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한일관계(1) ‘조선 노략질’ 왜구가 해외진출 개척자라고? 명의 수군과 왜구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 왜구의 침략과 약탈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봤던 한국과 중국에서는 왜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반면, 일본에서는 왜구를 ‘일찍부터 바다로 눈을 돌린 해외 진출의 선구자’로 .. 전쟁...../임진왜란 2013.06.20
조선 건국 직후의 조-명 갈등 조선’ 국호 받는 등 명에 조아렸지만 ‘요동정벌’ 야심 계속 경기도 평택 ‘정도전 기념관’에 있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영정.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격동기를 살았던 정도전은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수복해야 한다는 야심.. 전쟁...../임진왜란 2013.06.20
명, 고려와 조선을 몰아붙이다 조선은 아침 한끼 거리” 주원장 협박의 본뜻은… 1393년 6월, 명의 주원장은 조선에 국서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너희가 믿는 것은 바다가 넓고 산이 험준한 것인데 너희는 우리 군대가 한나라와 당나라 시절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짐은 군대를 일으켜 강남, 회남을.. 전쟁...../임진왜란 2013.06.20
외교사 곱씹어야 하는 까닭은 제국 전환기마다 한반도 ‘핏빛’…임진·정묘·병자, 그다음은? “이날 홍건적이 개성을 함락시킨 뒤 여러 달 동안 주둔하면서 소와 말을 잡아 그 가죽을 펼쳐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사람들이 기어오를 수 없었다. 적은 또한 남녀를 태워 죽이며 혹은 임부의 젖가슴을 구워 먹.. 전쟁...../임진왜란 2013.06.20
이순신의 노획품, 일본 금부채는 어디로?| 이순신이 노획한 히데요시 황금부채의 처리는 <선조실록>에 나온다. 황금부채를 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금부채가 일본인에 의해 1909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것으로 밝혀졌다. 1592년 당포해전.. 전쟁...../임진왜란 2013.06.18
임진왜란 ...북관대첩 북관(北關. 함경도를 뜻하는 지역명) 대첩은 함경도 의병장인 정문부가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침략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패하였다. 그중 침략군 제2군 대장인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중 하나, 가토 기요마사는 서울점.. 전쟁...../임진왜란 2013.05.30
계사년(1593년) 부터 1594년까지 주요 전투기록 * 평양성전투(平壤城戰鬪) 1593년 1월 6일~9일 조선측 전력: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 이일(李鎰),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 8천여명 승병장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2천2백여명 도합 1만2백여명 명나라 전력: 제독군무 리루송(李如松), 부총병 양위엔(楊元), 부총병 리루바이.. 전쟁...../임진왜란 2013.05.30
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 ‘고대일록’에 주목해야 “일기는 비망록입니다. 동시에 작성자의 후손 등 특정인에게만 열람할 수 있도록 쓰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중앙 차원의 기록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 밝혀질 가능성이 큽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임진왜란기 개인적이고 현장의 정보를 담고 있습.. 전쟁...../임진왜란 2013.05.30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임진왜란 동안에 가장 유명세를 얻은 의병장은 곽재우나 김덕령이지만, 이룩한 전과로 따진다면 나는 단연 함경도를 일본군의 손에서 되찾아낸 정문부를 꼽고 싶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 2번대와 매국노 국경인의 수작으로 함경도는 한 때 도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수중에 .. 전쟁...../임진왜란 2013.05.30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만든 성 라우렌시오 성당| ◎ 일본의 천주교 전래와 나가사키 1549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듬해인 1550년 가을 나가사키 현 히라도로 옮겨와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552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포교를 승인받은 이후 1570년 .. 전쟁...../임진왜란 2013.05.30