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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양자강 돌파와 신중국의 수립)

구름위 2023. 4. 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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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전역의 패배는 그야말로 결정타였습니다. 해방군은 기동성과 화력에서 절대 열세였음에도, 장개석의 "절대사수"명령에다 내부의 첩자들로 인해 퇴로가 차단되어 국민당군은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한채 대부분이 포위섬멸되었고 양자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극소수의 부대들과 패잔병들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사실상 승패는 결정납니다. 국민당군은 200만명을 상실하여 양자강 이북의 모든 영역에서 소멸됩니다. 뿌리부터 와해직전에 놓이죠. 남은 병력은 서안과 사천에 주둔한 호종남의 30만명과 화중과 화남에 주둔한 백숭희군 60만명 등 100만정도에 불과했고 상해에서 신강까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해방군은 대량의 포로를 고스란히 내편으로 편입시킴으로서 400만명으로 늘어나 숫적으로 완전히 압도합니다. 또한 많은 부대들이 싸우지도 않고 투항한 덕분에 소총 1,709,000정, 3만7천문의 각종 화포, 차량 1만2천대 등 엄청난 양의 무기를 선물로 받습니다.
 
국민당 내부에서도 자기들끼리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국민당내에서 No.2였던 이종인, 백숭희, 이제침 등 광서파 군벌들은 "더이상 싸우지 않겠다"라고 외치면서 장개석에게 "물러나라"며 하야를 종용합니다. 또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합니다. 트루먼은 장개석의 원조 요구를 거절했고 주중대사 스튜어트도 장개석 하야를 주장합니다.
 
완전히 핀치에 몰린 장개석은 49년 1월 1일 신년 벽두부터 모택동과 공산당을 향해 "휴전"을 구걸하지만 모택동은 5일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는 전범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라며 대화를 거부합니다. 또한 14일에는 "시국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장개석을 비롯한 43인의 국민당 고위급들을 전범으로 규정하고 처벌하겠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8개 요구조건을 아래와 같이 걸고 이것을 받아들여야 평화회담에 응하겠다고 합니다.
 
※ 8개항 : 장개석 등 43인에 대한 전범처벌, 헌법과 법통폐지, 국민당군대 해체,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 매국조약 폐지, 장개석 일당을 배제한 정치협상회의 개최, 남경정권 해체 및 민주연합정권 수립 
이건 보시다시피 국민당보고 말그대로 "백기투항하라"는 의미였죠. 결국 1월 21일 장개석은 대총통자리에 앉은지 7개월만에 마지못해 하야합니다.(다음해인 50년 3월 1일 도로 복귀합니다.) 부총통인 이종인이 임시총통이 되어 공산당과의 강화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총통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국민당 총재자리만큼은 내놓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은 상태였습니다. "국가"보다 "당"이 우선인 것은 국민당정권이나 공산당정권이나 같았는데 이때문에 장개석은 말이 하야이지 실상 "上皇"처럼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종인은 실상 실권없는 얼굴마담이나 다름없었죠.
 
새로 총통이 된 이종인은 공산당과 협상하여 양자강을 경계로 중국을 남북으로 나눠 북쪽을 공산당이, 남쪽을 국민당이 통치하는 안을 구상합니다. 장개석에게는 중국에서 나가라고 권유합니다. 4월 1일 장치중을 수석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북평으로 보냅니다. 공산당은 주은래를 수석대표로 협상을 벌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이제와서 평화협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국민당으로서는 공산당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단지 양자강을 방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왔을 뿐이고 공산당 역시 이미 거의 다 이긴 싸움인데 국민당이 원하는대로 양보해서 남북통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국민당 대표단은 줄줄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어 모든 정보가 죄다 모택동에게 들어갑니다. 이러니 무슨 협상이 되겠습니까. 

 

