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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의 혈전, 금문도 전투

구름위 2023. 4. 1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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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도 전투는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국민당군 약 4만이 상륙해온 중공군 1만을 문자그대로 전멸시켰으며 중공군은 상륙부대중 단 한명도 육지로 돌아온 자가 없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후반기에서 국민당군이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대만을 국민당의 최후 보루지로서 지킴으로서 현재와 같은 양안 대립 상황이 되는,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습니다.

참전병력 : 국민당군

- 제 12병단, 제 22병단 + 증원군 제 19군단 총 8개 사단 4만명
           중공군 - 제 10병단 4개 군단 6개 사단 2만명

 

1948년중반부터 중공군의 역습에 국민당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이른바 3대 전투인 회하전투, 평진전투, 서주회전에서 연전연패를 당하면서 그가 애지중지하던 최강부대, 이른바 "5대 주력" 모두가 전멸당하자 마오씨는 "이때야말로!"라면서 전 인민해방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중공군의 공세에 도처에서 국민당군은 패주하고 붕괴되었으며 운남군같은 지방군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였습니다.

 

1949년 1월 4일에 천진, 31일에 북경에서 부작의군 30만이 무조건 항복했으며, 4월 20일 제2, 제3 야전군이 양자강을 도하하고 그것의 수비를 맡은 부대들은 모조리 중공군측에 붙어버려 이제는 양자강 이남의 확보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처에서 참패하고 있다는 소식만 보고받는 장개석의 심정은 "애가 타서 잠이 안 온다. 뭘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라는 탄식 그대로였습니다.

4월에 상해, 남경이 함락당하고 광주, 중경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국민당의 선택은 사천으로 들어갈 것인가, 대만으로 철수할 것인가 양 갈래뿐이었습니다.

 

남경 함락이 목전에 다다르자 장개석은 수도를 광주로 옮기고 다시 중경에서 성도로 옮기며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천명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있었습니다.

 

1949년 4월 진성의 지휘하에 강소성, 복건성등을 비롯한 양자강 하류지역에 주둔한 국민당군은 동남연해 지역으로 후퇴해, 병력을 재편성한후 부대를 방어체제로 배치하였습니다. 제 6병단이 복주, 제 8병단이 호주, 제 22병단이 하문, 금문방어에 투입되었습니다. 한편, 해군 제 1함대가 절강성 연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제 2함대가 대만을 초계케 했으며 공군도 제 1, 4, 5 비행대대가 대만을 발진기지로 전투에 투입됨으로서 산동의 장산열도에서 금문도까지 배치된 병력은 총 64개 사단 30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맹공에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패배당하고 연안일대가 중공군 산하로 들어가면서 국민당군의 최후 거점이 된 대만의 함락도 이제는 초읽기에 들어서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7월부터 중공군은 대만 상륙작전을 결정하고 그 임무를 "불패장군"이라 불리던 엽비의 제 3야전군에 맡겼습니다. 엽비는 산하 제 28, 29, 31, 32군단에 상륙훈련을 명령했고 실제 작전에는 총 8개 군단의 투입을 계획했습니다.

한편, 국민당군에게 있어 6월이전까지는 금문도는 그다지 전략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지 못해 아무런 방어시설조차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자강이 돌파당하고 중공군이 맹렬한 속도로 남하해 오는 상황에서 대만성 주석겸 총참모장이었던 진성이 제 22병단 사령관 이양영에게 휘하 병력을 금문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한 이후부터 병력과 화기, 방어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하문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자 대만 방위의 전초기지로서 금문의 중요성은 화급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금문도는 총면적 150제곱km남짓한 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도서군도이고 인구도 고작 5만 남짓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문도는 대만과 겨우 하루 거리로 만약 여기가 뚫릴 경우 아직 대만방어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아무리 국민당군의 제해, 제공권이 우세하다 해도 대만 함락은 시간문제가 될 것은 명확한 것이었습니다.

 

"현재 국면의 어려움과 위태로움은 이미 극에 달했다. 금문, 하문은 중요하기 이를때가 없다. 동남지역의 군사적 성패는 이 지역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공비를 토벌하는 전체 국면의 안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장개석의 이런 강조에도 불구하고 10월 17일 하문마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한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요즘 골프와 투어로 유명해진 하문항은 금문과 가까워 대만 방어의 한 축으로서 해, 공군의 지원하에 국민당군 제일의 명장중 하나인 탕은백대장이 수비를 맡고 있었으나 국민당군은 이미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태로 싸우기도 전에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금문은 대만 방어의 종심축이었고 금문 함락이 곧 대만 함락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반대로 중공입장에서 반드시 함락시켜야할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었습니다.

9월 19일 제 3야전군 휘하 제 10병단 지휘부에 금문 점령의 임무가 떨어지고 9월 20일부터 10월 22일까지 하문시를 거점으로 금문을 시계 회전방향으로 마치 병풍처럼 병력을 집결시켜 반포위했습니다. 10월 9일에는 대금문도와 대륙사이에 있는 대, 소등도를 공격해 국민당군 3개 연대를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하였습니다.

