이 전투에 임했던 원인도 있었으나, 가장 근본적 원인은 경상.전라.충청도 상놈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끌려온 조선군이 훈련도 되지 않은 오합지졸일뿐 아니라 싸울 의지가 없었고 전세가 조금만 위태로워지면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의병보다는 수수방관하거나 부화뇌동하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일제 시대 전국에 의병이 넘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용인, 광주를 기반으로 싸웠던 의병대장 이익삼은 수하에 부하가 겨우 15명이었다. 1907년 가장 의병이 많았던 호남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대토벌 작전을 벌인 일본이 당시 동원되었던 일본군의 숫자가 2천이었고 당시 순국한 의병이 103명이었으니 숫자상으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일본으로 장사나 공부를 하러 갔다.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이 부지기수였다. 의주로 도망치던 선조까지도 "지금 왜군의 절반은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웬 말이냐?"묻고 있는 것이다.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인이 왜 일본군에 가담하고 있는지 그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조선 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호남에서만 20만 명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항일 의병은 그 숫자의 20분지 1도 안 되는 숫자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신씨의 주장과 달리 역사학연구소에서 편찬한 <한국근현대사>에서 실제 항일의병의 규모는 다르다.
1905년 4월부터 활빈당 등 농민 무장세력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던 경기, 강원,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들이 봉기했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을사조약 강제체결 소식과 함께 더욱 거세어져 갔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봉건유생들도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척사파의 거두인 민종식과 최익현 등 양반유생들이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궐기하여 의병운동에 불을 댕겼다. 1906년 3월 충청도 정상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은 1천 명이 넘는 부대를 이끌었고, 5월 충청도 홍산에서 홍주성을 점령하고 공주 공략은 일분군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강원, 경북, 충북 접경지대에서는 신돌석, 정순현, 이하현 등이 태백산 줄기에서 봉기하였고 영해, 영덕 일대를 누비며 헌변분견소, 군청, 철도, 우편취급소, 세무소, 광산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하였다.
이처럼 의병들의 반일 항전은 1906년 말까지 중남부 지방에서만 60여 개 군에서 봉기하였고 서북부 지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906년 12월 충주금광 광산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였고 강원도에서는 교사들과 학생 등 200여 명이 의병부대에 합류기도 했다.
의병운동은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시키자 군일들이 일제의 해산 조치에 반대하여 의병대열에 참여했다.
1907년 8월 1일 시위대 제1연대의 제1대대장 박승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군대의 강제 해산에 항거했다. 이것이 불꽃이 되어 군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들의 항쟁은 전국적인 군인폭동의 신호가 되어 원주, 홍천, 충주, 제천, 여주, 강화도 등 지방에 있던 지방 군대도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총부리를 일제에게 돌렸다.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한 것은 의병전쟁을 전국으로, 전 계층으로 확신시키는 역활을 하였다. 해산군인들이 가져온 무기는 화승총에 주축이던 의병의 무장력을 강화했고, 특히 매복괴 그습 공격 등 유격전술을 발전시키면서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장기전을 벌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항쟁 지역도 전국 340여 개 군 가운데 몇 개 군만 빠질 만큼 무자그대로 전국적인 양상을 띠었다.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의병부대 구성도 민중적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유생과 농민, 해산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소상인, 지식인, 승려, 화적 등 여러 계층의 민중이 참여했고 의병장도 양반 출신보다 평민출신이 많았다. 그런가운데 양반유생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다. 그래서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 바람에 실패하였는데 전술적으로 연합부대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무모한 정면공격을 시도한 것 등 유생들이 지닌 봉건의식 때문에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참다운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데 있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1908~1909년 동안 의병 운동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를 만큼 절정기를 맞았다. 그 중에서도 대중적 기반이 튼튼했던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했다. 이 지역의 전투 횟수나 참가 의병 수는 1908년대는 대략 전체의 25% 정도였으나 1909년에는 전체의 50~60%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하였다.
