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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조선의 국력이 소진된 이유 우리나라 보물 제1430호이기도 한 정조의 그림을 보노라면 실로 장업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를 자주 다닐 때 그린 이 병풍 그림은 1795년 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행차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단지 화려하고 장엄하구나, 그렇게만 느꼈다면 가령 당신은 고위 공직자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시장거리의 서민 물가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한국은행 수출 지수만 꿰고 있는 그런 공직자 말이다. 윤 2월 중순이라면 아직도 날이 차가운 날씨였을 것이다. 이 행차에 동원된 군졸 숫자가 약 5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온갖 무거..

52.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욕설이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 야 이 쌍놈아!" "뭘 봐? 이 0 쌍놈아! 이 0 쌍놈의 00 같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욕이 바로 '이 쌍놈'이라는 것이다. 여자한테는 놈 대신 년을 붙인다. 어디 가던지 지천으로 널려 잇는 것이 욕설이다. 쌍놈이란 기본적으로 인간 같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 같지 않고 개 같으니까 0 쌍놈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개는 그렇지 않는 동물이다. 절대 충직하고 배신도 없다. 인간보다 더 낳은 면이 수두룩한데 왜 개를 그런 욕설의 기준치로 삼는지 모르겠다. 개보다 더 낳은 인간이 있으면 어디 손들어 보라고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개와 쌍놈이 합성어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잇다. 개라는 동물을 인간의 반려견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때..

51.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조선의 왕들은 적자로서 승계를 받았을 경우는 비교적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서자나 차남 등 적자가 아닌 경우는 거의 힘을 펴지 못하고 살았다. 더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왕이 되었다. 헌종은 8세, 순조는 10세, 단종 11세, 명종 11세, 성종 12세, 고종 12세, 선조 15세, 중종 18세, 에종 18세, 연산군 18세, 철종 18세 등이다. 세종도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테조와 그 직게인 정종, 태종을 제외하면 정상적으로 20대 중반 나이에 오른 사람은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불과하다. 광해군은 서자의 신분으로 30세가 넘어 간신히 왕이 되긴 했지만 항상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조선에서는 결국 27대 ..

50.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영조는 양반들을 멸시한 왕이다. 그의 생모는 슥종 시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제치고 후궁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 천민 출신의 숙빈 최씨다. 숙빈 최씨는 7세에 주로 부억 설거지 등을 하는 무수리로 궁에 들어왔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 여인이다. 훗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조졸하고 뒤이어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영조는 그의 생모를 위한 추모각을 세우고자 했으나 대신들이 신분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천민을 위한 추모각이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했다.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자 영조는 왕위에서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만류하자 그는 내뱉었다. "조선은 양반들의 나라가 아닌가. 당신들 양반들이 잘 알아서 해보시오..

49.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을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조선 '어부사시사' 문학의 이면 등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는 윤선도의 시조문학은 우리 고전문학의 보고이며 그가 꾸며놓은 보길도에는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찿아와 그의 자취를 되새긴다. 사건과 사람은 확실히 양면성을 가진다. 윤선도의 빛나는 문학성 뒤에는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면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병자호란 발발 당시 나이가 50세였는데 이미 3년 전 성산현감에서 파직되어 해남에 내려가 있었다. 해남에는 만석꾼인 그의 숙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댁의 양자로 입양된 처지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전국의 사대부들은 근왕병으로 궐기하라는 격문을 읽고 강화로 가는 배를 띄운 다. 전국의 사대부들에게 왕의 ..

48.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지금도 전국 도처에 남아 있는 각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라는 것이 있다. 백성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사또의 은덕을 기려 세워준 비석들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수령이 자비와 성실로 백성들을 다스려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들이 상당수가 수령들이 그 고을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세운 비라는 것이 드러났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으나 그런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왜 그런 비를 세운 것일까? 암행어사나 관찰사들이 자신의 공적을 인정케 하기 위한 눈속임 증거물인 것이다. 그러나 정조 때 안의현감 박지원은 퇴직 후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 공덕비를 세울 경우 달려가서 부숴버리겠노라고 알렸다. 탐관오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

47.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관헌들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았는가. 수령 자신이 직접 돈을 챙길 수는 없는 것이니, 가장 흔한 것은 속칭 '합부인'을 시켜 돈을 받았다. 합부인이란 첩의 높임 말이다. 합은 양반집 대문에 들어서면 양쪽에 있는 문간방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문의 문간방에 둔 첩이 곧 합부인이다. 원래 대궐의 등급은 임금과 왕비가 사용하는 '전', 왕자들의 공간 '당', 대원군과 후궁들의 처소인 '합', 신하들의 업무공간인 '각'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이 내려오면서 합부인이 고관들의 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관찰사나 수령들에게는 반드시 합부인이 있어 뇌물을 챙기는 일을 주로 맡았다. 한번 암행어사가 오는 날에는 일망타진되어 여러 고을 수령 합부인들이 감옥을 가득 메..

46.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 사람은 돈과 권력을 쥐어보면 금방 그 사람의 본성과 됨됨이가 드러난다. 그것이 없을 때는 모두 지엄환 우국투사요 정의의 화신이지만 정작 손에 그러한 것들이 들어오면 금방 변하고 만다. 어제의 인물이 아닌 것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둘을 떼어 놓고 보면 백발백중 실패한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면 금의환향이나 다름없었다. 권럭과 재물이 한꺼번에 생기는 자리였다. 지방 수령은 세금을 거두고 거기서 자기 녹봉도 챙긴다. 서울에서 녹봉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부패 고리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는 누구일까? 보통 알려진 바로는 동학혁명 ..

45.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1783년 정조 7년에 역시 중국을 다녀온 대사헌 홍양호가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박지원의 비판과 비슷하다. "신이 그동안 외람되게도 사명을 띠고 연경과 계주 사이를 왕래해 보았건데 산천과 읍성은 모두 다름이 없지만 의관과 문물은 이미 옛날의 것이 아니었기에 자다가도 한탄스러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 두가지나마 연구한 것이 있기는 해도, 그 땅을 밟아 보니 놀라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삼가 국가의 계책에 도움이 되고 민생의 사용에 절실한 것들을 여섯 가지 조목으로 열거하였으니, 살펴보아주소서. 첯째는 수레 제도입니다. 옛적에 황제씨 시절부터 그 나라의 부를 묻게 되면 수레의 수효를 먼저 답변했다 합니다. 민생의 기구는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다닐 적에 승차가 있..

44.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과 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의 생애 연암은 1737년(영조 13년) 한양에서 부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 가(家)는 영조 당시 노론측 일원으로 명문거족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뒤 집안 사람이 연암의 사주를 중국에 가져가 점쟁이한테 물었는데 그 점쟁이는 " 이 사주는 마강굴에 속하는데 한유와 소식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 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한다"고 했다 한다. 짧은 사주풀이지만 엄청난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당송 8대가 중 두 사람인 당나라의 한유와 송나라의 소동파, 그리고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들인 반고와 사마천이 일컬어진다. 사주에서부터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다고 했으니 연암이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