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의 대결은 장개석이 꿈에서도 그리던 일이었지만, 막상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때 당장 중국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압도적인 일본군에게 연합군은 연전연패를 당하며 중국은 더욱 고립됩니다.
제철소, 군수공장을 비롯해 얼마안되는 공장들을 개전초기에 거의 상실해 버린 중국은 무기와 탄약, 철강, 석유등 전쟁에 꼭 필요한 물자를 전적으로 홍콩과 버마로드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시작과 동시에 홍콩을 점령하고 42년 3월 7일에는 랑군마저 함락되자 중국은 외부와의 통로자체가 차단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미, 영의 원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들 서구열강이 이토록 허약할줄은 완전히 예상밖이었던 것이죠.
일본제국의 최대 판도(출처 : http://blog.daum.net/dandakhan/16543555)
42년 봄의 극동과 태평양은 말그대로 일본 해군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였습니다. 특히 진주만 기습의 주인공인 나구모 주니찌중장의 제1항공함대는 최강부대로, 41년 12월 10일 영국 최강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를 격침시킨 이들은 말레이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영, 미, 네덜란드, 호주 연합해군을 일방적으로 괴멸시킵니다. 42년 4월에는 서쪽으로는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의 동양함대를 아프리카로 쫓아버리고 남쪽으로는 호주의 포트다윈항까지 폭격하죠. 이러하니 이당시 일본군 수뇌부의 기고만장함이 어느정도였겠습니까? 완전히 겁대가리를 상실한채 간이 배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본의 밑천은 그야말로 달랑달랑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전선 하나만으로도 이들에게는 벅찬 것이었는데 말그대로 "돈먹는 블랙홀"이었습니다. 37년말에 24개 사단에서 41년에는 51개 사단으로 급격히 증가된 육군의 반수 이상이 중국전선에 투입되어 41년까지 전사자만 2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사상자는 중국군보다는 훨씬 적은 것이었지만 일본군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메이지이래 30년대까지 일본군은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남성 대부분이 당연하게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정예주의에 따라 전체 징병대상의 15%에 불과했고 전면전을 대비한 잘 훈련된 대규모 예비군을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급히 징집된 간부와 병사들의 질적 저하는 당연한 것으로, 기본적인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채 투입되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문에 군의 기강은 엉망이었고 항명과 탈영, 퇴폐화에다 하극상과 상관살해도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산동성에서는 독립보병 제42대대소속 중대가 술을 먹고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이 본부로 도피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월남의 수렁에 빠졌던 미군의 막장모습이 바로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대다수 일본군의 모습이었습니다.
연간 국방예산은 전체 정부예산의 70%가 넘었으며, 민수경제는 군부의 억지에 가까운 쥐어짜기로 완전히 파탄직전이었습니다. 군수생산능력은 37년대비 5배나 늘어났지만 이는 미국처럼 전체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초생산까지 거덜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다 육해군간의 유치한 경쟁과 개념상실한 경제 운영으로 있는 자원까지도 마구 낭비하죠. 히틀러씨의 독일도 자원을 흥청망청 써댔지만 이들에게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어 뒤늦게나마 전시체제를 확립해 생산효율을 높이지만 일본은 끝까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미국보다 생산성에서 뒤지는 것은 고사하고 막판까지도 생산 효율 개선이나 확충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달랑거리는 밑천과 개념없는 전략은 개전 7개월만인 6월 5일 미드웨이에서 바로 뽀록이 났고, 단숨에 수세로 몰리면서 과달카날 공방전에서 일본군은 엄청난 소모전에 허덕이게 됩니다. 과달카날과 솔로몬, 뉴기니아 등 44년 초까지 일본 연합함대와 남방군은 도처에서 패주하면서 13만명의 전사자와 22만톤의 함정, 8천대의 항공기를 상실합니다. 이후에는 주도권을 잃고 연합군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단지 시간벌이만을 위해 병력을 무익하게 희생시키죠. 44년에 오면 남방에서 자원 실고 오는 선박들도 줄줄이 격침되어 경제 자체가 마비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 전선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42년 5월만해도 한창 잘나갈때 일본은 남방작전은 금방 끝날테니 병력을 도로 중국전선으로 돌려 이참에 중경을 공략하고 짱박혀 있는 장개석을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만 한낱 잠꼬대로 끝납니다. 과달카날의 전황이 악화되고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반격하자 남방으로 병력과 자원을 빼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죠. 게다가 화북과 만주에서 팔로군의 세력확대와 유격전도 일본군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41년~42년 일본군은 이른바 "신멸작전(삼광작전)"으로 적극적으로 나서 그들 대부분을 토벌하죠. 44년 5월에 개시하는 "대륙타통작전(이치고작전)"까지 중국전선은 화중과 화남에서(주로 장사를 중심으로 한 호북성에서) 대규모 충돌없이 국지전만 반복됩니다. 일본군으로서는 영구적 점령이나 포위섬멸같은 전략적 승리가 아닌 단지 제한적으로 중국군에게 전술적 타격을 주고 치고 빠지는 것이었지만 중국군도 재빨리 반격하여 영토를 대부분 탈환하면서 양쪽 모두에게 의미없이 큰 희생만 강요하게 됩니다.
