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육군 총사령관 하응흠 1급상장과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간 항복 조인식(9월 9일, 남경 중앙육군사관학교) ※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45651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에 따라 태평양에서의 모든 전쟁은 끝납니다. 물론 8년간의 중일전쟁도 이로서 막을 내리죠. 8년의 전쟁동안 중국군은 전사자 103만명을 포함해 총 321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민간인 피해는 913만명에 달했습니다. 총 전쟁비용은 559억$에 달합니다. 상장 8명을 포함해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만도 206명이 전사합니다.(중국군이나 일본군은 준장계급이 없음)
한편,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40만5천명이 전사했으며(해군 7,600명 포함) 총 241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숫자는 태평양전쟁동안 총 전사자 195만명중 1/5에 달했습니다. 또한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도 129명이 중국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제해권과 제공권, 화력, 물자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일본은 끝까지 중국 하나를 이기지 못했으며 원시적인 장비로 싸웠던 중국군에 비해 결코 만만치 않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것이죠. 상대의 목을 죄는 장기전에서 결국 이긴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반면, 공산당은 125,100회의 대소전투를 치루고 일본군 520,463명을 살상했고 6,213명을 포로로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주군과 남경괴뢰군(왕조명정권)을 상대로도 490,130명을 살상했고 512,933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포 1,852문, 기관총 11,895정, 소총 682,831정을 노획했다고 선전합니다.(출처 :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반면 자신들은 전사 16만명을 포함해 583천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하죠. 물론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말도 안되는 과장된 허위 선전에 불과합니다. 뭐, 공산국가들의 상투적인 10배 부풀리기야 북한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전쟁기간동안 국민당군은 수십만명을 동원한 대규모 전투만도 37년 7월의 상해전투를 비롯해 수십차례나 있었지만, 12만회가 넘는 공산군의 전투라는 것 거의 대부분은 심지어 1~2명이 접전을 벌인 것까지 포함시킨 것인데다 사단급 이상 전투는 손에 꼽을만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공산군 고위 지휘관중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했습니다. 국민당군과는 확연히 대비되죠. 물론 공산군 병사 개개인들은 매우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주력을 철저히 아껴두고 결전은 회피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이지만, 어찌되었건 대륙정권이 수십년간 주장해 왔듯 항일전쟁의 주역이 공산군이었다는 것은 뻔뻔한 날조이죠.
그럼에도 그동안 국민당군은 별로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것도 있지만 국민당군의 전투 대부분이 일본군에게 깨지는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미, 영, 소는 중국군의 역량이나 역할을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일본에게 더 밀리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식이었죠. 중국군은 매우 용감하게 싸웠고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으며 빼앗긴 영토는 곧 탈환했음에도 이런 점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죠. 반면 공산군은 거창한 대규모 전투는 없어도 자신들의 전매인 파르티잔 활동을 언론 선전으로 철저하게 활용했습니다. 연안을 방문해 모택동이 보여주는 것만 본 미국 기자들은 노쇠해지고 부패한 중경과는 달리 연안은 활기에 넘쳐 보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언급하겠지만 미정부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일본이 항복한 날, 장개석과 모택동 이 두사람에게는 평화를 누릴 여유따위는 없었습니다. 더이상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 양자는 서로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전리품을 챙기려는 신경전이 치열하게 시작됩니다.
8월 9일, 모택동은 "대일구적최후일전"이라는 제목의 무장봉기격문을 전 예하부대에 하달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적극적인 해방구의 확대"와 "일본군의 무장해제", "주요 도시와 교통 요지의 장악"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항일은 끝났다. 새로운 임무는 국내투쟁이다"라고 지시합니다. 본격적으로 국민당 중앙정부와 대결하겠다는 것이죠. 10일 밤 소련군의 만주진공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연안총부명령 제2호"를 내리고 화북, 열하, 만주 일대로 4개 집단군을 급파합니다. 특히 여정조, 장학시, 만의 등 팔로군내에 구 동북군출신 장군들을 찰합이성, 열하성, 요녕성으로 이동시킵니다. 15일에는 임표가 이끄는 1천명의 부대가 이미 열하성을 강행군하여 만주로 진입합니다. 화남, 화중에 있던 신사군도 산동과 화북으로 북상합니다.
고사포부대를 시찰하는 모택동(출처 : 맨앳암즈, 중국내전 1911-1949)
한편, 장개석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11일에 다음의 3가지 명령을 하달합니다.