○ 장치중이급상장(1890~1969) : 보정군관학교출신으로 장개석의 심복인 "팔대금강"중 한명이자 장개석의 비서실장역할을 합니다. 중일전쟁당시에는 호남성에서 호남성 주석겸 제9전구 사령관을 맡아 일본군의 3차례에 걸친 장사공격을 막아냅니다.(이후 설악이 맡음) 국민당내에서는 좌파쪽에 가까워 공산당과도 친분이 있어 1949년 4월 이종인의 명령에 따라 국민정부의 수석대표로서 주은래와 협상하지만 결렬되자 그대로 배신하여 공산당으로 귀순합니다. 이후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지냅니다. 이때문에 "원래 공산당의 첩자였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공산당은 수락기한을 4월 20일로 못박았지만 이종인이 이를 거부하자 다음날 모택동, 주덕은 "전국 진군명령"을 선언합니다.
"전군은 용약 전진하여 중국 영토 내의 저항을 일삼는 일체의 국민당파를 단호하고 철저하게 섬멸하고 전국 인민을 해방하여 중국 영토의 보존과 주권의 독립을 보전하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양자강 도강을 반대하고 장개석과 휴전할 것을 종용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모택동은 거부합니다. 
모택동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인 20일 저녁. 유백승과 등소평이 지휘하는 제2야전군(구 중원야전군)과 진의, 속유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구 화동야전군) 100만명은 2만척의 대소선박을 동원해 서쪽은 강서성 구강에서 동쪽은 강소성 강음까지 양자강 전역 500km에 걸쳐 대규모 도하를 시작합니다. 작전계획은 구 신4군 출신이 주축이 된(화중, 화남에서 활동한지라 남쪽출신이 많았음) 제3야전군(4개병단 16개군 58만명)이 주력으로 상해, 남경을 거쳐 동남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고 제2야전군은 호북성을 거쳐 강서성으로 진격함으로서 국민당 주력을 전략적으로 포위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 당시 인민해방군의 편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야전군"은 2차대전당시 독일의 "집단군"이나 소련의 "군관구"에 비견되고 "병단"은 우리의 "야전군"에 비견됩니다. "군"은 우리의 "군단"에 해당하죠. 그 아래로 사=사단, 단=연대, 영=대대, 연=중대, 배=소대, 반=분대 이런 식인데, 책에 따라서는 군을 군단으로, 사를 여단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장군들의 계급체계도 우리와 달라(준장계급이 없고 소장, 중장, 이급상장, 일급상장, 특급상장식임) 책에 따라서 직역하기도 하고 우리 계급체계에 맞추어 멋대로 바꾼 경우도 있어 꽤나 사람 헤깔리게 하죠..--;;;
 
한편, 장개석은 마지못해 하야하고 고향인 절강성의 봉화마을로 돌아가 남들보기에는 부부끼리 여유롭게 관광이나 다닙니다만, 양자강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나름대로 패전에 대비한 대책을 준비합니다. 자신의 오른팔이자 국방장관 진성의 지휘하에 복건성의 광주와 사천성의 중경을 전략적 방어거점으로 삼고 양자강 상류와 중류일대에서 물러나 전선을 축소한 다음 절강성과 강소성을 주저항선으로 병력을 배치합니다. 2월 5일에는 수도를 남경에서 광주로 이동합니다.
 
탕은백이급상장을 남경-상해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 밑의 복건성방어에는 서주에서 철수한 이연년의 제6병단을 복주방어로, 이양영의 제22병단을 하문, 금문, 천주방어에, 유여명의 제8병단을 장주에 배치합니다. 병력은 75개 사단 45만명이었습니다. 그 밑은 백숭희의 40개 사단 25만명이 광서성, 광동성, 해남도 등을 방어합니다. 해군 제1함대가 절강성 연안과 주산열도를 경비하고 해군 제2함대가 대륙과 대만 사이에 있는 팽호도에 주둔하여 대만해협을 경비합니다. 또한 공군 제1, 제4, 제5대대 300대의 항공기로 양자강 상공을 비행하며 제공권을 확보합니다.
 
○ 진성일급상장(1897~1965) : 호종남과 함께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키워낸 심복중의 심복으로 힛총통만큼이나 의심병 많은 장개석이 끝까지 신뢰했던 몇 안되는 인물이죠. 장개석의 "오호상장"중 하나로서 국민당군 수뇌부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명장이며 비리 많은 국민당군에서는 드물게 청렴하고 성실했습니다. 중일전쟁당시에는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송호전역을 지휘하고 무한과 중경을 방어합니다. 전군 참모총장을 거쳐 대만성 주석, 대만으로 튄다음에는 이종인 대신 2대 부총통을 지내죠. 장개석이 대만으로 튀려고 할때 미국이 진성을 매수하여 대만을 독립시키려고 하지만 진성은 이를 거부하고 장개석에게 끝까지 충성을 합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강남의 방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방어병력들이라는 것이 모두 북쪽에서 대패하여 근근히 도주해온 패잔부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비도 빈약했고 사기도 엉망이었습니다. 말이 사단이지 대대, 연대급도 되지 못하는 부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해공군만은 그런대로 건재했죠. 이렇다보니 양자강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다음 세가지 안을 놓고 인생의 선택을 고민합니다.
 