유럽전선이 1순위였던 미국에게 태평양전선은 2순위에다, 중국전선은 아예 "덤"에 불과했지만 루즈벨트는 5억달러의 조건없는 차관을 통크게 내놓습니다. 그리고 장개석의 요청에 따라 군사고문을 파견된 것이 바로 조지프 스틸웰중장이었죠. 그의 이무는 중국, 버마, 인도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의 지휘를 맡으면서 함께 장개석의 참모이자 군사고문의 역할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패튼따라 북아프리카로 가서 롬멜과 싸웠을 스틸웰은 20년대에 중국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다 중국어도 능통하여 나름대로는 "중국통"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최악의 인선이 되었죠.
스틸웰과 장개석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 물과 기름의 관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책임은 장개석보다 스틸웰에게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은 군인으로서는 미 육군에서 몇손가락에 들어가는 유능한 명장이었지만 정치적 야심 또한 매우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사고는 20세기초반 중국이 서구열강의 반식민지이었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고 장개석이 영, 미에게 고분고분했던 청말 관료들이나 북양군벌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위상으로는 단지 일개 군사고문에 불과했음에도 그는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를 보여주며 장개석에게 상전으로서의 대접을 노골적으로 요구했고(임진왜란때 이여송처럼) 자존심 강한 장개석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죠. 중국을 동등한 동맹국이 아닌 미국의 괴뢰로 대접하고 월권에 가까운 내정간섭을 하는 이상 양자는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44년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장개석을 제거하고 백숭희나 진성으로 바꿔치는 음모까지 진행하기도 하다 결국 장개석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바꾼 루즈벨트에 의해 스틸웰은 쫓겨나고 보다 온건하고 중국을 존중하는 웨드마이어로 교체되죠.
※ 스틸웰의 장개석 암살 음모에 관한 글 참고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5046910
스틸웰만 아니라, 중국을 무시하는 것은 처칠, 스탈린, 루즈벨트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단 한가지도 장개석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장개석은 맨하튼계획이란 것이 뭔지도 몰랐으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는지도, 전쟁이 45년 8월 15일에 갑자기 끝날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루즈벨트는 장개석을 제쳐둔채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둘이서 짝짜꿍하여 만주에서의 소련 이권을 보장해 주고 이를 사후에 장개석에게 강요하죠. 스탈린은 신장 위구르의 국경을 수시로 넘봤고, 처칠은 중국으로 향할 미국의 물자를 중간에서 수시로 가로채 장개석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한마디로 약소국의 비애였죠. 그들은 유럽인특유의 인종적 편견과 선입관에 따라 중국을 약하다고 무시했지만 장개석의 중국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5년간이나 잘 싸웠고 막상 자신들은 지난 반년간 여지없이 아작난 것은 외면했습니다.
42년 3월, 중국 동부해안 전역이 봉쇄되고 홍콩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함락됨으로서 스틸웰에게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는 버마의 방어였습니다. 버마를 지켜내야 중국이 가장 시급하게 원하는 식량과 무기를 공급할 수 있고 중국군을 재무장시켜 중국 동부전선에서 일본군에게 반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첫 임무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버마를 수비하던 알렉산더휘하 영국 식민지군은 사기도 형편없었는데다 미, 영, 중 서로간의 불협화음과 협조 부족때문이었습니다. 스틸웰 자신 또한 "눈작고 키작은 동양인" 일본군을 완전히 깔보고 있었죠. 장개석은 버마 수비를 돕기 위해 중국의 전략예비대이자 최정예인 두율명의 제5군(신22사단, 96사단, 200사단)과 감여초의 제6군(49사단, 55사단, 93사단)을 파견했지만 말그대로 아작납니다.(이후 추가로 2개군이 더 파견) 신병으로 구성된 55사단은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고 중국군 유일의 기계화사단인 제200사단도 사단장을 비롯해 대부분이 전사합니다.
