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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박지원의 <열하일기>, 허공의 메아리

박지원의 , 허공의 메아리 "참으로 좋은 울음 터로다. 한바탕 크게 울만 하구나." 이 말은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박지원이 중국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당시 관직도 없는 백년서생이었지만 집안 형님이었던 박명원이 중국 사절단장으로 가게 되자 43세의 나이로 수행을 했다. 그때가 1780년 정조 4년이다. 일행이 국경을 넘어 열흘이 지나 요동벌판에 이르게 되자 산해관까지 천 2백 리 길 사방이 오직 망당한 지평선뿐이니 그걸 보면서 박지원은 그렇게 탄식했다. 울음이란 칠정 중에서 오직 슬퍼서만 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북받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사랑이 그리워도, 욕심이 지나쳐도, 불평하거나 억울할 때도 우는 법인데 생전처음 그렇게 광막한 곳을 바라보고 잇으니 감동이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조선의..

42.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황희의 치정 사건에 관한 진실 우리나라 사대부 중 가장 존경받는 한 사람이 바로 황희 정승이다. 그는 21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31세에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지만 결국 강권에 의해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1418년 충녕대군(세종)이 장자를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갔다. 남원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니 상당히 오래 고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뜻밖에도 그를 불러 올려 중책을 맡겼다. 이후 18년 동안 그는 명제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오늘날 조선의 청백리로서 맹사성, 퇴계 이황과 더불어 한국의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고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은 18명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첯 번째로..

41.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절대로 1등은 하지 마라 조선의 관헌은 전과자? '한국에서 절대 1등은 하면 안 된다. 2등도 위험하고 3등 정도가 그나마 낫다." 석학 한 분의 충고다. "일본에서는 없는 1등도 만들어 내서 국민들이 그를 존중하고 지랑으로 삼는데 한국에서는 누가 좀 올라가면 잡고 흔들어 버린다. 국민들의 체질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 국가의 중심에는 한상 언제나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도 인물이 해답이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나 걸렸다.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은 18년, 대대 주임상사..

40.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아무도 믿지 못했던 조선 왕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것은 일본 무사도의 정신이다. 주군을 기꺼이 배신한다. 이것은 조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정치적인 해석을 떠나서 초기 외국 선교사의 이런 혹평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기업이건 어떤 조직이건 들어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런 표현이 나왔던 것은 고종의 말년에 왕이 보여주었던 조선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 때문이다. "조선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소." 고종이 남긴 말이다. 가히 한 나라의 국왕의 표현치고는 비참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역사가들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허약하고 무능한 왕으로 고종을 꼽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험난한 시대에 가장 고통이 많았던 불행한 왕이 고종이다. 당시 고종은 대원군과 달리 청나라와 일본..

39.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일본은 수많은 조선 포로를 끌고 갔다. 그 숫자가 일본 측 연구자에 의하면 약 7만 명에 달한다. 남녀는 물론이고 전문 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도공, 의원, 화공, 악공, 목공 등 각 부문별로 골라서 데려갔다. 그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간 사람도 상당수 많았는데, 전쟁 중 일본군이 포로로 잡은 조선군이나 일반 백성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참여한 조선인을 포함하여 전쟁 후반기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면서 왜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이때 축성작업에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이 약 10만에 가까웠다. 그들이 전쟁이 끝나면 처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왜군을 따라가는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38.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동학혁명이 나기 전에도 북쪽 각처에서도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캐나다 선교사 하다는 함경도 함흥과 덕원에서 농민 폭동을 역력히 목격했다. 이유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가혹한 세금제도가 목을 옥죈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여기서기 유령의 마을처럼 텅 빈 마을들이 늘어났다. 그런 헐벗고 황폐한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바로 평양 근처가 그 전쟁터였다. 남의 나라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치렀다. 거리와 강, 들판과 산기슭에는 온통 시체가 널려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당연히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동의보감 수준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의술은 전염병이나 외과 치료에서는 거의 속수..

중국의 전후 처리와 국공내전

중국의 전후 처리와 국공내전 장개석의 굴욕적 승리 1937년 이래 4년 반에 걸친 중국의 항일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세계대전으로 발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시작한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이 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패배함으로써 마침내 장개석(蔣介石)의 일본에 대한 승리가 성취되었다. 항일전쟁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다. ⓒ Mys 721tx/wikipedia | Public Domain 전후의 국제질서 특히 일본에서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담이었던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장개석은 아예 초대받지 못했다. 얄타..

1949년 장개석 대만탈출

1949년 1월 21일 국공내전에서의 패전이 임박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일단 '하야'를 합니다. 공석이 된 총통직을 부총통 이종인(李宗仁)이 '대리'하게 되었지만, 장개석이 계속 국민당 총재직을 유지함으로서 실권은 여전히 장개석이 쥐고 있는 상황이었지요(국민당의 정부체제는 소련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당권우위의 체제였음). 이미 1948년부터 장개석은 패전을 예감하고 대만을 최후보루로 삼으려는 구상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48년 말 수도 남경(南京)의 공장시설들을 대만으로 운반하려 시도한 것 외에 하야 직후엔 장남 장경국(蔣經國)을 상해(上海)로 파견해 공군으로 하여금 신속히 비행장을 수리, 건설토록 독려하였습니다. 이 비행장을 통해 대만으로 공수한 것은 군대는 물..

37.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천국, 우물안 개구리 조선 "조선의 양반들은 아주 비열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한 후 3일 동안 부인과 산다. 그런 후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자기 첩들을 두고 그녀들과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엾은 본부인에게는 정절을 강요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가거나 정절을 버리면 관리에게 데려간다. 관리는 그녀를 매질한 후 자기 종에게 줘버린다. 양반집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들이 혼자서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며 우리가 집을 찿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아팬젤러는 1885년 입국 직후 미국 선교본부로 보내는 연례 보고서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잇다. " 서울 거리는 좁고 불결하기 때문에 늘 오물이 널..

36.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서양 사람들에게 비친 한심한 조선 조선인들의 악덕 중 하나, '식탐' 조선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세상에서 으뜸으로 예를 알며 효를 숭상하는 뛰어난 문명국가의 지도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문명은 세상천지에 중국뿐이었고 그 밖의 서양이나 일본은 모두 오랑캐였다. 그러면 서양 오랑캐들이 본 문명국가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800년대 이전에도 서양 오랑캐들이 약간씩 들어온 적은 있으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조선 말기가 되면서이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도하려다가 많이 죽고 그 위기를 넘기자 그들은 의료 선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사실 그들 덕에 주사도 놓고 수술도 하는 의술이라는 것을 조선은 비로소 알았다. 그들은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들이 본 조선에서의 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