1. 중일전쟁때처럼 중경에서 사천과 서강, 귀주, 운남을 확보하고 서남일대에서 저항한다.
2. 해남도로 철수하여 동남연해를 기반으로 저항한다.
3. 대만으로 철수한다.
 
그는 이 세가지중에서 결국 3번을 택합니다. 우선 대만에는 장기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기에 공산세력이 침투하지 못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대륙과 100km이상 떨어져 방어에 유리했고 경제적으로도 대륙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기후도 좋고 자원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장 믿는 진성을 대만성 주석으로 보내고 국고에서 3.7억 달러상당의 황금과 백금, 외화를 비롯해 남경의 공장시설과 물자를 대만으로 송출토록 명령합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욕심을 버리고 못하고 대륙에 남은 지역에 대해서도 전선을 순시하며 최대한 버틸때까지 버텨보려고 노력하죠.
 
해방군이 양자강의 전전선에서 전면적인 도강을 시작하자 전세계 이목이 집중됩니다. "적벽대전, 비수대전이 다시 재현될 것인가"라는 타이틀이 타임지 일면을 장식하는등 장개석이 과연 모택동을 막아낼 것인가, 모택동이 국민당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4월 21일 자정, 제3야전군 선봉인 제7, 제9병단이 강력한 포병지원속에 장강 남안에 상륙하고 같은 시간 남경 북쪽 강음요새를 공격한 제3야전군 제8, 제10병단과 제2야전군 제3,4,5 병단도 도강에 성공합니다. 강음요새를 놓고 하루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만 지휘관중의 한명이 대융광이 배신을 때려 반란을 일으킵니다. 덕분에 강음요새는 함락되고 22일 탕은백이 전면 퇴각을 명령함으로서 3개월반동안 열심히 만든 양자강 방어선은 2일만에 완전히 붕괴됩니다. 23일에는 남경이 함락되죠. 제2, 제3야전군은 이를 전력으로 추격하여 5개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해 오흥지구에서 전멸시킵니다. 27일에는 소주가, 5월 3일에는 항주가 점령됩니다.
 
 
 
장개석은 임시수도인 광주로 도주하는데 정작 임시총통인 이종인은 장개석과 결별하고 계림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죠. 노년에 대륙으로 돌아가 편안한 말년을 보냅니다.
 
한편, 요심전역과 평진전역에서 승리한 임표의 제4야전군은 경한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5월 14일에는 양자강을 건너 17일에는 호북의 무한을 점령하고 호남성으로 진격합니다. 호남성장인 정잠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었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합니다. 또한 서북전선에서는 팽덕회, 하룡의 제1야전군이 호종남군을 추격하며 5월 20일 서안을 점령했고 난주와 서령을 점령한 다음 신강 위구르 지역으로 진격합니다. 9월 28일 신강 방어 사령관 도치악과 신강성장 부르한이 투항함으로서 이 지역도 무혈함락됩니다. 섭영진, 서향전의 화북병단(구 화북야전군)은 산서왕 염석산이 남경에 간 사이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을 점령합니다.
 
5월 22일, 제2야전군 제4병단이 남창을 점령하여 후퇴하는 국민당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시킵니다. 상해에는 탕은백휘하 8개군 20만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제3야전군은 상해를 완전히 포위한후 외곽에서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갑니다. 23일부터 시작된 총공격은 4일만에 끝났고 탕은백은 비행기타고 일본으로 도주했고 5만명만 해상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사살되거나 투항합니다. 이것으로 40일간의 도강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하고 국민당군은 40만명을 상실했으며 얼마안되는 잔존부대들만 근근히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해방군은 거듭 맹추격하며 이들을 격파하죠. 백숭희의 부대만이 마지막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적을 깊숙히 유인한후 국지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제2야전군과 제4야전군의 압도적인 협격을 받아 완전히 괴멸됩니다.
 
