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58

28.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3)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정보 부재라는 말이 그토록 잘 들어맞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왜란 발발 전 대처방안이라는 것이 겨우 통신사를 1회 파견하여 일본 막부와 30분 정도 공식 대면만 하고 왔으니 그런 대면에서 어떻게 전쟁위기 따위를 파악할 수 있으랴. 일본 막부의 관상만 보고 돌아왔서 보고를 올렸으니 어떤 원시국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왜관도 있어서 일본인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와서 살았으며 그들은 모두 정보원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조정이나 관헌들의 동태도 수시로 파악하여 본국에 전하고 있었다. 우리 측에서는 일본 파견 관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마도라 다..

27.몽고의 역참제도

몽고의 역참제도 13세기 중엽이었다.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중앙아시아 초원의 한 모퉁이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듯, 초원에는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져 거대한 기마군단이 되었다. 기마군단은 척박한 중앙아시아 고원에 흩어진 부족들을 차례로 ‘접수’하고, 일사불란하게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군단의 리더로 초원의 황제가 된 칭기즈칸. 그가 정복한 땅은 무려 777만 평방 킬로미터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정복지는 더욱 확장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시아와 유럽, 태평양과 대서양을 하나로 이어버렸다. 200만 명도 안 되는 유목민이 1억 인구를 150여 년에 걸..

26.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1) 양재역(良才驛)·도(道) 『고려사』 병지 참역조를 보면, 과주(果州) 소관의 역참은 오직 양재역(良才驛을 良梓 또는 良材로 표기) 뿐이다. 역도(驛道)는 주도(州道)에 속해 있었고 중심역은 덕풍(德豊, 현 河南市 덕풍동)이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역로와 역도 정비에서 좌도충청도정역찰방 소관의 역과 동화도(同化道)가 재편성되어 양재도(良才道)가 되면서, 과천현 소관으로서의 양재역은 그대로 양재도 12역의 으뜸역이 되었다. 양재도의 역과 역도로서의 비중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하삼도(下三道)로 뻗는 3대로(左路·中路·右路) 가운데 첫 역도이기도 하며, 우로(右路)의 첫 역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가령, 과천을 통..

25.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1. 과도기적(過渡期的) 교통로(交通路) (1) 역도(驛道)의 정비 조선왕조가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국의 교통망은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기에 앞서 과도기적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와 같은 내용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경기에 속한 역도 가운데 좌도충청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중로(中路:한양∼통영)에, 경기강원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관동로(關東路:한양∼평해)와 관북로(關北路:한양∼경흥), 우도정역찰방에 속한 역들은 대개 의주로(義州路:한양∼의주)의 시발 부분에 속하는 역들로 살펴진다. 그러한 비중 때문에 찰방(察訪:종6품)관할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역시 의주로의 연장으로..

24.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2)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호미,괭이 등을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서류상으로 조선 군대는 항상 근무가 가능한 병력이 기병 2만 3천, 보병 1만 6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잔왜란 2년 후에 조사해보니 합해서 8천 명도 안 되었다. 한양의 방위사령부나 다름없는 수원의 군사 정원이 1만 7천 명인데 1596년 당시 병력은 1천 미만이며 평안도 역시 정원이 1만 명인데 1사 500명 밖에 안 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란 다음 해에 왕이 피란에서 돌아왔는데도 한양을 지킨 것은 군사 300명뿐이었다. 이들은 그나마 조정에서 밥을 먹여주니 그걸 먹으려고 자원한 숫자였다. 한양에 상주군 1만 명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몇십 년 후 광해군 때에도 상비군은 훈련도감 300명뿐이었다. 그래..