 

그 일대의 주민 소개령이 선포되었고 9월 16일부터 금문도에 대한 포 사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진지구축과 함께 각종 어선들이 징발되어 공격 및 상륙전 준비가 착착 준비되어 갔습니다. 10월부터는 중공 공군 산하의 미그기가 금문 상공에 날라와 국민당군 전투기와 교전을 벌이고 10월 15일에 광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만과 금문도는 극도의 대혼란에 빠져들어갑니다.

 

전황은 이미 국민당측에게 있어 일대 공전의 위기로 인식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비장한 심정으로 복건성 총사령관인 탕은백에게 전문을 보내었습니다.

 

"금문마저 내 줄 수는 없다. 귀관은 현지에서 전투를 감독, 독려하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하라. 그냥 사의를 표명하고 다른 지휘관으로 교체해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동남연해지역 섬들에 대한 수비 강화를 위해 제 12병단 병력 일부를 금문에 투입시키고 장개석 본인도 직접 금문을 비롯한 주변 섬을 순시하면서 방어준비를 독려하였습니다.

 

진성은 제 12병단 휘하 제 11, 제 43사단, 제 118사단이 금문으로 급파되었고 제 19군단, 제 67군단이 주산열도로 투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하문이 함락되고 금문도 위급해지자 제 12병단 사령부 및 제 19군단 휘하 2개사단을 금문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금문 수비의 현지 지휘는 제 22병단사령관 이양영에게 일임하였습니다.

 

이양영휘하 금문도 수비병력은 제 5군단산하 116, 200사단 및 제 25군단 40, 45, 제 18군단 11, 43, 118사단, 제 80군단 201사단등 총 8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군단, 사단이지 대부분이 상해, 남경에서 철수해 온 패잔병이거나 급조된 신병부대로 장비도 빈약했고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실전경험도 전무한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1개 사단의 병력이 1~2천명남짓으로 군단의 병력이 1개 연대급인 3천명수준에 지나지 않아 8개사단의 총병력이 정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겨우 4만명이었습니다. 게다가 부대들도 여기저기 긁어모은 부대들로 편제도 소속도 제각각이었죠. 방어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흙으로 진지를 쌓고 그 앞에 철조망과 지뢰를 설치한 실정이었습니다. 우세한 것은 해군과 공군으로 이들은 대륙에서의 연패에서도 전력을 온존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측은 제 22병단, 제 25군단 사령부를 금문시에, 주력부대 4개 사단을 섬의 북동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치하였고 고지에는 사단포병을 배치하고 제 118사단 및 전차대대(21대)를 기동예비대로 남겼습니다. 즉, 진지전에 기동방어를 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또한 해군 제 2함대에 복건성 일대의 전 항구를 봉쇄하고 B-25 25대, FB-26 전투기 50대를 보유한 제 1 비행대대가 금문일대를 초계하며 육, 공 협동작전 지원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모든 훈련 및 방어태세를 마친 것은 10월 24일 13시. 즉,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7시간전이었습니다.

 

중공군은 24일 오후부터 그간 맹렬하던 포격을 중지하고 밤 20시경부터 대, 소등도에서 밤을 틈타 일제 도하를 개시하였습니다. 병력은 민간인 노무자 350명을 포함한 제 28, 29군단 예하 3개 연대 9,086명. 350척의 선박에 나누어 탄 이 선발대가 금문을 향해 출발하고 제 2제대 1만1천명이 상륙선들이 돌아올때까지 대기하였습니다.

 

25일 새벽 2시부터 세갈레로 나누어 북안에 상륙을 개시하였습니다. 선박 부족에다, 지형적 문제, 섬 근해를 초계중인 국민당 해군함정들의 눈을 피하다보니 그들이 상륙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금문도 전역에서 일제히 상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최초 발견한 것은 금문 서쪽방향의 고영두반도를 지키고 있던 제 201사단 제 601연대로, 한 소대장이 순찰중에 실수로 건드린 지뢰가 터지자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초소들의 탐조등이 일제히 켜지고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중공군의 수송선박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선박에 타고 있던 중공군이 포격을 시작하고 국민당군도 응사함으로서 금문도 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제 253연대가 악전고투끝에 상륙하여 새벽 3시 고영두를 점령하고 그곳을 교두보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국민당군은 제 1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제 2방어선까지 밀리며 601연대는 수백명이 살상당하고 70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 244연대도 1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려 상륙작전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풍랑으로 병력이 분산되어 상륙했고 야간인 탓에 아군끼리 총격을 가하기도 하고 서로간의 통신까지 두절된 상태였습니다. 제 251연대는 상륙과정에서 이미 1/3의 손실을 입었고 서로 협조하지 못한채 각개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4시 30분, 국민당군이 맹반격을 시작했고 날이 샌 오전 8시부터 해, 공군의 지원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25일 새벽 118사단 352연대 및 전차중대를 고영두반도로 투입하고 제 14, 18사단 1만명이 축차투입되어 2개 전차대대의 엄호하에 전면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중공군은 도처에서 밀리기 시작하여 26일 6:30분 2차 반격을 받아 고영두반도로 후퇴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게 됩니다. 3개 연대의 잔존부대원들은 도처에서 쫓기면서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치지만 후속부대가 도착하지 않는한 옥쇄할 것은 틀림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전으로 긴급 구원 요청을 받은 제 10병단은 증원을 결정하고 급히 선박을 징발했지만 동원된 것은 겨우 발동선 1척, 목선 수척이었습니다. 처음 상륙에 동원되었던수송선박들이 썰물에 좌초되거나 날이 새면서 국민당군 해군에게 걸려 모조리 격침당한 상황에서 이제 투입 가능한 병력은 겨우 4개 중대남짓이었습니다.