○ 백숭희일급상장(1893~1966) : 광서파 군벌의 우두머리중 한명으로 "제갈량의 환생"이라 불릴만큼 유능한 명장. "중국군 장군들은 죄다 쓰레기"라고 했던 그 스틸웰조차도 백숭희만큼은 인정하죠. 군벌전쟁당시 장개석과 2번이나 맞섰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패합니다. 항일전쟁당시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번다"라는 작전도 백숭희의 주도에서 나온 것이며 태아장전투에서는 탕은백, 손련중 등을 지휘하며 승리를 거둡니다. 미국이 장개석을 끌어내리고 이 양반으로 교체하려는 음모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때문에 장개석의 극심한 불신과 견제를 받습니다. 내전 패전이후 대만으로 가지만 죽을때까지 연금되죠. 장학량과 함께 장개석한테 가장 미운털박힌 사내라는.
 

유일하게 방어에 성공한 것은 금문도전투였습니다.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3일간의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제3야전군 제10병단 산하 2만명의 공격을 받아 문자그대로 전멸시킵니다. 제10병단 사령관 엽비는 그동안의 연전연승에 도취되어 손쉽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공격했다가 호되게 당합니다. 금문도의 수비를 맡은 국민당 제22병단은 패잔병을 긁어모은 잡탕부대였지만 이양영의 냉철한 지휘하에 전차와 항공기, 해군함정들의 지원을 받아 대승을 거둡니다. 금문도 방어에 성공함으로서 국민당군은 대만을 지켜낼 수 있었죠.
 
※ 금문도 전투에 관한 자세한 글보기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044470
 
 
금문도 전투에서 포로가 된 해방군.
 
그러나 이 반짝 승리는 패망하는 국민당군의 운명까지 돌리지는 못했습니다.
호남성을 장악한 제4야전군은 광동, 광서성으로 진격하여 10월 14일 임시수도인 광주를 함락시킵니다. 장개석은 임시수도를 중경으로 옮기는 한편, 대소선박 1500척을 동원해 자신의 직계군 50만과 각종 보물, 대량의 물자와 무기, 근 100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대만으로 철수시킵니다. 그야말로 "중국판 덩케르크 철수"였죠. 11월 22일에는 계림이, 12월 4일에는 중-월 국경의 전략 요충지인 남녕이 함락됩니다.
 
또, 제2야전군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여 10월 30일에는 중경도 함락됩니다. 서남전역에서 송희렴의 제15군이 괴멸되자 12월 9일에는 운남성장 노한이 항복하여 운남성도 공산측으로 넘어가죠. 마지막 거점으로 남은 사천성 성도에서 장개석이 직접 사천보위전을 펼치지만 제1, 2, 4야전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호종남군의 최후 부대인 제5병단이 괴멸되고 병단사령관 이원이 포로가 됨으로서 12월 27일 성도는 함락됩니다.
 
 
해방군의 대략적인 진격로. 파란선이 제1야전군, 검은선이 제2야전군, 초록선이 제3야전군, 붉은선이 제4야전군임다.
 
 
이것으로 대륙에서 국민당군은 완전히 전멸되어, 남은 것은 대만과 금문도, 마조도 등 동남해안일대와 백숭희의 잔존부대가 철수한 해남도, 절강성 항주만의 주산열도 등 일부 섬들뿐이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대륙 곳곳에는 100만에 달하는 잔존부대들이 흩어져서 절망적인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장개석은 이들을 희생양으로 버립니다.
 
49년 10월 1일 3시. 북평에서 이른바 개국대전이 개최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정식으로 선포됩니다.
중앙인민정부 주석에 모택동이, 부주석에 주덕, 유소기, 송경령, 이제심, 장란, 고강이 선출됩니다. 또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에 주덕, 총리 겸 외무부장에 주은래, 최고 법원장에 심균유가 임명되고 신중국의 수도는 북평으로 정하고 명칭을 북경으로 바꿉니다. 20년전 호남성의 정강산 산골짜기에 1천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자리잡은 이래, 수많은 역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북경에서 신중국의 건국을 선포했을때 그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모택동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후 수많은 군웅들과 혁명가들이 등장하여 중국을 분할했을때 공산당은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모택동은 그중에서도 말졸중의 말졸이었습니다. 장개석 역시 맨손에서 시작하여 손문이 죽은후 왕정위 등 기라성같은 라이벌들을 밀쳐내고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훨씬 강력한 군벌들을 토벌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때에도 모택동은 변경 촌동네의 일개 비적이나 다름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대장정을 거치며 공산당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장개석과의 대결에서 이김으로서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죠. 세계 언론의 일면을 장식하는 것은 이제 장개석이 아니라 모택동이었습니다. 위대한 항일영웅의 칭호도 장개석에서 모택동이 차지하죠. 장개석은 이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됩니다.
 
이제 그는 국민당에게 마지막 남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를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