23.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솜이불을 펼쳐서 적탄을 막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이 왔다. 사령관 이여송의 첯 마디는 경악 그 자체였다. "아니 조선군은 무기가 없는가?" 조선 군사들이 들고 있는 것은 죽창과 몽둥이, 아니면 농기구였다. 승자총통이며 대완구며 비격진천뢰만 내세우지 말기 바란다. 군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복장과 무기는 각자 알아서 준비하여 동원시 모여든 것이 조선군이었다. 군장과 무기는 비싸다. 전시에 시골 농민과 천민들이 장만할 능력이 없다. 칼을 장만할 능력이 없어 집안의 호미를 녹여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칼은 몽둥이와 부딪히면 부러지고 만다. 그런 빈약한 군사들이 파수(보초)라도 잘 봐줬으면 좋겠는데 파수를 세워 놓으면 도망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두 번째 탄식은 ..

22.대마도 원정은 승리한 전쟁이다?

대마도 원정은 승리한 전쟁이다? 조선에서 외국과 전쟁을 해본 것은 딱 5차례다. 일본과 3차례, 청국과 2차례 모두 패전했다. 임진왜란을 승리한 전쟁이라 일컫는 주장도 있지만 결코 승리가 아니다. 왕이 국경선까지 도망가고 대궐이 불타고 국토의 태반이 점령당했으며 백성 수만 명과 왕자 2명까지 포로로 끌려간 전쟁이 어떻게 승리한 전쟁인가. 일본과의 세 번의 전쟁 중 가장 소규모는 대마도 정벌전쟁이다. 우리나라가 그때 모처럼 외국을 정벌하러 갔다. 고려 때도 중국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 정벌에 나선 적이 있지만 그때는 폭풍이 불어 함대가 궤멸되는 바람에 싸움도 제대로 못해 보고 돌아왔다. 세종 시대 대마도 원정을 마치 승전처럼 생각하여 조선의 치적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를 혼내 주었다는 식..

21.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위의 사건들은 대부분 왕조에 대한 원한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은 개인끼리 무고였다. 지방 수령을 하급 관헌이 무고한 사건도 줄을 이었고 그와 같은 혐의로 평안도 서북면 도순무사 최윤지를 모해한 전 낭장 김영수가 목이 잘렸다. "윤지 부자가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 라고 모함했기 때문이다. 일벌백계로 김영수의 사지를 찢어서 각도에 돌렸지만 그 뒤로도 이런 무명장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노비와 여자 문제로 들어오는 무명장도 많았다. 1398년 태조 7년 전 관원 김귀생이 익명서를 만들어 전 현령 이적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지를 찟어서 조리돌렸다. 그 사건의 발단은 김귀생이 이적과 노비를 가지고 심히 다툰 일 때문이었다. 범인을 잡으려고 이적을 불..

20.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무기명 투서를 제보한 판관을 파직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 민족성이 나쁜 점을 거론할 때 그 원인을 항상 일제나 군부독재 시절의 영향이라고 강변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는 지금 연간 고소고발 건수가 세계 최고이다. 근래 몇 년의 평균치만 해도 연간 40만~50만 건 내외에 달한다. 인구 1만 명당 80건 정도인데 일본은 1만 명당 평균 1.3건이다. 우리나라는 사기 사건도 세계 최고다. 자동차 사고, 자살률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나라가 됐을까? 이것이 일제나 군부독재 탓인가? 아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우리 국민의 특징이다. 일종의 민족 성향 때문이다. 조선에서 횡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무기명 투서'였다. 무기명 투서를 조선에서는..

19.서얼이란?

서얼이란? 서얼(庶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이 낳은 자손을 말하는 것으로, 양인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또한 서얼의 자손도 서얼로 불렸다. 서얼은 양반의 신분에 속했으나 가정에서 천한 대우를 받았으며 상속권(相續權)도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이 혈통이나 결혼으로 인한 인척 관계로 출세가 규정되었다. 서얼에 한해서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 허용하였으며, 이도 또한 대부분이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귀천의식(貴賤意識), 유교의 적서(嫡庶)에 대한 명분론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제도이다. 서얼은 수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