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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한 이유는?

구름위 2023. 4. 1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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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을 앞에 두고 양측의 전력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정치 외교적으로나 모든면에서 국민당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국민당은 1945년 초부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와 자금을 지원받기 시작했고(1949년까지 총 40억달러) 그간 쌓아놓은 외화도 풍부했으며(약 9억달러) 그것을 기반으로 군대를 미국식으로 대부분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규군 병력에서(민병제외) 양측은 200만대 60만으로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다 국민당군은 풍족한 무기로 2선급 부대까지 무장시킬 수 있었죠. 게다가 국민당측은 화북, 화중, 화남을 비롯해 버마, 인도차이나등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며 획득한 무기도 엄청났습니다. 또 남경으로부터 미군사고문단의 지도도 있었죠. 국민당군은 세계 5대 강국으로서 UN 상임이사국의 하나가 되어 미,소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지지도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공산군은 이렇다할 국제 원조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다 만주 진공후에 소련으로부터 노획된 일본무기를 대량으로 원조받은(약 50만명분의 무기)후에야 어느정도 무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국민당측이 월등히 우세했고 장개석은 이 압도적인 기반으로 중앙군을 중심으로 한 총 200만의 병력으로 동북과 화중,화북,화남일대의 공산군 점령지역으로 진격했습니다. 공격군은 이른바 "5대주력"을 비롯해 기계화된 최정예 부대를 선두로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산군을 격파하며 거침없이 진격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동북의 대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하며 공산군의 新수도였던 하얼빈까지 점령했죠. 1947년 3월에는 호종남장군이 공산군의 상징인 연안을 함락시켰습니다.

따라서 장개석은 "곧 공산주의자들은 중-소국경의 산간오지로 쫓겨갈 것이며 비적떼가 되어 유랑할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를 기점으로 국민당측의 전략적 우세는 한계에 다다랐고 진격이 멈추자 1947년 하반기부터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고립되었고 이들에 대한 보급에 실패하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습니다. 특히 장개석은 병력이 모자르자 사기와 충성심이 형편없는 운남군같은 지방군벌군을 대량으로 동원했고 중앙군 사이사이에 끼워넣음으로서 전력을 보강하고 전의를 북돋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아킬레스건이 되어 지방군이 항복하자 공산군이 이 사이에 침투함으로서 중앙군은 고립되어 각개각파당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11월에 동북이 완전히 공산군측에 넘어가고 1948년 봄 임표를 선봉으로 공산군은 전면 반격을 개시하여 북경, 천진이 포위되었으며 부작의가 무혈항복함으로서 20만이 넘는 국민당군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9월에는 서주가 붕괴되어 남경, 상해까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른바 3대 전역(요심, 회해, 평진)에서 국민당군은 대참패를 당함으로서 군사적 균형은 완전히 공산군측으로 넘어갑니다. 항복한 국민당군은 공산군편에 붙어 아군에게 총부리를 돌렸으며 국민당내 고위간부와 장군들까지도 공산군에 투항하거나 스파이가 되어 온갖 정보를 넘기죠.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은 조지 마셜 국무장관의 강력한 건의하에 중국백서를 발표해 대륙에서의 공산측의 종주권 인정과 국민당에 대한 지원중단을 선언합니다. 

1949년 4월 공산군이 양자강을 도하하기 시작했을때, 세계 언론들은 "과연 적벽대전, 비수대전이 재현될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양측의 공방을 주시했으나 공산군의 철저한 사전준비와 국민당측 수비부대의 배신으로 이렇다할 전투없이 양자강은 무너졌고 4월 23일 남경이 함락되고 맙니다. 계속해서 상해, 광주가 함락되고 중경까지 진격해 옵니다. 국민당군은 금문도전투에서 모처럼의 대승을 거두지만 사천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강도 공산군에게 투항함으로서 국민당군은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철수하죠. 미국의 지원하에 약 100만에 달하는 대규모 철수는 2차대전의 덩케르크 철수이상으로 대혼란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1950년까지도 대륙에는 호종남, 탕은백, 백숭희등이 이끄는 약 100만의 병력이 남아 화중, 화남, 사천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하지만 1950년 6월까지 거의 소탕되고 해남도마저 함락됨으로서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완전한 참패로 끝납니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공산군은 금문도에 대한 2차 공격에 나서 대만을 수복했을 것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택동은 대만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한반도에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며 동북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한반도로 투입할 준비에 나섭니다.(김일성의 남침은 모택동에게도 그야말로 기습이었음. 모택동은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발발은 1951년정도로 보고 있었음) 그래서 양안의 관계는 현재와 같이 고착화되었죠.

 

그렇다면 왜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국민당은 공산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것인가.

첫째, 정치적인 측면에서 8년간의 항전이 끝나자 중국사회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국-공간 협상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국민당의 호전적인 태도에 있다고 공산군은 선전했고 이것이 중국 국민들에게 먹혔습니다. 특히 국민당은 전쟁이 끝나면 훈정을 끝내고 헌정을 하기로 약속했음에도 이를 파기했고 북경에서 일어난 학생, 교수들의 반장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했습니다. 따라서 국민당측은 급격하게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죠.