1. 주덕의 공산군 : 모든 소속 부대들은 현 위치에 주둔하면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일본군이나 괴뢰군에 대한 무단 공격이나 무장해제를 금함
2. 일본군 및 괴뢰군 : 주둔 지역에 대한 치안을 책임질 것이며 공산군에게 투항하지 말 것
3. 국민당군 : 적극적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며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말 것
물론 공산측은 주덕과 팽덕회의 이름으로 장개석의 명령을 정면에서 거부하고 일본군 사령관인 오카무라대장에게 공산군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오카무라는 이를 거부했고 17일 장개석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겠음을 중경으로 회신합니다. 그리고 예하부대에 "중경정부가 접수할때까지 주둔지에서 이탈하지 말고 기다릴 것이며 절대 공산군에게는 항복하지 말 것, 필요하면 무력을 써도 좋다"라고 지시합니다.
오카무라로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중 공산당쪽이 반일감정이 더 높아 보였고 국민당쪽에 서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죠. 덕분에 그는 나중에 전범재판에서 무죄로 방면되어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장개석, 모택동 양자 모두 최종 목표는 동북이었습니다. 모택동은 45년 6월 11일에 막을 내린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동북은 우리당과 중국혁명의 최근 변화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중요한 곳이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다 잃었다 해도 동북만 있으면 중국혁명의 기초는 견고한 것이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혁명의 기초는 더욱더 공고한 것이다"
동북을 주시한 것은 장개석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우리가 동북을 탈취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양측이 모두 동북을 이토록 중요시한 것은 그 전략적 위치도 있지만, 풍부한 천연자원과 일본이 그동안 건설한 막대한 산업시설때문이었습니다. 동북은 면적에서 11.5%, 인구는 8%를 차지했지만 콩생산량은 전국의 70%, 산림면적은 37%, 중공업에서는 90%를 차지했고 석탄생산량은 36%, 철도는 41%, 석유생산량은 93%, 금광은 50%나 차지했습니다. 해외 수출에서도 37%에 달했고 노동자는 전국의 1/3에 달했습니다. 또한 선철은 8.5배, 전력생산은 2.5배 등 동북의 근대 공업은 본토를 훨씬 능가했죠. 본토는 오랜 전쟁과 극심한 인플레이션, 원료 부족으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는데 이것을 복구하는데 동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양측이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 욕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죠.
양자는 서로 경쟁적으로 동북으로 향했지만 이 레이스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장개석이었습니다. 일단 국민당군은 주력부대가 사천, 귀주, 운남 등 서북과 서남에 있었는데 반해 공산군은 주력부대가 화북에 있었고 45년 초반부터 동북에 적극적으로 요원들을 침투하여 해방구를 곳곳에 형성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소련군은 국민당측의 작전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기 위해 대련항을 통한 국민당군의 진입을 거부합니다. 이는 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죠.
미국식으로 무장한 국민당 정부군(출처 : 맨앳암즈, 중국내전 1911-1949)
또 호로도 상륙도 차단되었기에 부둑이하게 진황도까지 내려와 산해관을 통해 동북으로 진입하는 우회작전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소련군 철수가 연기되면서 국민당군이 주요 도시와 교통요지를 점령하는 것에도 큰 차질이 발생합니다. 이는 국민당군의 병참에 막대한 부담을 주게 되었고 나중에 동북에서 공산군에게 패하는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또 소련군은 관동군에게 압수한 대량의 무기와 물자, 의약품을 공산측에게 넘겼고 동북에서 산업시설과 발전시설, 물자를 대량으로 약탈하여 철수의 선물로 삼습니다.
또 양자의 무력 충돌도 노골적으로 벌어졌는데, 수원성의 집녕, 청수 등에서 정부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자 공산군이 공격해 점령했고 만주에서도 마점산 부대가 공산군의 공격으로 3천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합니다.
45년말 양측의 상황. 출처 :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이렇게 상황은 급속도로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미국의 중재와 설득으로 양자는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장개석은 재중미국대사인 헐리의 설득으로 8월 한달간 모택동에게 3차례나 중경으로 올 것을 초청합니다. 모택동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소련의 압박을 받고 국제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소련을 포함해 전 국제사회에서는 중국의 정통정권을 장개석의 국민정권으로 인정한데다 국내의 여론에서도 장개석의 초청을 거부할 경우 내전의 책임은 공산측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헐리 자신도 8월 19일에 연안에 방문하여 양자 회담을 적극적으로 주선합니다.
8월 28일 모택동은 주은래, 왕약비, 헐리 등과 함께 중경으로 왔고 40일간 회담은 진행됩니다. 이 중경회담의 결과(국공쌍방회담기요)가 10월 10일날 발표됨으로서 중국에서는 이른바 "쌍십협정"이라고 부릅니다. 내전의 즉각 중단, 연정의 실시, 양측 군대의 축소, 해방구의 해체 등이 논의되었으나 사실 결과적으로 제대로 이행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서로 밥이나 한끼식 같이 먹은 격이었죠.
46년 1월 마셜의 조정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드디어 100년이래 최대의 내전이었던 제2차 국공내전이 막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45년 말의 상황은 결코 공산군에게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순에 주둔한 1개 여단 전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동북에 주둔한 공산군 부대 곳곳에서 배신과 반란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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