 

어쨌거나 25일 밤 20시에 1차로 246연대 2개중대와 259연대 2개중대가 상륙작전에 나서고 다시 2차로 259연대 2개중대가 상륙에 나섰으나 풍랑으로 상륙에 성공한 것은 겨우 1천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26일 새벽 3시에 상륙한 증원군은 선발대의 잔존부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정도의 증원군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을 전개한 국민당군에게 맞선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노획한 탱크를 타고 소수 병력이 금문현으로 돌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전멸당하고 26일 오전에 다시 공세를 시작하지만 저녁부터 국민당측의 반격을 받아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탄약도 다 떨어지고 더이상의 증원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27일까지 저항하지만 27일 새벽 1시 상륙군은 완전히 제압당함으로서 3일간의 처절한 금문도 전투는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선발대를 보내고 2차투입을 기다리고 있던 제 82, 86, 87사단은 그들이 전멸하는 것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80문의 대포로 지원포격을 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사흘간의 전투의 결과는 중공군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상륙한 1만여명중 포로 7,059명외 나머지는 전원 사살되었고 살아서 대륙으로 돌아간 자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국민당군측도 전사 1267명, 부상 1982명의 큰피해를 입었습니다.

연전연승하던 중공군에서 이 전투의 패배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주석 모택동부터 현지 지휘관인 엽비까지도 국민당군을 얕보고 있었고 단지 2개연대가 공격 시늉만 해도 알아서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해, 제공권의 압도적 열세와 선박 부족은 패배의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금문에 대한 상륙작전을 계획하고서도 적의 제해, 제공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수송선박도 징발하면 될 것, 이라며 안이하게 여겼습니다. 반대로 국민당군 해군은 금문도와 대륙연안 사이를 초계하며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지원사격을 했으며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3일간 146회 출격하여 중공측 목선 334척을 격침시킴으로서 2차 상륙을 저지했습니다.
어렵게 상륙한 부대들도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측의 반격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금문도 전투의 패전에서 모택동은 상대를 얕볼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후 호남, 사천, 운남, 해남도 해방전에서 그 교훈을 크게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대만 "해방"을 위해서는 해, 공군의 확충은 필수적임을 깨달아 1949년 12월 모택동이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무기와 장비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당차원에서 육해공군 합동상륙공격 연합훈련을 거친후 늦어도 1951년 하반기까지는 대만을 완전히 "해방"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제 3야전군도 제 2차 대만공격을 위해 50만의 병력을 준비하였고 수송선박과 전차, 대포를 준비하여 50년 2월 국민당측은 "전년과 달리 중공측은 한번에 4~5개 군단을 수송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남도가 해방되고 운남, 사천등에서 국민당군 잔존부대가 완전히 소탕되는 50년 5월에 드디어 대만공격에 대한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6월 초순 중앙 정치국이 제 3 야전군에 대만해방의 임무를 일임하고 6월 30일부터 금문도에 대한 포격과 중대규모의 상륙전이 시도되기 시작햇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대만에 대한 원조재개를 시작하자 중공은 일단 대만 "해방" 작전을 연기하였고 소위 "항미원조"가 개시되자 대만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대만이 독립하니, 독립하면 가만 안두겠다니 서로 협박에 협박을 하면서도 경제교류는 계속 하는 이율배반적인 관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50년 1월 정초부터 국무 장관 애치슨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던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놓고 일부러 한국, 대만을 소련과 중공의 먹이로 던져주어 남침을 유도하게 했다는, 소위 남침유도설의 근거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야말로 당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앞뒤 절삭하고 역사를 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국공내전기간동안 보여준 장개석과 국민당측의 무능함을 매우 경멸했고 국민당의 패배가 결정적인 것이 되는 1949년이 되면 대중 원조를 그만둡니다. 대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중공에 대해 화해 제스쳐를 취하고 중공과 소련이 긴밀한 관계가 되지 않도록 하여 중공의 "티토화" 정책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치슨 라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직접적인 보호안에 둔다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공입장에서는 그것이 위협이 되어 당연히 소련에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당시, 국공내전기간동안 스탈린은 장개석을 지지했고 모택동의 승리가 결정적인 것이 되었음에도 내전중지, 중국의 이분화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모택동입장에서는 아직 스탈린을 믿을 수 있는 파트너로 생각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미국으로선 둘을 이간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런 정책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맥아더를 비롯한 매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트루먼은 즉각 중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대만에 대한 직접적 개입 및 대규모 원조를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