 

둘째, 외교적으로 국민당의 강경노선은 미국, 소련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미국은 마셜원수를 파견해 양측을 중재했으나 국민당은 협상을 깨고 공산측에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만주로 진입하고 공산군이 패퇴하자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소련은 노획한 일본군 무기를 대량으로 공산군에게 지원하여 공산군이 싸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협상을 깬 국민당측의 선제공격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미국도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고 1949년이 되면 중국백서를 발표해 아예 모든 지원을 중단합니다.

 

셋째, 경제적으로 8년간의 항쟁과 수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중국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직전상황이었습니다. 모처럼 얻은 대규모 차관과 원조자금으로 중국 경제를 살려야 함에도 장개석은 전쟁자금으로 사용함으로서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되었고 외화는 순식간에 바닥납니다. 이것을 공채발행과 화폐개혁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하여 중국 경제는 완전히 파멸상태가 됩니다. 부유층은 대량으로 물자를 사재기했고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더욱 촉발시켰죠. 1945년과 비교해서 1948년말이 되면 통화가치는 1/300이하로 떨어지게 됩니다. 특히 전쟁말이 되면 하루단위로 물가가 수배에서 수십배로 뛰죠. 공무원들은 월급을 화폐 대신 현물로 받았고 노동자들은 하루단위로 일당을 받았습니다. 물가가 하루하루 틀리니까 바로 돈을 받아서 물건을 사야했죠. 이러니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죠.

 

넷째, 전술적으로 공산군은 능력본위로 지휘관을 임명함으로서 임표, 주은래, 팽덕회등 군사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들이 많았으며 서로 사상적으로 통일되어 파벌이 없었습니다.(통일이후에는 서로 파벌을 형성하지만) 병력의 운용과 진퇴에서 매우 융통성이 있었고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모택동부터가 군사적 능력은 조조에 비견된다할정도로 뛰어났죠. 병사들에게도 획일된 명령 수행이 아닌, 융통성이 부여되어 스스로 판단하여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반대로 국민당군은 극심한 파벌로(심지어 소대단위까지도)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따라서 우군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소해할 정도였죠. 이러니 합치면 월등히 우세함에도 분열되어 각개격파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또 고위장교들은 전투보다 착복에만 신경썼고 장교와 병사들과의 괴리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중앙군과 지방군간의 감정대립, 중앙군 내에서도 직계와 방계간의 대립, 중앙군 직계내에서도 출신에 따른 파벌대립은 도저히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리가 없었죠. 또한 국민당군은 전술과 병력운영에서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고 적을 수동적으로 쫓아다니기만 했을뿐 능동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우세한 병력과 장비를 도무지 살릴 기회가 없었죠. 이러니 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전략적으로 애초에 장개석은 단순히 숫적 우세만 생각하고 적지로 무턱대고 병력을 투입하였습니다. 보급과 병참선에 대한 확보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잘될 것이다"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실책이었죠. 장개석은 자신이 군사적으로 아주 뛰어나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상 군사적 재능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그는 소부대단위의 지휘조차 중간 과정을 생략한채 멋대로 내림으로서 명령체계를 혼란시켰습니다. 히틀러의 간섭이 독일군에게 득이 되기보다 해가 된 것처럼 장개석도 그러했죠. 기계화, 차량화부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적을 쫓아다니다 기름이 떨어지자 멈춰버렸고(중국군은 사전정찰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몇백대에 달하는 우세한 항공전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죠.) 이들에 대한 보급은 실패했습니다. 5대주력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동북에서 괴멸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또 사기 낮은 지방군을 숫자 맞춘다고 투입했다가 투입과 동시에 항복해 버려 중앙군까지 싸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공산군은 전략적인 결전을 회피하다 국민당군의 진격이 멈추자 적의 후방을 돌아 포위함으로서 적의 사기를 꺾고 보급을 단절시켜 싸우지 않고 항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사기 낮은 지방군을 중심으로 투항공작을 해 중앙군은 적지에서 포위되었고 고립된채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다 괴멸되었습니다.

국민당의 패전 원인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장개석의 생각없는 군사적 모험이 월등히 유리한 입장에서도 패하도록 스스로 만들었죠. 장개석이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해 일단 동북은 포기하고 대륙의 확보부터 우선시했다면 공산군이 선제공격할리는 없고 세계 5대 강국으로서 위상을 확보했을 것입니다. 일단 집안부터 안정시킨후 밖으로 나갔다면 충분히 승리했겠죠. 소련도 중국 대륙에서의 국민당의 실력을 인정하고 공산측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모택동을 "짜가"라며 싫어했거든요. 소련의 지원은 단지 중국 대륙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수준이었고 결코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만주에서 일본이 건설한 막대한 공업시설에 눈독을 들였고 이것이 공산군에게 넘어가 공산군이 막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만주는 중국대륙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우세했고 선철은 8.5배, 전력은 2.5배, 시멘트 2.5배를 생산했습니다. 이것이 공산측에 넘어가면 국민당보다 강력해질거라고 생각했죠. 반대로 국민당이 차지한다면 중국 대륙에서의 물자부족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에 욕심이 나서 장개석은 별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공격했고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