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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이런 아사자 못지 않게,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 전염병은 조선을 더욱 시체 왕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다. 20세기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1909년 순종 2년 대역이 발생했다는 정도로 실록은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그해 심각한 전염병은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죽은 숫자만 서울에서 1만 2천, 전국적으로는 10만 명이 넘는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어림잡아 8,9백만으로 추정하는 데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전염병이란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유행한다. 가난하여 위생관념이 없으니 전염병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부족하여 씻는 법이 없고 인분을 뿌려 기른 야채를..

34.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2)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나가고...... 이런 처참한 사태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태평성대로 일고만 있는 세종 시대의 기록을 보자. 세종 6년의 지시는 이색적이다. 언제 흉년이 닥칠지 모르니 온 백성들이 도토리를 비축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큰 집은 60석, 보통 집은 40석, 작은 집은 10석을 모아야 했다. 1443년 세종 25년 9월 22일. 힘길도 관찰사로부터 보고가 하나 올아왔다. "함길도는 지난해의 흉년으로 인하여 민간에 먹을 것이 없어 집짐승을 다 잡아 먹었으며 5, 6월 사이에는 기근이 더욱 심하여 떠돌며 빌어먹다가 산이나 골짜기와 시내에서 굶어 죽은 자가 소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4백에 이르며 살아 있는 사람들도 무력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

33.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왕국 경신 대기근 때 최소 수십만이 굶어 죽어 불쌍하고 불쌍한 조선 백성들이여. 도대체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나라가 또 있었을까? 세계적인 통계를 알 수 없으니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라는 땅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몰론 사막이나 산악 등지로 된 나라 등 이러한 다른 열악한 나라에 비해서는 그래도 사계절이 있어 그에 비하면 살기는 좋은 편이지만. 그런데 당시 참상을 상상하노라면 몰골이 송연해진다. 이 땅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삼천리 죽음강산이었다. 그런 땅에서 모진 목숨을 연명했던 가엾은 백성들. 조선은 걸핏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게 널린 땅이었다. 한 해는 굶어 죽고 한 해는 전염병으로..

32.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앉은 채로 당할 형세는 아니었는데...... 이 바보같은 전쟁도 아닌 전쟁은 임진왜란이나 똑같이 사전에 충분한 경고가 있었다. 1년 전에 청나라에서 황제가 직접 조선을 치겠다고 통고를 해왔다. 심지어 명군 부총 백등용이 인조를 직접 만나 지금처럼 강경책만 고집하지 말고 청나라의 동태를 잘 실피라고 충고를 해줬다. 군 지휘관이었으니 청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을 터라 넌지시 조선의 갈 길을 귀뜸해 준 것이다. 왜 주제 파악도 못하고 큰 소리만 치고 있느냐는 그런 충고였을 것이다.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황손무도 그동안 명나라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쓴 소리를 내놨다. "간첩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것. 또 조선은 지독한 문민통..

31.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쌍령전투'의 치욕 방어의 강점은 공격군보다 오히려 더 야습이나 기습에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변변한 반격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몇십명 단위의 기습전을 벌여 십여 명을 살상하는 몇 차례 공격을 했을 뿐이다. 그 외에는 그냥 추위에 벌벌 떨며 성안에 갇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양식이 떨어지니 손들고 나와 버렸다. 이 사이에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에서 관군이 도착했다.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몇만 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과연 그들이 군사였는지도 의문이 간다. 그 이유는 '쌍령전투'의 치욕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쌍령전투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관군 동원령에 따라 경상도에서 4..

30.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1)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청군은 어떻게 바람처럼 서울에 당도했을까? "이제 국운이 다했으니 올바르게 죽고 싶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부르짖은 한마디였다. 조선을 통틀어 외적과 대치하면서 왕이 내뱉은 말로서는 가장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었다. 결사항전도 아니고 화친도 아니고 우물쭈물하다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는 결국 조선에서 가장 비겁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636년 인조 14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9년 전에 발생했던 졍묘호란의 2차전이다. 조선은 그때 항복하고 형제지간의 맹약을 맺었지만 그걸 무시했다. 힘도 없느느주제에 약속도 지키지 않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경고하던 후금(청)이 결국 군대를 물고 쳐내려 왔다. 조정에 청나라 대군의..

29.동래성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동래성 전투 동래는 당시 동래도호부로써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1년전쯤에 동래부사로 '송상현'이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정발'과는 달리 문인출신이었다. 동래부사는 경상도 남쪽 반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를 관할하는 자리였다. 물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방어력 개선에 노력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

28.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3)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정보 부재라는 말이 그토록 잘 들어맞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왜란 발발 전 대처방안이라는 것이 겨우 통신사를 1회 파견하여 일본 막부와 30분 정도 공식 대면만 하고 왔으니 그런 대면에서 어떻게 전쟁위기 따위를 파악할 수 있으랴. 일본 막부의 관상만 보고 돌아왔서 보고를 올렸으니 어떤 원시국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왜관도 있어서 일본인 수백 명이 집단적으로 와서 살았으며 그들은 모두 정보원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조정이나 관헌들의 동태도 수시로 파악하여 본국에 전하고 있었다. 우리 측에서는 일본 파견 관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마도라 다..

27.몽고의 역참제도

몽고의 역참제도 13세기 중엽이었다.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중앙아시아 초원의 한 모퉁이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듯, 초원에는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져 거대한 기마군단이 되었다. 기마군단은 척박한 중앙아시아 고원에 흩어진 부족들을 차례로 ‘접수’하고, 일사불란하게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다. 기마군단의 리더로 초원의 황제가 된 칭기즈칸. 그가 정복한 땅은 무려 777만 평방 킬로미터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정복지는 더욱 확장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시아와 유럽, 태평양과 대서양을 하나로 이어버렸다. 200만 명도 안 되는 유목민이 1억 인구를 150여 년에 걸..

26.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과천소관(果川所管)의 역원(驛院)과 역참(驛站) 1) 양재역(良才驛)·도(道) 『고려사』 병지 참역조를 보면, 과주(果州) 소관의 역참은 오직 양재역(良才驛을 良梓 또는 良材로 표기) 뿐이다. 역도(驛道)는 주도(州道)에 속해 있었고 중심역은 덕풍(德豊, 현 河南市 덕풍동)이었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역로와 역도 정비에서 좌도충청도정역찰방 소관의 역과 동화도(同化道)가 재편성되어 양재도(良才道)가 되면서, 과천현 소관으로서의 양재역은 그대로 양재도 12역의 으뜸역이 되었다. 양재도의 역과 역도로서의 비중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하삼도(下三道)로 뻗는 3대로(左路·中路·右路) 가운데 첫 역도이기도 하며, 우로(右路)의 첫 역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가령, 과천을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