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노비 값이 조랑말 절반 수준
조선 오백 년을 양반과 상놈 대립의 역사라고 일컫지만 대체 그 상놈이란 어떤 부류인가. 그 숫자는 얼마나 됐는가.
우선 왜 상놈이란 명칭이 생겼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일부의 견해로는 사농공상 분류 중 상인이 가장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아니면 보통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常)놈이라 했다지만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 중국 남부에 서쌍반납이라는 야만족이 살았는데 그들을 비하하여 쌍놈이라 부르던 것이 전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떻든 이 상놈이라는 호칭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여 비천한 계급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상놈으로 불리던 백성은 표현을 바꾸면 노비라는 말과 거의 동일어다. '하천배'라는 말도 마찬가지인데 '지극히 천한 일에 종사하는 백성'을 그렇게 불렀다.
노비는 팔고 사는 물건 같은 신분이다. 노비의 계급도 두 종류인데 왕궁이나 관청에서 일하면 관노비이고 민가에서 일하면 사노비이다. 관노비는 먹고사는 걱정이 없지만 사노비들은 땅 한 뙈기 없어 부자 주인댁에 빌붙어 살거나 가난한 주인이면 여기저기 품팔이를 하고 나무꾼 같은 일을 하면서 오히려 주인댁에 돈을 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거지나 다름없던 백성들이다. 게다가 살림이 기울면 주인은 가축처럼 노비를 내다 팔았다.
관노비들이 한 곳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을 한 반면 사노비들은 언제든지 매매의 대상이 되엇기 때문에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었다.
대체 조선 시대 노비의 숫자는 얼마나되었을까?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당시 서울 인구는 12만 명 수준이었다. 그 중에서 절반이 노비였다. 노비 외에 중인이라고 불리는 하급관속이나 땅을 가진 농민이 상당수 있었고 그 외에 한 줌의 양반이 있었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관노비나 사노비 할 것 없이 양반들이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가축이나 마찬가지였고, 왕실의 노비는 왕이 마음대로 포상품으로 나눠주었다.
세종 1년 1월 한확에게 노비 10구를 내려 주다.
성종 1년 3월 봉선사에 노비 40구를 내려 주다.
현종 1년 11월 고부사 정유성에게 노비 7구를 내려 주다.
숙종 7년 12월 역적 허견 등으로부터 몰수한 노비 500여 구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마치 물건을 배급해 주는 듯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 관청, 지방, 공신들에게 나누어 줬다. 왕실 가족의 결혼식이 있으면 선물로 줬음은 물론이다. 사람이 아니라 시체나 가축을 헤아릴 때 쓴 호칭인 구(口)라는 말을 썼다.
중종 2년 11월 적물 노비를 1등 공신에게 나눠 주다. 또 노비가 모자란 종친부에도 배당을 하다.
숙종 12년 3월 현감 김창국의 딸을 숙의로 삼고, 노비 150구를 내려주다.
때로는 외국 사람에게도 나눠 줬다.
세종 6년 2월 중국인 장청 일행에게 살림살이와 전토 및 노비 3구씩을 주다.
이 노비들은 모두 관노비들이다. 국가 소유 노비로서 모든 관청과 지방 향교 등에는 노비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대궐의 장예원은 그 노비들의 보급창이었다.
이 노비들을 사고팔 때 가격이 얼마였나를 보자.
태조 때 노비값이 너무 싸기 때문에 가격을 좀 올리자는 제안이 나왔다. 태조 7년, 형조에서 "무릇 노비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5백 필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거슬리는 일입니다. 원컨데, 지금부터는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인 자는 4백 필로,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자는 3백 필로 정하소서" 해서 왕의 허가를 받았다. 오승포는 중하급 정도의 베, 무명으로 1필의 가격은 당시 쌀 5되 정도였다. 이 가격은 그 뒤 들쭉날쭉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조선 내내 노비 가격은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러한 노비들은 주로 역적 집안의 노비나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1469년 예종 1년 역적으로 처형된 강순의 처첩과 자녀들을 노비로 보내 정경은 참혹하다.
"난신 강순의 아내 부귀를 곤양에, 그 첩 춘월을 웅천에, 아우 강말생을 해남에, 서얼 아우 강춘생을 고성에, 아들 강석손의 첩 옥금을 하동에, 첩 관음비를 사천에...영속시키고..." <예종실록 1년 2월 3일>
끔직하다. 죄인의 처첩은 물론이고 부모형제까지 노비로 삼아 전국에 뿌려졌다. 강순은 영의정까지 지낸 무장으로 남이 장군의 역모 사건 때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사면되었다.
심지어 근대 시기인 고종 때에도 이런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제천의 죄인 남종삼을 가둔 다음 그 처는 창녕현에, 9세 딸은 산청현에, 7세 딸은 영산현에서 계집종으로 삼고, 4세 아들은 의령현에서 종으로 삼도록 한다. 이런 식이다. 각각 다른 곳으로 노비로 보내자는 보고가 올라오자 고종은 어린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 버리지 말고 어미가 있는 창녕현으로 같이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렇다면 노비들은 죄인인가 가솔인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에서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상당한 숫자가 노비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니 전 왕조의 인물은 모두 정적이 된다. 당연히 정적 제거가 제1차 목표였을 터이므로 그들은 노비로 신분을 강등시켜 버리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노비들이 많아진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노비가 낳은 자식 역시 노비가 되는 제도 때문이다. 한 번 노비이면 평생 노비이고 그 자손도 노비가 되는 것이 조선의 전통이다. 당연히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한 줌의 사대부 양반들이 지배하는 노비의 나라가 됐다.