1907년 9월 전라남도 장성에서 기삼연, 고광순 등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타오른 호남의병은 1908년 5월 이후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등 새로운 의병장과 의병부대가 뒤를 이어갔고 비록 신분은 양반일지라도 사회경제적 처지가 일반 농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상면에서도 척사 이념보다는 국권회복 그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옛 명망유생 의병장들과는 크게 달랐다. 따라서 의병 안에는 신분차별도 거의 없었고 의병장들이 직접 전투에 앞장서는 등 의병부대 안의 결속력이 그만큼 강력했다. 전술작전도 소부대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매복, 기습, 분산, 집중 등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였다.
항일의병전쟁이 절정을 이루고 호남의병이 장기적인 항전체제를 마련하자,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려는 속셈으로 호남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래서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호남 지역의 해안과 육지의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마치 빗질 하듯이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호남 지역은 일본군이 저지른 무자비한 살륙, 방화, 약탈 등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1907년 8월부터 1914년 말까지 일본군이 학살한 의병 수는 1만 6,700명, 부상자는 3만 6,770여 명이었지만, 단 2개월의 토벌 작전 기간에 의병장 103명, 의병 4,138명을 체포.학살하였다.
뭉쳐야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미국에서 영화는 애국심과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국가를 매도하고 저항심을 기르는 것이 태반이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관제 작품으로 매도되고 만다.
그런 기질을 흔히 군사독재의 잔재, 일제의 잔재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근본이 바로 조선 오백 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국가와 사대부들에게 짓밟혀온 조선 백성들의 한 맺힌 피가 우리 몸속에 암암리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각종 계라든지 동창회라든지 향우회, 산악회 등 각종 조직이나 모임이 많다. 조금만 연줄이 닿으면 조직을 만들어 한데 모이려는 본능이 민족성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가 벅찰 정도다. 남자들이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이리저리 얽혀서 최소 열 개 이상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다반사다.
왜 그렇게 서로 모여서 세를 불려야 하고 서로 등을 기대야만 안심을 하는 것일까? 결국 그런 과다한 조직은 심리적인 불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원인의 해답 역시 조선 오백 년이라 생각한다. 사대부들에 눌려 질곡의 삶을 살아 왔던 우리 상놈들은 가문도 없고 성씨도 없고 오직 가족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약간의 친구나 이웃밖에 없었다. 국가나 지역 양반들에게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죽거나 몰락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그런 불안심리, 보호본능이 지금도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모여서 뭉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상놈들이 살 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런 의식이 우리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양반 상놈이 사라진 지가 놀랍게도 이제 겨우 백 년도 안된다. 해방 후부터 따진다면 겨우 육심여 년밖에 안 된다.
그 시절의 일본어가 지금도 사회 도처에서 이무렇지 않게 쓰이고 있는데 하물며 오백 년 깊은 한의 뿌리가 벌써 사라질 리 없다. 우리는 아직도 양반 상놈의 이분법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예의 범절, 조상 숭배, 제사 및 성묘를 우선시 하고 가문의 족보를 따지고 조상을 자랑하며 한문 글귀를 내세우며 유식한척 떠벌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나중에 양반이 된 상놈일 가능성이 많다.
조선은 당시 인구 600여 만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런 가혹한 계급사회를 고집했을까?
유교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없애고 가식적으로 만들며 지배층에게만 특혜를 준 학문이라는 외국학자의 비판이 있기도 하다. 물론 노비제도를 없애고 양반 상놈 가르는 신분제도도 없애야 한다는 고결한 제안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다. 그것도 조선을 통틀어 임진왜란 때 전세를 뒤집은 유성룡의 '면천법'이나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동서고금에 없는 천한 법이니 즉각 폐지가 어려우면 매매라도 금지해야 한다"고 외쳤던 실학자 이익 등 겨우 몇 사람뿐이다.
우리나라가 우아한 선비의 나라였으며 우리가 모두 족보를 지닌 왕족이나 명문가의 자손이며 양반의 후예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편의 거대한 가식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진정으로 상놈의 나라였으며 우리들 태반은 너 나 할 것 없이 헐벗고 굶주리렸던 상놈들의 자손이다. 그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현실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우리 표현 중에는 '솔직히 말하자면'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거짓말만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솔직히 말해 보겠다는 신호인 셈인데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가 대부분 상놈의 자손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정녕 없는 것일까? 왜 상놈의 자식이라고 욕을 하면 화를 내는 것일까? 아니 왜 상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지금도 그 상놈의 자신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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