스틸웰 자신도 완전 거지꼴이 되어 버마의 밀림을 1500km나 헤쳐서 인도국경까지 쫓겨갑니다. 패전의 원인은 급조된 연합군의 한계와 준비 부족, 적정에 대한 정보 부족에 있었지만 스틸웰은 중국군이 무능하고 태만해서라고 노골적으로 맹비난을 하며 제5군과 제6군 사령관부터 사단장, 연대장까지 모조리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중국군은 투입된 병력의 70%이상을 잃고 장비 거의 전부를 상실했음에도 말이죠. 오히려 제대로 싸우지 않고 패주한 것은 영국의 인도사단들이었습니다. 이런 스틸웰의 태도는 중국군 장성들의 반발과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미국에 대한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갑니다. 최초 루즈벨트가 주었던 5억달러의 차관을 제외하고는 정작 가장 필요한 무기와 물자는 한달에 수십톤도 안된데다 이 대부분도 스틸웰의 버마원정군과 센놀트의 중국주둔 미공군에 주어졌고 동부전선의 중국군은 총알 한발도 받지 못합니다. 장개석이 자신의 최정예부대는 사천성 깊숙한 곳에 짱박아두고 팬더먹이나 주며 아껴두었다, 라는 스틸웰의 주장은 왜곡된 말에 불과합니다. 스틸웰휘하의 버마원정군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무기가 들어와 미국식 사단으로 개편하는 것은 거의 전쟁 말기인 45년 봄에 와서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틸웰은 물자를 같이 나눠쓰자는 장개석의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남들앞에서는 괜히 친한척하는 세사람. "오월동주"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듯...
출처 : http://kr.blog.yahoo.com/kpkpns/2130
스틸웰은 또 장개석이 섬북의 공산군을 포위하는데 50만명을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맹비난을 하고 이들을 돌려서 버마와 동부전선에 투입하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환남사변이후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된 상태였습니다. 양자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연안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장개석의 명령에 복종은 고사하고 일본군보다 국민당 정부군을 주적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호북성을 침투한 공산군과 싸워 1천명이상을 사살하는 등 42년부터 43년까지 화중과 화남에서 국공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보고 일방적으로 양보하라는 것은 내정간섭을 떠나 중국 자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었고 장개석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만한 것이 아니었죠. 게다가 이들 역시 열악한 상황인 것은 똑같았는데, 호종남의 직계 중앙군조차도 식량과 물자 부족으로 매달 수백명이 탈영하고 기아와 질병으로 허덕여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44년에 오면 제대로 전투력을 갖춘 부대는 요요상의 신22사단, 손입인의 제38사단 등 스틸웰의 버마원정군휘하 X군과 Y군의 8개사단(그것도 갓 훈련을 마친) 밖에 없었습니다. 그밖의 300개에 달하는 구식사단들은 피폐 그 자체였습니다. 주로 1차대전이전에 만들어졌던 구식 소총 한정을 2~3명이 번갈아 쓰고 한명이 죽어야 그것을 다른 사람이 쥐고 쓸 수 있었습니다. 총탄도 일인당 20~30발에 불과했고 차량이나 기관총, 대포는 사단 직속조차도 아예 없거나 극히 적었습니다. 보급이 안되니까요. 장개석은 스틸웰에게 "평시에 일본군 1개 사단을 상대하려면 중국군 3개사단이 필요하고, 공격하려면 5개 사단이 필요하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중국군 사단은 연대나 여단급인 2~4천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절반은 비전투병력이었습니다. 반면 일본군 사단은 1만5천에 달했고 화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제공권까지 있었습니다.