조선 중기 통계로 본 신분 구성
노비 다음으로, 사고파는 신분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대접 못받는 천민이라 불리는 신분이 상당수 되었다. 팔천(八賤)이라면 사노비를 포함하여 광대, 공장(대장장이, 옹기장이), 도살업자, 기생, 무당, 승려, 상여꾼을 일컫는다. 지금으로 치면 대중예술가, 기술자, 종교인 모두 천민이다. 각종 장사꾼, 가마꾼, 역졸들도 모두 같은 처지였다. 팔천을 싸잡아 모두 '백정'이라 불렀다. 그리고 별도로 호적관리를 했다.
보통의 노비들은 조선 중기 이후 악착같이 돈을 모아 관아에 바치거나 주인댁에 바치고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사례가 많았다. 가난한 주인댁을 나와 따로 살면서 노비문서를 없앴다. 평민 혹은 중인, 양민이라고 불리는 계층이 된 것이다. 농민은 조선 시대에 세금을 내는 계층으로 바로 이 계층들이었다. 이들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땅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의미다. 양민이 된 이들은 각 지역 관아 이방들에게 뇌물을 바쳐 성씨를 얻고 호적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순서였다.
지역에서 이방을 포함한 육방은 가장 막강한 실력자였다. 각종 역사 드라마에서 사또 앞에서 두 손을 잡고 아첨하는 계급으로만 그려지고 있지만 지방관으로 부임한 수령도 이들의 도움 없이는 정사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이 육방이야말로 지방 토호세력의 상징인데 그런 힘을 가진 세력에게 잘 보이면 호적 정도는 쉽사리 고쳤으리라 추정된다. 그렇지만 백정 신분은 조선이 망한 뒤에도 그 멍에를 벗지 못했다. 따로 특별 관리를 하는 호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이 망하고 난 마지막까지도 백정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천민들과 노비, 하천배를 모두 일컬어 '상놈'이라 부른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전 인구의 70% 정도가 상놈이었다. 그러다보니 군역을 해야할 양민이 급속히 줄어들게 되었고 장부상 군대만 남아 있었을 뿐 실제 군대는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군대가 없었고 병자호란을 당하였으나 군대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상놈들을 동원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선조에게 건의하여 '면천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면천법은 없던 것으로 하여 다시 원상복귀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후기로 갈수록 상놈은 급속히 줄어들고 그 대신 양반이 증가하였다.
하바드 대학 교환교수였던 한국학 전문가 와그너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1663년 현종 4년 한성부 북부지역 호적으로 통해 본 조선사회의 구조>라는 논문을 통해 지금의 서대문구와 마포구 일대, 수색리, 가좌동, 연희궁, 합장리, 여의도, 홍제동 일대 681호 총 인구 2,374명 중 양반이 220명으로 9.27%, 양민이 334명으로 14.7%, 천민이 1,820명으로 76.4%라는 숫자를 내 놓은 바 있다.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더래도 천민이 절반은 훌쩍 넘는다. 물론 그쪽은 원래 천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는 반론이 있기는 하다.
우리나라 신분제 사회의 변동을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사람은 일제 때인 1937년경의 일본학자 사카타 히로시이다. 조선 시대 호적 자료가 남아 있는 대구와 울산 지역 등의 자료를 토대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도 앞의 와그너 교수의 자료와 대동소이하다.
그가 1684년 숙종 10년 대구 지역의 성분 분포를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양반 5% 내외, 중인 20% 내외, 나머지 75%가 천민계층이다. 그 숫자가 1858년이 되면 그 숫자가 완전히 뒤집어져서 양반 집안 호적이 올라 있는 숫자가 인구의 70.3%로 늘어나 있다. 약 180년 만에 천민이 사라지고 양반이 반대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우리나라 호적을 연구한 학자들이 김용섭, 정석종, 최재석, 소머 빌 등 내외국인 합해 십 여 명 정도인데 서로 차이가 있고 분류방식도 달라 일률적으로 단정 짓기가 어렵지만 대동소이하다.
공통적인 것은 조선왕조 후반기 들어 급속도로 양반 계층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며 그만큼 상민들이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그 많던 노비들의 숫자가 2.2%까지 줄어들었다. 불과 100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다.
사고파는 노비 신분은 조선 후반기 들어 언양 지역은 심지어 0.3%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고종 시대에 비로소 노비매매 철폐, 완전 철폐령이 내려졌지만 그 이전에 이미 뚜렷한 과정이나 명령 없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는 그 원인으로 조선왕조의 국가 기강 해이, 사회문란을 꼽았다. 모두 매관매직이나 다름없는 가짜 양반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 학자들은 사회문란이 아니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중농층이 늘어난 데 따른 자연적인 신분 상승 현상이라고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는 여기서 거론할 것은 아니다. 다만 신분 상승이 되었다 해도 없던 성씨를 부여하는 관청이 따로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유럽에서는 평민이 귀족이 된다는 것은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야 왕이 공식적으로 작위를 수여하는 경우가 원칙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근거도 없이 모두 슬그머니 양반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분류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서 양반으로 호적에 올랐다고 해도 실제 사회계층에서도 그러 변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다만 서류상의 문제일 뿐 그들은 결코 양반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결국 조선은 정직하게 말해서 기본적으로 백성의 태반이 상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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