스틸웰휘하 버마원정군 소속 제5군(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이 차이는 43년 11월~44년 1월의 호남성 상덕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중국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루며 상덕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투입된 9개군중 3명의 사단장이 전사하고 제4사단과 9사단, 57사단은 90%이상이 전사하여 사실상 전멸되었습니다. 일본군의 독가스공격으로 중국군은 전사자만 6만이 넘었고 일본군도 1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냅니다. 이때문에 설악의 제9전구는 사실상 파멸이나 다름없었죠.
<43년 상덕전투를 다룬 중국의 블록버스터 "첩혈고성", 국내에 정식개봉은 하지 않은 것으로...어둠의 루트에서 구해 보시길-.->
4개월후인 44년 4월부터 시작되는 이치고작전(대륙타통작전)은 약해질대로 약해진채 7년간이나 외부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동부전선의 중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였습니다. 무능의 극치를 달리며 일본의 "원균"으로 불리는 고도의 반일주의자 무다구찌의 막장식 임팔작전과 달리, 이치고작전은 당시 일본 육군이 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병력을 총동원하여 철저한 준비끝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버마에서 스틸웰은 당연히 승리했고(그것도 초반에는 연패당했음에도) 반대로 화중, 화남에서의 중국군은 파멸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하남성에서 최초의 일격을 받아야 했던 탕은백의 부대는 기동성이 결여되어 일본군 제12군에게 각개격파당했고 한달 보름에 걸친 형양 수비전에도 패배하여 방선각의 제10군은 항복했고 미공군기지가 있는 계림이 함락되고 남녕이 떨어져 8개월동안 중국은 중일전쟁기간 최악의 참패를 당합니다. 장개석이 설악의 충성심을 의심해 그 꼴을 보고만 있었다(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라는 주장 역시 거짓말이며 장개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센놀트의 제14항공대는 열심히 지상을 지원했지만 연료 부족으로 출격 소티는 제한받았고 제공권 확보조차 여의치 않죠.
※ 대륙타통작전에 대한 글 참고 : http://www.necrosant.net/zbxe/15221
미국은 연안의 공산군을 주목하고 44년 6월 OSS의 주도하에 연안을 방문합니다.(이른바 "딕시사절단") 당시 미국은 동구권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신비주의가 있었는데, 유고의 티토 빨치산에게도 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지도자들은 이 방문자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환대합니다. 사절단에 동행한 기자들은 모택동과 공산당을 찬양하는 기사를 열심히 본국으로 날립니다. 7월 1일자 "중국에서는 공산군이 강력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게재되었고 "썩어빠진 장개석정권"과 달리 연안의 공산정권은 매우 민주적이고 비밀경찰도 없으며 토지개혁으로 활기와 적극성이 넘친다고 홍보합니다. 주중대사인 헐리 역시 연안을 오가며 양자간의 관계 개선에 나섭니다.
물론 이들은 모택동이 보여주는 것만 보았을 뿐이지만, 그 의도가 정말 순수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당시 스틸웰과 장개석의 대립은 막장 직전까지 간 상태였고 루즈벨트는 장개석에게 "스틸웰에게 모든 지휘권과 작전권을 넘기지 않는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끝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장개석으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모택동과 공산군을 찬양하고 직접 지원을 시사한 것은 사실은 장개석을 핍박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내에서도 장개석과는 대립관계인 백숭희, 이종인같은 군벌들을 장개석의 대항마로 키워주려고 하죠.
장개석은 이런 미국의 음모와 술책에 격분했고 스틸웰을 중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라는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타협안마저 거부되자 결국 항복한 쪽은 루즈벨트였고 44년 10월 18일 스틸웰은 본국으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스틸웰을 대신해 새 참모장으로 온 것은 위드마이어중장이었습니다. 그는 장개석에 대해 훨씬 우호적이었고 그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표현합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던 44년 겨울이 끝나고 캘린더가 다음해로 넘어가자 유럽과 태평양의 다른 전선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황도 점차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45년 1월 12일, 2년에 걸쳐 건설된 "스틸웰공도(레도공도)"가 버마와 운남 곤명의 1800km을 연결하였고 수송차량에 실린 대량의 물자가 드디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종전까지 3만4천톤에 달하는 물자가 전달되죠. 버마는 완전히 탈환되었고 일본은 중국에서도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최정예부대 거의 전부를 상실한 일본 중국주둔군은 오합지졸만 남아 도박과 향락에 빠졌으며 많은 병사들이 탈영하여 중국군에게 항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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